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천하를 논하다 (4)
치이익!
숲 인근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경계하던 패율은 문득 어깨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허연 연기를 보았다.
‘빌어먹을.’
우우우웅!
진기를 운용, 피부 표면에 남은 독기를 완전히 뒤덮어 눌러 버렸다.
당관이 준 약물 덕에 잠시나마 대부분의 독에 면역이 되었지만, 약효가 떨어진 이후에는 차곡차곡 쌓인 독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목숨이 날아가지 않은 게 다행이긴 했다. 그간의 깨달음, 숱한 전투로 몸에 밴 무도(武道)가 제 역할을 해 주지 않았다면 진즉 중독사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지독하군.’
어지간한 독이라면 진기로 순식간에 해독할 수 있다. 구대문파의 무공은 대부분 그 정도가 가능한 일류의 무공들이다.
하물며 점창의 장로인 패율의 신공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덮어 두고 억누르고 있다는 건,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면 이 독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지독한 새끼들. 하여간 밥맛이야.’
쇠와 쇠가 부딪치는 살 떨리는 전투가 아닌, 독과 암기를 쏴 대는 싸움은 패율이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걸 알았기에 연호정도 자신을 이런 곳에 보낸 것이리라. 확실히 그놈은 사람 분석하는 데에 도가 튼 놈이었다.
‘어차피 지금 몸뚱이로는 싸울 수도 없으니까.’
우우웅! 우우우웅!
한번 일어난 진기가 빠르게 전신을 돌았다.
몸 곳곳이 아파 왔다. 독도 독이지만 외상도 상당했다. 당가의 망할 암기는 정통으로 맞으면 관통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을 파헤치고 근육을 헤집어 사람을 끝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패율은 어깨 근육 안으로 파고든 암기 하나를 내공으로 살살 밀어 내 손으로 뽑았다.
피슉!
피가 쭉 나오더니 제법 독한 냄새를 풍겼다.
익숙한 손길로 지혈한 패율이 손을 휘둘러 내공을 방사했다.
사아악.
가볍게 부는 바람에 독한 냄새가 서서히 사라졌다.
패율은 치를 떨었다.
‘내 다시는 당가 놈들하고 싸우지 않겠다.’
하긴,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더는 당가인과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는 전쟁을 벌여야겠지만.
속으로 투덜거리며, 패율은 주변을 정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
그의 얼굴이 확 굳었다.
스르륵.
깨끗한 면포로 닦은 단창을 꺼내 든 그가 발끝에 힘을 주었다.
사라라락.
중독에 내외상까지 입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신법은 빠르고 날랬다. 와중에 고요하기까지 하니,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고수도 그의 움직임을 파악하긴 힘들 터였다.
잠시 후.
“확실히 이상하네요.”
패율의 눈이 빛났다.
잘 닦인 숲길 너머, 두런거리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저 멀리 당가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공기…… 이건 전장의 공기에요. 살기가 가득하군요.”
“그렇구먼.”
“정보가 사실이었어요. 아니길 바랐건만.”
“이거 상황이 급하게 되었소이다. 그쪽에서 따로 연락이 온 건 없소?”
“네, 아직은.”
“무림맹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사천 전체가 피바다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이외다.”
“혹은.”
“음?”
“함부로 사천을 공략하지 못할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말이외까?”
그러게, 저게 뭔 말이지?
패율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렸다.
느껴지는 인기척만 이백이 훌쩍 넘었고 하나하나가 만만하지 않은 전력이었지만, 두 남녀가 나누는 대화의 의미가 심상치 않았다.
“모르시겠어요?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어요.”
“그건 그렇소만.”
“우리도 우리지만 청성은 더할걸요. 청성 장문인 풍벽자가 저쪽 세력의 세작이었다는 게 알려진 이상, 이제 무림맹은 청성을 버릴 겁니다.”
“……!”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겠지요. 저들이 보기에 우리가 사천에서 벌였던 일들은 용납할 만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참으로 답답한 것들이지.”
“답답한 것들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죠. 저들 모두가 작정하고 병력을 파견하면 아미와 청성으로도 막기가 힘들 거예요.”
“틀린 말은 아니오만, 무림맹이 설마 그러겠소?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고는 하나, 묵룡부는 절대 믿을 만한 세력이 아닐 거요. 맹의 전력에 공백이 생기는 순간 묵룡부는 행동에 들어갈 확률이 높소.”
“확신할 수 없는 일에 머리를 쓰고 싶진 않군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가장 가능성이 큰 일, 그것도 우리에게 안 좋은 쪽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은 일은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오?”
“역시 무림맹이 움직인다는 거죠.”
“내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은…….”
“움직일 겁니다. 반드시.”
“…….”
“무림맹은 연합체고, 덩치가 큰 만큼 어지간해선 쉽게 움직이진 않아요. 하지만 저들의 기준에서 우리가 한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죠. 외세의 공격을 감수하고서라도 잡으려 들 정도의 일임은 확실해요.”
“어찌 확신하시오?”
“무림맹의 창설 이유는 전 중원의 평화이니까요.”
“……!”
“무림맹의 존재 의의가 민초의 평화예요. 우리가 그들을 건드린 이상, 저들은 이것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겁니다. 대외적으로든 비밀리든, 우리를 반드시 끝장내려 할 거예요.”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이대로 있어선 안 되잖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림맹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지요.”
“무슨 말씀이오?”
“배를 갈아타는 거죠.”
“……?!”
“…….”
“설마…… 삼교와 손을 잡자는 것이오?”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이미 손을 잡았잖아요, 우리?”
“뭐, 뭐라고?”
“낙원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
“지금이야 우리 업장들이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지만, 초기 사업 자금을 댄 그들이 아니었다면 낙원소 자체가 만들어질 수 없었어요. 또한 우리의 수입 중 꽤 많은 돈이 저쪽에 들어가고 있답니다.”
“그, 그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자들과 손을 잡은 것은 아니오! 그저 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외다.”
“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설령 진실로 거래뿐일 관계라 할지라도, 무림맹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예요.”
“이, 이런!”
“저들은 중원을 삼키려 들 생각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그 목표를 이룰 수도 있겠지요.”
“…….”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사천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안한 것이고요. 우리도 선대의 거짓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닌가요?”
“……맞는 말씀이오.”
“나는 더 이상 중원에 미련이 없어요. 그저 이 세상의 진실, 인간 본연의 숙명에 관심이 있을 뿐이죠.”
“…….”
“노사께서는 어떠세요?”
“물론…… 나 또한 그렇소.”
“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땅이니 민심이니 충의니 하는 것들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목적에 맞는 환경으로 들어가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겠소? 본산이야 우리끼리 힘을 합쳐 어찌 저찌 전복할 수 있다지만, 아미는 힘들 것이오. 아미에는 복호를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소?”
“많지만, 숙명을 받아들인 이들도 많죠. 게다가 복호는 맹에 있어요. 작정하고 휘어잡을 생각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허허허.”
“우리는 많은 전우를 잃었어요. 가족과 같은 이들, 연인들도 잃었지요. 더 이상의 희생은 우리를 시궁창으로 끌고 가게 할 뿐입니다.”
“그래, 맞소. 사태의 말씀이 다 옳은 말씀이외다.”
“함께하시겠어요?”
“생각해 보면 더 이상 남은 길이 없잖소. 물론 마지못해서 선택한 길은 아니외다. 사태 말씀대로 우리는 이미 수행자의 신분에서 벗어났소. 그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아갈 뿐.”
“제대로 보셨어요.”
“일단 확인부터 합시다. 당가 쪽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확인을 하고, 그다음 일을 벌이도록 합시다.”
“좋아요. 당윤(唐崙)에게 연락을 취할게요.”
순간 패율의 눈이 빛났다.
‘당윤이라면……?’
언젠가 한번 들었던 이름, 당윤.
‘당윤, 당윤…… 억?!’
패율의 눈이 충혈되었다.
‘암왕의 막내아들?!’
단순 재능만 보자면 당관에 필적, 혹은 그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희대의 천재.
하지만 당윤이 유명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천고의 재능을 타고났고, 실제로도 매우 강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설마!’
저들의 대화를 들어 보니, 당호만이 아니라 막내인 당윤까지 저들과 한패가 된 모양이었다.
‘이……!’
본능적으로 당가 쪽으로 달려갈 뻔했다.
패율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은신을 유지했다.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일행은 생각지도 못한 위험한 사태에 직면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치솟는 분노와 놀라움, 걱정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다. 저들에게 들키면 알리지도 못해.’
싸움에 미친 그였지만, 적어도 공사 구분은 확실했다.
패율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저들의 움직임은 물론, 저들의 대화 하나하나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푸드드득!
잠시 후, 한 마리 비둘기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평범해 보이지만 부리에 은은한 금빛 테가 둘려 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범한 비둘기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세한 흔적이었다.
“됐어요. 금관신구(金冠神鳩)를 보냈으니, 금방 답이 올 겁니다.”
패율이 눈을 빛냈다.
* * *
후우우우우웅!
폭발 현장으로 밀려드는 바람이 과열된 공기를 빠르게 식혔다.
시원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
그 바람을 맞으며 초토화된 대지를 바라보던 당관의 목이 순간 부풀어 올랐다.
“우웨에엑!”
쏟아 내는 핏물의 양이 상당했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역시 무리였구나.’
만천화우(滿天花雨), 줄여서 만화수(萬花手)라 불리는 이 절기는 제왕독공을 연성하지 않고는 입문조차 할 수 없는 초고난도의 무공이었다.
문제는 익혀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최소한 무종의 벽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극심한 내공 소모와 진기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만족하여 연성해도 만천화우를 펼치는 것은 위험하다.
‘삼단전의 기(氣)가 미쳐 날뛰고 있다.’
우우웅! 우우웅! 치이익!
당관의 몸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일거에 쏟아 낸 삼단의 기운. 남은 진기를 제어할 힘도 없다. 모든 힘을 개방한 당관의 단전은 자연기나 탁기의 구분 없이 주변의 기를 빨아들이다가도 다시 토해 내는 등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크윽!”
기어이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 독한 인내심을 생각하면 얼마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지 알 만했다.
‘아버지는 괜찮으신가.’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싸움을 기어이 보셨는지, 상체를 세우고 이쪽을 보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참으로 복잡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
한 아들의 뛰어난 성장을 목도한 동시에 또 다른 아들의 죽음을 보았다. 부모로서 느끼는 비참함이 얼마나 지독할 것인가.
당관은 눈을 감았다.
‘잘 가라.’
위대한 무공, 살기 넘치는 무공.
자신의 피와 땀이 서린, 자존심조차 내려놓고 배워 가며 창안한 이 무공의 첫 희생자는 바로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였다.
‘미안하다. 내가 제대로 형 노릇을 했다면 네가 사도(邪道)에 빠지지 않았을 것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당씨의 주인은 눈물 따위 흘리지 않는다.
다만, 안으로 고여 피눈물이 되었다.
‘저승에 가면, 그때는 꼭 사과하마.’
그때였다.
“형님.”
당관의 눈이 번쩍였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몸을 덮은 하나의 그림자.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바라본 당관의 눈이 이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