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화. 정리(整理) (1)
“쿨럭!”
오늘 몇 번이나 기침을 하는지 모르겠다.
화진천은 동경 속의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안색. 머리카락과 수염도 예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았다.
반쯤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지라 예전처럼 더럽게 하고 다니진 않았다. 그래서일까? 창백한 안색이 더 부각되어 보이는 듯했다.
그가 나직이 투덜거렸다.
“망할 놈 같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갈 날 얼마 안 남은 노인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옆에 허리를 펴고 선 중년 사내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명을 내려 주십시오. 방주님께 무례를 저지른 그놈을 당장 잡아 오겠습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그놈이 아니면 사천의 전운을 걷어 낼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이냐. 게다가 그놈 일행은 전부 그 녀석의 말을 따르고 있어. 이번 작전의 핵심은 당가주지만, 이번 작전의 성패는 연호정에게 달렸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나도 알밤 몇 대 쥐어박고 싶다만, 늙어서 그것도 쉽지 않구먼.”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일이 마무리되면 제대로 손봐 주겠습니다.”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그럴 실력은 되고?”
“저는 용호풍운의 좌장입니다.”
“그걸 내가 모른다더냐?”
“…….”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는 건 좋지만 자만하지는 마라. 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마귀 놈 상대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롭다.”
중년 사내의 눈이 깊어졌다.
용두방주를 호위하는 개방 최정예 호위 부대가 용호풍운 호위대였다. 그리고 그는 그 부대의 수장이었다.
당연히 지닌바 무력도 강호 최상위권이다. 성천의 강자들이야 반선의 존재들이니 어쩔 수 없지만, 구대문파의 장문인급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거기에 호위대 특유의 암습까지 실행하면 그의 독아(毒牙)를 피할 수 있는 고수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화진천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부터 알았지. 힘만 믿고 나대는 놈은 아니라는 걸.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완전히 괴물이 되었더군.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강해.”
“…….”
“하긴, 그 말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연하기도 한가…….”
이게 무슨 말일까?
궁금했지만, 중년 사내는 굳이 묻지 않았다.
화진천이 쾌활하게 말했다.
“뭐가 되었든 당가주 몰래 암인을 심은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거지. 다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가 당가와 운명을 같이한다…… 오히려 멋지지 않나? 화진천이라는 이름 석 자에 아직 그 정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 말이야.”
“용두방주님은 천하제일입니다.”
“성천의 괴물들이 들으면 섭섭해하겠군.”
“무공만 강하다고 천하제일은 아닙니다. 강호에 끼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천하에 방주님과 비견될 만한 신인(神人)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요즘 아부하는 법도 배웠나?”
“진심입니다.”
화진천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제자 놈이 자네의 진심을 좀 배웠으면 좋겠구먼.”
그때였다.
‘음?’
화진천의 눈이 번뜩였다.
창밖, 좁은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연호정이었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틀어 올린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문제는.
‘언제?’
당가의 독에 중독된 상태라지만 감만큼은 죽지 않았다.
한데 녀석이 골목길에 들어선 것도 느끼지 못했다. 바보 제자 놈에게 대량의 내공을 전수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
화진천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용각.”
“예, 방주님.”
“손님 오신다. 아랫것들에게 술상 좀 봐 오라 시키거라.”
손님이라니?
용각이 화진천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
아무도 없었다. 눈에도 보이지 않았고 기감에 잡히는 인기척도 없었다.
“방주님. 누가…….”
그때, 화진천이 용각의 뒤를 바라보았다.
“오셨는가.”
“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용각은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그곳에 연호정이 있었다.
‘……!!’
용각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호위대는 은신에도 능하다. 은신에 능하다는 것은 일반 무림인들보다 감각이 훨씬 더 예민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등 뒤로 접근한 연호정의 기척을.
만약 연호정이 살심을 품었다면?
우둑.
용각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표정 예술일세그려. 당장 달려들 기세인데.”
화진천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용각!”
“……예, 방주님.”
스르륵.
용각이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초절정고수라도 용각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지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에게는 그것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좌측 기둥을 따라 천장으로 올라가는 일련의 시선은 용각이 움직이는 방향 그대로였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안 답답하나? 저런 곳에 숨어 있으면.”
화진천이 담담한 얼굴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왔으면 앉게나.”
“그럽시다.”
연호정이 선선히 의자로 가 앉았다.
화진천의 눈이 빛났다.
‘달라졌다.’
완전히.
‘기도? 눈빛? 그런 변화가 아니야. 아예 무공 자체가…….’
순간 화진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살짝 모로 꺾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계시는 거요?”
“……아닐세.”
노련하게 표정을 수습한 그가 짐짓 가볍게 말을 건넸다.
“여유 넘치는 얼굴을 보니 결과는 안 들어도 알겠지만, 그래도 직접 확인은 해야겠지. 일은 어떻게 되었나?”
“다 잡았소.”
“역시.”
화진천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고 많았네.”
말은 안 했어도 그 또한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안도하는 표정에 진심이 느껴졌다.
“수고는 당씨들이 많이 했지. 혈육과 싸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허허, 냉혈철심의 사내인 줄 알았거늘, 제법 세심한 구석이 있구먼?”
“나라고 가족이 없는 건 아니잖소.”
가족이라.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가족의 존재가 자네에게 힘을 주는 모양이군.”
“모두에게 그렇겠지. 방주 역시 이놈 저놈 해도 후개 덕분에 든든하지 않소?”
“말도 말게. 놀기만 좋아해서 걱정이 태산이야. 든든하기는커녕 눈에 밟혀서, 놀다가도 가끔씩 목덜미가 아리는 기분일세.”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요.”
“없으면 안 되지. 내공까지 퍼 날라 줬는데 아깝잖나.”
전에도 느꼈지만, 확실히 이 사제(師弟)는 유쾌했다.
욕을 하면서도 깊은 애정이 느껴진다. 연호정은 이전보다 화진천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더욱 철저히, 세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보이는군.’
이 경지에 오르지 않아도 보일 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경험에 의거한 확신에 가까운 예감일 뿐, 정말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화진천을 중독시킬 이유도 없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지극히 능해. 표정과 감정을 일치시키다가도 필요할 땐 섬세하게 조절하여 상대의 안목을 교란한다.’
용두방주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얻은 배움일 것이다. 정보를 다룬다는 것은 곧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 용두방주는 상대에게 정보를 캐내는 것보다 얻은 정보를 지키는 데에 능한 사람이리라.
‘후개도 저렇게 변하려나.’
흑암제 시절의 가득상은 화진천과 달랐다. 화진천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풍부한 감정을 드러내는 자였다.
전쟁통에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것은 보통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연호정이 가득상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였다.
“일단 자세한 경위부터 들어 봄세.”
연호정은 그간의 일을 담담하게 말했다.
화진천의 눈이 빛났다.
“암왕이 모습을 드러냈단 말인가?”
“그렇소.”
“허! 자네가 설득했다고?”
“설득은 했는데, 나 때문은 아닌 것 같소. 노선배도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지. 거기에 귀문을 감지하자 결심을 하셨던 것 같소.”
“흐음.”
귀문이란 말을 들었음에도 의문을 표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이미 그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암왕이 나타났다면 그걸로 상황이 종료되었겠군.”
“꼭 그렇지만도 않소.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음?”
“자식이 저지른 일이니까. 아무래도 냉정해지긴 어렵겠지.”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화진천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라면 어땠겠나?”
“무엇이 말이오?”
“혼인은 안 했으니, 자네 동생을 두고 말해 봄세. 자네 동생이 이와 유사한 짓을 벌였다면 자네도 망설였을 텐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상황을 맞이해 보지 않고서야 어찌 알겠소? 다만 내 성정상 머뭇거리진 않을 거요.”
화진천이 씩 웃었다.
“가족을 끔찍이 생각한다더니.”
“내 가족이 끔찍한 만큼 다른 사람의 가족도 소중한 거 아니오?”
“…….”
“피눈물을 쏟으며 죽였을 거요. 아마도.”
진심이군.
화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연배에 다져질 만한 정신력이 아니로고.”
“삶의 가치관이 다른 것뿐이오. 그러니 듣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이 얘기는 이쯤 합시다.”
“허허, 그럼세. 내가 실례했어.”
“안다면 다행이오.”
“암왕은 멀쩡하고?”
“당분간 요양을 좀 해야 할 거요.”
화진천이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거면 되었다.
“광혈교라고 했는가.”
“그렇소.”
“광혈이라…… 머리 아프구먼.”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무림사(武林史)에 수많은 사교 무리가 등장했고, 중원 무림은 그런 이들과 숱하게 싸워 가며 이 땅을 지켰지. 개중에는 정말 끔찍한 마공을 연성한 집단이 있는가 하면, 상식을 파괴하는 사술을 들고 오는 놈들도 많았다고 했네.”
“…….”
“하지만 이혼(移魂)의 술수를 쓴 사교 무리는 역사상 한 곳뿐이었어.”
“혈교?”
“그렇다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혈교에 관한 정보가 있으면 추려서 건네주시오.”
“음? 자네는 혈교에 대해 잘 모르나?”
“많지는 않소. 안다고 해도 아무렴 개방에서 얻은 정보가 내 머리통에 수집된 정보보다는 많지 않겠소?”
“…….”
이번에도 화진천은 연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려서 보내 주겠네.”
“고맙소.”
“당분간 당가에 있을 생각인가?”
“뒷정리하는 걸 좀 도와줄 생각이오. 가주님과 볼일도 남았고.”
“낙원소의 잔당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 패율 장로가 포착했다던 놈들 말이야.”
“중독시켰소.”
“으잉?!”
이건 또 의외였다. 중독이라니? 그들을 전부?
“패율 선배의 말에 의하면 청성과 아미를 전복시켜 삼교에 붙어먹을 작정을 한 모양이오. 당장 잡아들이고 싶었지만, 혹시 몰라 모조리 중독시켰소.”
“어떻게?”
“당가주와 당신네 그 잘난 암인이 힘 좀 썼소.”
“……끄응.”
“아직 혼란스럽기는 해도 잘 정리 중이니, 조만간 그치들까지 뽑아낼 것이오.”
화진천이 눈빛을 굳혔다.
“위험했네. 차라리 잡아들이지 그랬나? 중독된 상태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놈들은 본인들이 중독되었다는 사실도 모를 거요.”
“음.”
“정 마음에 걸리면 개방에서 손 좀 쓰시든가. 우리만 너무 시켜 먹지 말고.”
“할 말 없게 만드는군.”
연호정이 일어나며 작은 금낭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해독약이오. 고생 많으셨소.”
화진천이 투덜거렸다.
“고생한 늙은이에게 그게 전부인가?”
“고생한 당가 사람들 토닥여 주시길 바라오.”
“……끝까지 할 말 없게 만드는구먼.”
“가오. 당가가 진정되면 다시 만납시다. 그때는 직접 와서 당가주에게 사과나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사라졌다.
화진천이 입맛을 다실 때, 거지 하나가 술상을 가져왔다.
“술상은 되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당장 천룡당(天龍堂)에 기별을 넣어라.”
“천룡당에요?”
“그래.”
화진천의 눈이 흔들렸다.
“성천에 자리 하나를 더 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