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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26화 (625/963)

626화. 천하를 논하다 (1)

“괜찮으신 겁니까.”

정문을 열고 들어간 당관이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감정을 추스른 당형이 말했다.

“무엇이 말이냐.”

“몹쓸 병마를 달고 다니시는 듯합니다.”

“별것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원하게 대답하는 당형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당장 내일 죽는다 한들, 어설프게나마 아들과의 관계를 풀었다.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반면 당관의 눈은 확연히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아버지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표정이 아버지에게 보일까 싶어서였다.

“무극을 개방한 절대고수도 어쩌지 못할 병입니까?”

당형은 아들의 목소리에서 걱정을 읽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자식에게 일부러 걱정을 안겨 주려는 부모는 없다. 다만, 아들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 자체는 좋았다. 조금은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아들에게, 당형은 굳이 돌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솔직한 대답을 바란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부작용이다.”

“부작용이라면……?”

“정확히는, 내가 욕심을 부린 것이다.”

당형이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들었지만, 제왕독경은 분명 천하에 다시 없을 독공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지.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

“그런 무공에 뭔가를 더하려다가 얻은 병이다. 무극을 개방한 반선(半仙)에게 걸맞은, 제왕독경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 보려 하였지.”

“…….”

“우스운 일이다. 지금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 나는 이미 완벽한 것을 만들었다. 그 완벽한 것에 억지로 주석을 달 필요가 없었거늘.”

“…….”

“범은 누가 뭐라 해도 짐승의 왕이다. 등에 날개가 없다고 산중 대왕이 아니라 하더냐. 하나, 나는 그것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또 고치려 했고, 이 병마가 커질 때쯤 깨달았다. 내 욕심이 과했음을.”

당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주 웃어 본 적 없는 그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그 또한 인생이지. 수명은 줄었으나 과욕이 금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으니, 정말 제대로 배운 셈이다.”

“……그렇습니까.”

“훗날 너도 알게 될 게다.”

당관 역시 무극의 영역에 도달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애증으로 점철된 세월이었지만, 당형은 한 번도 당관의 재능과 노력을 불신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결과를 두려워했을 뿐.

당관이 말했다.

“그래서 금제를 걸어 두신 겁니까.”

“거기까지 보였느냐?”

“…….”

“그래, 그래서 내 몸에 금제를 가했다. 필요 이상의 힘을 유지하면 병마가 몸을 갉아 먹더구나.”

당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거십시오.”

당형이 옅게 웃었다.

“당분간은 괜찮다. 가내가 불안하지 않으냐.”

“저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해결하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말 한마디로도 당관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강했던 그가, 이제는 공생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잘 알아서 하겠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뒤숭숭하지 않으냐. 듣자 하니 위험천만한 외세가 준동했다 하는데,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낫지 싶다.”

“아버지.”

“음?”

“편하게, 오래 사셔야 합니다.”

“…….”

등을 보이고 있지만, 아들의 목소리에서 진한 감정이 느껴졌다.

흔들리는 눈으로 한참 당관을 보던 당형이 이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기야, 당장 연호정이라는 녀석만 해도 충분할 것 같구나.”

“필요하다면 싸가지의 손이라도 빌릴 겁니다. 그러니 금제를 거십시오.”

“그래, 그리하마.”

당형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가슴과 복부를 몇 차례 눌렀다.

치이이이이이익!

이내 그의 몸 곳곳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싶더니, 은은하게 퍼져 나가던 존재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제왕독공이 봉인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된 겁니까?”

“되는 중이다. 걷자.”

“걸어도 됩니까?”

“싸우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야 문제 될 게 없지.”

부자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관의 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느렸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무리하실까 싶어서였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당형이 말했다.

“단전이 완전히 봉인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봉인이 된 연후에 천천히, 병마의 활동이 최소화되는 데까지만 열어 둘 것이다.”

“그렇군요.”

“무리만 안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마라.”

“걱정 안 합니다.”

짧게 답하는 당관의 목소리는 다소 딱딱했다.

이십 년 전이었다면 아들의 매정한 목소리에 조금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형은 안다. 이십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알았다.

아들은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서툴렀다.

마치 과거의 자신처럼.

‘하긴, 내 핏줄이니.’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당형은 아들의 그런 성격이 안타깝기도 했고, 가법에 얽매여 아들을 솔직하게 대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나, 괜찮다.’

이제부터 잘하면 되는 것이다.

칠십 넘은 애비와 오십 먹은 아들 사이라면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하루하루를 진실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당형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나저나 싸가지가 누구냐?”

“연호정, 그놈 말입니다.”

“듣자니 제법 친분이 깊은 듯한데.”

“친분이 깊다면 그놈 애비와 있겠지요. 그놈은 해당 사항 없습니다.”

“그런데도 데리고 왔단 말이냐?”

당관이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성격은 지랄 맞아도 실력은 괜찮은 놈입니다. 그런 놈이 이제 무극까지 열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저를 달달 볶을 겁니다.”

“꽤 당돌한 녀석인 것 같기는 했다.”

“싸가지가 없는 겁니다. 가문 내에서도 그런 싸가지를 본 적이 없지요.”

“허허.”

“나중에 혹시라도 녀석과 밥 자리 하실 일 있으면 말 한마디 섞지 마십시오. 세 치 혀로 사람도 죽일 놈입니다.”

“알았다, 내 그리하마.”

아들과 이런 평범한 대화가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늘.

흐뭇한 눈으로 당관을 보다, 당형은 문득 아들 어깨에 축 늘어진 둘째와 손주를 보았다.

“…….”

당형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첫째와의 관계는 개선되었지만, 결국 아들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들이 가문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죄 없는 이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는 것도.

‘인생이란 참으로…….’

쉽지 않아.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과 경악이 이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의식을 지배하는지 모르겠다.

당형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둘째의 죽음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이다. 아마 죽는 그 순간까지 잊을 수 없겠지.

하지만 지금은 슬퍼하고 싶지 않았다. 슬프지만, 그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묵묵히 걷던 당형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셋째……?”

그때였다.

‘……?’

당형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삼단전(三丹田)의 기운을 통째로 봉인하는 중이다. 오감이 범부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무극을 개방한 반선의 육신은, 기를 운용하지 않아도 뒤틀린 공기의 흐름과 알 수 없는 위화감을 포착할 수 있었다.

끼아아아악!

당형은 환청을 들었다.

마치 형체 없는 귀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혼(魂)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던 그가 순간 깜짝 놀라며 당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느껴지지 않아도 느껴진다.

무언가가 둘째의 시신에 들어갔음을, 아니 둘째의 시신에서 뭔가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뒤틀린 공기의 흐름을 읽고 귀신의 환청을 들으며, 나아가 시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신하기까지.

그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와도 같았다. 그 짧은 시간에 당형은 모든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위험!’

당형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고 했다.

‘……!!’

의식은 이미 첫째의 어깨에서 둘째의 시신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힘을 봉인하기 전의 그였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형의 몸은 반선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뻗으려 했던 손이 아직도 다 펴지지 않은 것이다.

당관이 입을 열었다.

“아, 셋째는…….”

쾅!

폭음과 함께 당형의 신형이 뒤로 훨훨 날아갔다.

번쩍!

왼쪽 어깨가 들썩인다 싶은 순간 당관은 본능적으로 당호와 당여선을 던지고 몸을 돌려 당형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쿨럭!”

쓰러진 당형의 입과 코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당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핏물의 색깔이 심상치가 않았다. 역류한 제왕독기가 내상과 함께 피에 묻어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움푹 들어간 우측 갈비뼈.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른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흉골 전체가 부서지는 것을 피했지만, 이 또한 충분한 치명상이었다.

“이…… 이!”

서둘러 당형의 가슴에 손을 얹은 당관이 제왕독공을 운용했다. 피와 장기로 뻗는 독기를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푸스스스스스!

둘 주변으로 거대한 독의 운무가 형성되었다.

제왕독공으로 제어하려 했지만, 당형이 품고 있는 독기가 너무 짙고 거대해 외부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르륵.

당관의 코에서 핏물이 흘렀다.

다스리려고 진기를 쏟아붓자마자 아버지의 독기로 내상을 입었다.

‘크윽!’

그야말로 엄청난 힘이었다. 폭주하기 시작하는 성천의 힘은 무극을 바라보는 초절정고수조차 순식간에 내상을 입게 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그때, 당형이 눈을 떴다.

고통스러운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엄하고 냉정한 얼굴이 실로 현역 시절 공포의 가주라 불리던 암왕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괜찮다. 녀석을 막아라.”

“아버지!”

“어서!”

당관이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렸다.

치이이이이익!

독의 운무를 헤치고 나타난 당호는 시뻘건 눈으로 당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관이 포효했다.

“당호!!”

콰앙!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가 당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퍼어어억!

독공도, 암기술도 아니었다. 한 인간의 극단적인 분노가 만들어 낸 동작이었다.

콰드득!

땅을 구른 당호의 얼굴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좌측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인 데다 광대가 내려앉아 눈알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광마신공, 철마신이 저절로 운용되고 있는 상태임에도 피부가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그만큼 당관의 주먹은 강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콰앙!

또다시 달려 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평생을 두고 익힌 독술과 암기술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쿠구궁!

당관의 주먹이 땅을 부수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당호는 그 일격을 맞았음에도 당관의 공격을 피해 냈다. 어떻게 그런 움직임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핏발 선 눈으로 회피한 당호를 노려보는 당관.

“……?!”

이내 당관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컥! 아, 아버지…….”

어느새 의식을 차린 당여선의 등 뒤에 숨은 당호가 그의 경동맥을 물었다.

푸슉! 푸슉!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섬뜩했다.

당호가 당여선의 명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콰드득! 콰드드득!

당여선의 몸이 조금씩, 조금씩 쪼그라졌다. 생기(生氣)를 흡수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가 아들의 피와 생기를 빨아들인다.

듣도 보도 못한 참혹한 광경이었다. 분노에 이성을 상실한 당관조차 순간 주춤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부아아앙!

빛살처럼 날아온 연호정이 당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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