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정리(整理) (2)
“…….”
눈을 뜬 당형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어디?’
이십여 년을 같은 곳에서 지냈다. 눈을 뜨면 항상 보였던 천장이 아니었다.
그때,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당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또렷함과 흐릿함이 반복되는 시야가 서서히 바로잡혔다.
당형의 눈이 커졌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니, 낯설고도 그리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윤이?”
당윤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
당형은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첫째와 둘째도 그랬지만, 막내와는 유독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아주 어릴 때는 가족끼리 모여 식사도 자주 했지만, 일이 바빠지고 난 이후에는 열흘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더랬다.
그런 막내가 이곳에 있다.
당윤이 말했다.
“형님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기절하셔서 따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너도 그 자리에 왔단 말이냐?”
“예.”
“그래, 그랬구나.”
당형의 눈이 흔들렸다.
“참으로 많이 컸구나.”
스스로를 유폐하기 전, 막내는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홍안의 청년이었다. 그런 아이가 이제는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정말 많이 컸구나.”
당윤이 미소를 지었다.
“이십 년이 지났으니까요.”
놀라운 반응이었다.
당형의 기억에 있는 막내는 자신의 핏줄답지 않게 무척 선하고 수더분한 아이였다. 어릴 때는 곧잘 울기도 했고 경쟁보다 화합을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이렇게나 바뀌다니.’
세월의 삭풍은 막내도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가벼운 미소 아래 깔린 중후한 분위기. 봄바람에 웃고 가을바람에 울었던 막내는, 이제 태풍이 몰려와도 당황하지 않는 멋진 사내가 되어 있었다.
당형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애비를 원망하느냐?”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궁금했다. 막내 역시 첫째와 둘째처럼 자신을 원망했는지.
당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요.”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당형의 눈에 불쑥 눈물이 고였다. 나이를 먹고 몸도 이 지경이 되니, 유독 눈물이 많아진 것 같았다.
“애비를 용서하거라.”
“제가 뭘 잘했다고 아버지를 용서하겠습니까. 스스로를 유폐하신 뒤, 한번 찾아가지도 못한 불효자인데요.”
“아니다. 아니야. 모든 게 이 애비의 잘못이었다.”
“아버지.”
“일흔이 넘은 지금에야 자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알게 되었다. 이리도 못난 애비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느냐.”
막내의 변화에 놀란 아버지처럼.
당형의 변화에 당윤 역시 놀랐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혈육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치 큰형처럼.
‘사람을 이리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구나, 세월이라는 것은.’
당윤은 탄식했다.
“우리 가족은 큰 대가를 치렀습니다.”
“…….”
“그런 만큼, 앞으로 화목하게 지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래야지.”
“형님께 들었습니다. 앞으로 옆에서 지켜봐 주신다고요. 당가의 큰 어른으로서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틀렸다. 네 형이 애비를 용서해 준 것이지, 내가 원해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
“저희가 안 보고 싶으셨습니까?”
기어이 당형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미소 짓는 당윤의 눈가에도 눈물이 어렸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 모시겠습니다.”
“오냐.”
기쁨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부자.
두 사람이 눈물을 훔치고 감정을 가다듬기까지는 일각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옅게 웃으며 당형이 물었다.
“그나저나 가문은 어찌 되었느냐? 기절한 이후로 기억이 없어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리 중입니다.”
“얼마나 지났느냐?”
“아버지께서 정신을 잃으신 후, 열흘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당형은 깜짝 놀랐다.
“내가 열흘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단 말이냐?”
“예.”
그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단 말인가.
당형은 잠시 자신의 내부를 점검했다.
‘……?!’
응급조치를 했지만, 그래도 심각한 부상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데 내부가 깨끗했다. 부러진 뼈에 상한 장기도 거의 다 나아 있었고, 폭주하는 독기도 중단전과 하단전에 골고루 나뉘어 잘 봉인되어 있었다.
내상은 좀 남았지만, 사나흘 안에 자력으로 치료가 될 정도였다.
당형이 물었다.
“본가에 신의(神醫)라도 온 것이냐? 가문의 의원들이 전부 달라붙어도 이리 빠르게 고쳐 놓긴 힘들었을 터인데.”
“큰형님과 무림맹 유군 부대의 수장이 며칠 동안 애를 썼습니다.”
당형의 눈이 빛났다.
“유군 부대 수장이라면, 연호정을 말하는 것이냐?”
“예.”
당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삼 놀랍더군요. 그 연배에 무극을 열다니, 아마도 무림사 최초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이지 괴물이 따로 없더군요.”
“최초는 아니지.”
“예?”
당형이 눈을 감았다.
“최초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하지 않은 일도 아니다. 그 정도 위업이라면 고금에 손꼽히는 재능이라는 뜻이니까.”
“그렇지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구나. 무극을 개방했다 해도 새로운 힘을 제어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인데. 게다가 내출혈을 완전히 잡고 장기의 기능을 완벽하게 살려 놨어. 이런 건 누구라도 힘들다.”
당윤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역시 천생 무인이시다, 아버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연 대수의 무공은 인체의 근육과 신경, 오장육부를 다스리는 데에 특화된 무공인 모양입니다. 함께 치료했던 의원들도 많이 놀랐더랬습니다.”
“……인체를 다스리는 데에 특화된 무공이라.”
“무려 네 가지의 진기를 다룬다고 하더군요. 과연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개도 힘든데 무려 네 가지의 진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니, 그 연배에 무극을 연 것도 이해가 됩니다.”
“……설마 사신(四神)은 아니겠지?”
“예?”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당형이 확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당윤이 재차 물었다.
“사신이라니요?”
“아니다. 고대 문헌에서 읽은 게 생각이 나서. 실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황된 내용이 가득한 책이었지.”
“아, 예.”
당형이 천천히 상체를 세웠다.
당윤이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조금 더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이 깨었으면 충분해. 환자라고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딘 법이다.”
이런 말씀까지 하실 정도면 충분히 괜찮다는 뜻이리라.
당윤은 더는 아버지를 막지 않았다.
“여기, 물부터 드십시오.”
“고맙다.”
고작 물 한 그릇 드린 것뿐인데도 고맙다고 하신다. 당윤은 아버지의 그런 말투가 어색했다.
급하지 않게 한 사발의 물을 마신 당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가서 네 큰형부터 보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의방에서 나오자 일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헉! 전대 가주님?!”
“어르신을 뵙습니다!”
지나치는 사람들, 의원이고 무사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당형에게 넙죽 인사했다.
당형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에게 인사를 받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어, 어르신!”
그때, 저 멀리서 한 명의 의원이 달려왔다.
나이 지긋한 의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연배가 당형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당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자네…… 설마 상백인가?”
“저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본가 의술의 맥을 이은 천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당상백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기억해 주셔서, 그리고 다시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그나저나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족히 닷새는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당형이 당윤을 힐끔거렸다.
“자식들 보고 싶어서 눈치도 없이 먼저 일어났나 보네.”
당윤이 빙긋 웃었다.
당상백이 그런 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자네가 내 몸을 보았는가?”
“이십 년 만에 세상에 나오신 본가 최고의 어른을 어찌 제자들에게 맡겨 두겠습니까.”
“허허, 제자들이라니. 하면 자네가 약독원(藥毒院)의 원주가 된 겐가?”
“예, 며칠 전에 다시 임명되었지요.”
“며칠 전? 하면 그 전에는……?”
당상백의 표정이 살짝 흐려졌다.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래, 자네도 고생 많았네. 내 못난 자식이 참으로 여기저기 피해를 끼쳤구먼.”
“아닙니다.”
“따로 먹을 약은 없겠지?”
당상백이 미소를 지었다.
“깨어나신 이상, 본가 최고의 의원은 제가 아니라 어르신입니다. 어르신께서 스스로를 돌보시는 것이 가장 빠를 겁니다.”
당형은 당가의 모든 공부에 정통한 만능자였다. 기관진식과 진법, 학문은 물론 의술마저도.
당상백의 말마따나 또렷하게 정신을 차린 이상, 당형이 직접 자신의 몸을 바로잡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 못난 늙은이 때문에 고생이 많았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들름세.”
“알겠습니다.”
의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가주원을 향해 걸었다.
놀랍게도 가주원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은거를 깨고 나왔을 때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없었는데.
“방계들입니다.”
“방계.”
“예. 둘째 형님이 쫓아냈던 방계들을 큰형님께서 전부 불러들였습니다.”
“그랬구나.”
당형이 따뜻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당형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윤에게도 간신히 어정쩡한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그들 중 당형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과거에 몇 번 봤다 해도, 이십 년이 지난 당형의 외모는 그때와 많은 차이가 있으니 당연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당윤이 당형에게 물었다.
“언짢으십니까?”
당형이 피식 웃었다.
“이런 걸로 언짢아할 정도면 이십 년 전에 네 형과 결단을 봤을 것이다.”
“하하.”
“시간이 흐르면 시대가 바뀌고, 시대가 바뀌면 사람도, 규범도, 정의도 바뀌는 법이다. 이 애비는 지나간 시대의 상징이다. 오히려 애비를 잊는 것이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형은 굳이 당윤의 말이 틀렸다고도, 옳다고도 하지 않았다.
“저기 가주전이 보이는구나.”
“예, 다 왔습니다.”
그때였다.
“으음?”
당형의 눈이 빛났다.
“왜 그러십니까?”
“팔팔하기도 하구나.”
“예?”
“네 형 말이다.”
당형이 껄껄 웃었다.
“쉴 때는 쉬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 시간을 쪼개서 무공을 교정하고 있구나. 하긴, 그냥 놔두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무공이긴 했다.”
이게 무슨 말씀이지?
당윤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쿠구궁!!
강렬한 충격으로 가주전 주변의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거렸다.
일대의 사람들이 놀라서 가주전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당윤조차도 그러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은 당형이 유일했다.
그가 경쾌하게 말했다.
“가자. 흘러나오는 기파를 보니 벌써 어느 정도는 교정이 된 모양이다. 연호정 그 녀석에게는 이래저래 신세를 지는구먼.”
“연 대수 말씀이신지요?”
“그래.”
당형의 눈이 깊어졌다.
“네 형과 연호정이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