634화. 정리(整理) (4)
모용군은 말없이 앞장서 걸었다.
연호정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가족 생각에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탓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당가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야산까지 간 두 사람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도 전체가 보이진 않았지만 당가의 거대한 영역과 당가타, 그리고 그 너머의 마을들 몇 개가 보였다.
야산이라고는 했지만, 상당히 험하고 높아 오르기 힘든 산이었다. 애초에 오르려면 당가타를 지날 수밖에 없어서, 외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오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황량했고, 그래서 고요했다.
모용군은 뒷짐을 진 채 당가를 내려다보았다.
연호정은 팔짱을 낀 채 나무에 기대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축하하네.”
뜬금없는 축하에도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감사하오.”
당가 사태가 끝난 후, 단둘이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에도 딱히 대화다운 대화는 나눠 보질 않았다.
그래서일까? 모용군의 목소리가 조금은 낯설게 들렸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꽤 시간이 걸리더구먼.”
“무엇이 말이오?”
“자네가 무극을 열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말일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거요?”
“맞아. 어차피 현실은 바뀌지 않는 것을.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네.”
상대가 강하다고 넋 놓고 퍼져 있는 것만큼 못난 것도 없다. 당연히 모용군도 그런 사람을 혐오하고 비웃었다.
한데 정작 그 당사자가 되어 보니, 참으로 비참한 기분이었다.
“어떤가? 기분이.”
“별다른 것 없소이다.”
“별다른 게 없다고?”
“올랐을 때는 좋았지만,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소.”
“그렇긴 했지.”
“열흘이 넘도록 아직 내 무공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소. 그래서 그런지, 실감이 안 가는군.”
“그렇구먼.”
모용군은 여전히 등을 내보인 채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오? 축하 인사 하려고 이 멀리까지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모용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재차 입을 열었다.
“큰 비밀을 말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아군으로 회유하고자 고민한 것 같지도 않고.”
“…….”
“그렇다고 시원하게 한판 붙고 싶은 것 같지도 않고.”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붙고 싶다? 붙어서 싸움이 된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정했다. 이제 자신은 연호정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무극을 열었다는 사실을 떠나서, 직감적으로 느꼈다.
‘보이지 않는다.’
모용군이 눈을 감았다.
‘좌우를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들어야 겨우 발치가 보이는 곳에 있어.’
이전의 연호정도 진기를 갈무리하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래도 엇비슷한 경지의 고수들은 연호정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위압감은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인기척을 제외한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사람이 정말 무공을 익히긴 한 건지조차 애매했다.
아마도 무공을 더 연마하고 완벽하게 다스릴 줄 알게 된다면, 여느 범부와도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게 변할 것이다.
‘반박귀진(返樸歸眞)……!’
무도가(武道家)로서 갖출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자 품격.
무엇이든 극에 이르도록 배우면 도리어 평범하게 보이는 법, 그것은 무도에도 통용되는 이치였다.
반박귀진. 본래의 순후하고 진실한 상태로 돌아오다.
연호정은 조만간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를 것이다. 무극을 열었다고 끝이 아닌바, 광대무변한 무도의 세계에서, 어쩌면 반박귀진이라는 경지조차도 하나의 통과점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네가 보는 세상은 어떠한가?”
이 또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뱅뱅 돌려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오.”
“꼭 듣고 싶네. 우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어도, 담소를 나누는 것까지 불편해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불편해, 이 양반아.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무 추상적이고 광범위한 질문이라 뭐라 답하기 애매하군.”
“그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도록 함세. 자네는 이 세상을 자유롭게 놔두었으면 좋겠나? 아니면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나.”
“사회가 유지되려면 통제는 필수지.”
“역시 그런가.”
“필요하되, 인간의 권리를 침해할 정도의 통제는 지양하는 게 좋겠고.”
“이상적이군.”
“이상을 추구하는 걸 좋아하오.”
“인간의 권리라는 것도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
“그렇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은 듯, 간결한 대답이었다.
모용군이 눈을 떴다.
다시 바라본 당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바뀐 것도 같았다.
“자네가 보는 나는 어떤가?”
“오늘 뭐 날 잡았소?”
“꼭 듣고 싶네.”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묻어났다.
연호정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권력에 미쳐서 도리를 무시하고 날뛰길 주저치 않는 간웅(奸雄).”
“……허허.”
“제 사람은 끔찍이 챙기지만, 남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 따위는 무시하는 부도덕한 위정자.”
“타인보다 내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이 잘못인가.”
“그리고 본인의 그러한 성향을 만천하에 공개하길 꺼리는 겁쟁이.”
“…….”
“타인은 물론, 내 사람이라고 꼭 잘 챙길 필요는 없지. 사람은 다 다르니까. 문제는 당신이 백도 명문가의 수장이라는 거지.”
“명문가의 수장은 그러면 안 되나?”
“자유 의지를 말하고 싶은 거요? 그렇다면 그래도 되겠지. 언제고 가문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겠지만.”
“…….”
“그런 결말을 원한다면, 어디 마음 가는 대로 해 보시오.”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러겠다면, 직접 끝장을 내 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모용군이 몸을 돌렸다.
뜻밖에도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꽤 자극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자네는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군.”
“잘못이오?”
“잘못은 아니지만, 역시나 안타깝군. 자네가 말하는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을 위한 제도나 혁신적인 규범을 제시하진 못하네.”
“당연한 거 아니오?”
“……?”
“나는 위정자가 아니오. 강호 무림에 사는 무림인이고, 무림인이기 전에 평범한 사람이외다.”
“감당키 힘든 말일세. 서른이 되기 전에 무극을 연 희대의 천재가 평범하다니? 말장난에 불과해.”
“그게 문제인 거요.”
“무엇이 말인가?”
“무림인이 무공이 강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 하지만 대장장이나 숙수가 볼 때는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할 줄 모르는 칼잡이에 불과할 뿐이야.”
“……!”
“당신이 말하는 특별함은 결국 힘에 치중되어 있소. 세상이 결국 힘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 부인하진 않겠지만 당신은 그 이외의 세상은 거들떠보지도 않지. 그러니까 야망을 위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도 양심의 가책 없이 죽일 수 있는 거고.”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오. 당신도, 성천의 강자들도, 그리고 내 가족도 그러하오.”
“…….”
“다만 영향력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더 조심하고, 더 깊게 생각해야 하는 거요.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지킬 힘이 있기에 삼교와 싸우고 있는 것이오.”
“…….”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사상을 지적하고 싶거나 회유할 생각이라면 굳이 대화를 이어 갈 필요가 없소. 어차피 우리는 피차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각자의 목적을 포기하지도 않을 테니까.”
“자넨 참 답답한 사람일세.”
“내가 볼 때, 무림에서 당신만큼 남의 말 안 듣는 사람도 달리 없소. 엄청 답답해.”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면 나는 이만 가겠소. 당신 말대로 아직 내 무공을 가다듬지 못했거든.”
“무엇 때문인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모용군을 돌아보았다.
“또 뭔 소리요?”
“그만한 재능, 그만한 힘을 지녔음에도 왜 그 자리에 만족하는가?”
“말해 주고 싶지도 않고, 말해 줘도 이해 못 할 거요.”
“욕망에 솔직해지게. 도덕이라는 틀에 사로잡혀 한계를 짓지 말란 말이네. 힘이 있고 재능이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고 싶은 모든 것을 손에 넣는 것이야.”
모용군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정적으로 변했다.
“힘은 곧 책임이라고 했지? 맞네. 자네는 그 힘에 책임을 져야 해. 자신의 힘과 재능을 만천하에 증명해야 해. 재능이란 재미가 아니라 증명이야.”
“난 내 재능이 재미도 없고, 증명할 생각도 없소. 애초에 천재도 아니고.”
“타고난 재능을 도덕적 한계 때문에 제대로 써먹지도 않을 참인가?!”
“내게 재능이 있어 이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면, 나는 그 힘의 책임을 외세의 침공을 막기 위해 쓸 것이오. 그것이 내가 정한 책임이오.”
“그것이 바로 자네의 한계야! 자유와 권리를 부르짖는 자가 그런 허상 같은……!”
“진정 내가 한계 짓지 않기를 바라오?”
번쩍!
순간 주변 공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후우우우우우웅.
조금은 쌀쌀했던 바람이 순식간에 얼음 폭풍이 되어 모용군의 안색을 창백하게 굳혔다.
연호정의 두 눈에 살기가 일었다.
“어디 도덕적 한계 없이, 지금 당장 당신부터 죽일까?”
“……!!”
“내 한계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요. 내가 주변 눈치 안 보고 미쳐 날뛰었다면, 지금쯤 당신 몸뚱이는 이름 모를 산의 거름이 되었겠지.”
“…….”
“책임질 수 없는 말로 날 자극하지 마시오.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결국 당신이 지껄이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 뿐인 헛소리에 불과해.”
후우욱.
지독하게 차가웠던 공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화와 사음에 이어, 이제 광혈까지 모습을 드러냈소. 정확히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을 노리고 있었지만.”
“…….”
“명문가의 수장답게, 강호 무림을 대표하는 무가의 주인장답게 대의가 무엇인지를 잘 보셨으면 좋겠소이다.”
연호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휘적휘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물끄러미 그의 등을 보던 모용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본론을 말하지 않았군.”
연호정이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었다.
“난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소이다.”
“날 죽이게.”
“……?!”
깜짝 놀란 연호정이 모용군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모용군의 두 눈은 안정을 찾은 채였다.
“지금 여기서 날 죽이고 가게
“……농담치고는 과한데.”
“나를 멈출 기회는 지금뿐이야. 이곳에서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기어이 무림맹을 손에 넣어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 것일세. 그리고 난 그 정도 역량이 된다고 생각하네.”
“…….”
“오늘 이 시간이 지나면, 자네는 절대 나를 막지 못해.”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선택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