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25화 (624/963)

625화. 끝이 없음이라 (7)

우웅. 우웅.

들려온다. 단(丹)의 목소리가.

후우우웅!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태양이 가슴 안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빛의 구슬. 합일(合一)되지 않은 진기들을 고속으로 회전시켜 억지로 힘을 끌어 올린 이전과는 달랐다.

벽산연가가 자랑하는 오대신공이 합일되어 온전한 빛이 된 신단이다.

연가 최대 비기 광명신단(光明神丹)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기(氣)의 상징이었다. 벽라의 안정성, 용포의 폭발력 등등의 사족이 필요 없다. 그 자체로 모든 특성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다.’

스승에게서 배운 홍천기(洪天氣)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가문의 신공을 연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홍천기의 속성 연마로 더 빨리 무극을 열 수 있었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고 가문의 공부 모두를 배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것으로 사신기(四神氣)의 합일을 가속시킬 수 있어.’

한 줄기에서 태어났지만, 시간이 지나 각자의 특성대로 발전된 연가의 신공들.

하나의 신공에 통달하면 다른 신공들도 수월하게 연성할 수 있다지만, 연가 역사상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이는 손에 꼽힌다.

연호정은 그 길이 자신에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가능하다 한들, 수십 년 세월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시작부터 신단(神丹) 연성을 목표로 잡았다. 연가의 오대신공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보다도 특성이 뚜렷한 사신기 역시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화르르르르륵!

우측 어깨 뒤로 무겁고 차가운 불꽃이 타올랐다.

성질이 다른 걸 넘어 아예 반대되는 기운, 주작화기(朱雀火氣)와 현무수기(玄武水氣)가 뒤섞였다.

화기와 수기는 상극이다. 부딪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사라진다. 그것은 대자연의 이치였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이 피워 올리는 두 기운은 도도한 흐름을 자랑하며 온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충돌하여 소멸하지 않는다. 상극의 이치조차 뛰어넘었다.

주작의 날개를 단 거대 괴수 현무였다. 그 혼돈의 힘이 오른팔 전체에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면.’

연호정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카카카카캉!

환상처럼 들리는 쇳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목기(木氣)의 생명력을 받아 성장하는 금기(金氣)의 추풍(秋風)이었다.

쿠구궁!

성장한 금기추풍이 거목으로 자라나 천하를 뒤덮는 세계수(世界樹)가 되었다. 봄의 따스함과 가을의 서늘함을 한 몸에 품은 강철의 나무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주(主)가 역전된다. 반복하며 주도권을 쥐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며 파괴력 넘치는 힘과 부드러운 생명력을 공존시켰다.

‘이것도!’

주작과 현무가 서로를 소멸시킨다면, 백호와 청룡은 화해 없는 싸움으로 혼란을 일으킨다.

그 극과 극의 힘이 합일되어 새로운 진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냈다.

‘이 두 쌍의 힘을 합치면.’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의지가 발현되고, 의지가 이는 순간 주작현무와 청룡백호가 하나로 섞여 들었다.

쿠구구구궁!!

순간 연호정의 몸에서 무지막지한 충격파가 일었다.

위이이이잉!

익숙한 듯 회전하여 뒤섞여 들던 사신의 기운들이 일순 황금빛 서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된다?!’

그때였다.

후우욱!

찬란하게 빛나던 황금빛 광채가 스러지고, 시커먼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티이이이이잉!!

팽팽했던 끈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합일을 시도했던 두 쌍의 기운들이 풀려나갔다.

‘역시 무리인가.’

위험한 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합쳐지는가 싶더니, 일순 통제가 불가능해지며 사신기가 광명신단으로 역류를 시작했다.

풀어 헤치는 시간이 늦었다면 내상으로 목숨이 위험해질 뻔했다. 단순히 합일을 시도하는 것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역시.’

황룡신왕공(黃龍神王功)은 사신기의 완성이다.

흑암제 시절 그 틈새를 엿봤다고 생각했다. 광명신단을 연성하며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아쉬움을 접었다.

‘괜찮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지금은 이 정도도 충분하다 못해 과분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의 싸움은 소수 정예들끼리의 전술 선점 싸움이다.

그간 수많은 고수를 잡았지만, 제대로 된 싸움은 시작도 안 했다. 놈들은 점점 교활해졌고, 부딪치는 적의 수준도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하나 걱정했거늘.

‘이제야, 제대로 붙어 볼 수가 있겠어.’

그때였다.

“쿨럭!”

누군가 피를 토하는 소리에 연호정은 집중을 깼다.

광명신단이 울음을 토함과 동시에 사신기를 합일시키려 하였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의식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흘렀다.

지금은 무공의 완성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연호정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형님!”

피범벅이 된 강량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었구나.”

“예.”

“무종을 뚫었군. 축하한다.”

“축하를 받긴 해야 하는데, 저보다 더 축하받을 사람이 나타나서요.”

연호정의 무극 개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서로가 각고의 노력으로 얻은 소중한 힘이다. 누가 더 축하받을 일이라고 할 게 아니지.”

그가 강량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이 많았다.”

강량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천하 모든 무림인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지고의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들뜨거나 크게 상기된 바가 없다. 오히려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말해 주는 연호정이 고마웠다.

“뒤풀이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이 사태부터 마무리를 짓는 게 좋겠지.”

“예.”

연호정이 꿈틀거리는 황면인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황면인을 보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는 연호정을 보았다.

푸스스스스.

연호정의 발밑으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땅을 딛는 한 발, 한 발에 무시무시한 위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흘러넘치는 기운,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다. 이제 갓 새로운 경지에 진입했기에 본인의 힘을 갈무리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훅! 훅!

마구 넘치던 기운이 어느 순간 귀신처럼 사라지다가 다시 뿜어져 나오기를 반복했다.

연호정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힘을 갈무리하려 할 뿐이었다.

“칠사제부의 부장이라고?”

멍하니 연호정을 보던 사람들은 순간 깜짝 놀랐다. 어느새 그가 황면인의 앞에 쭈그려 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의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다.

‘언제?!’

한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연호정이 서 있던 곳에서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모용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일이 있나.’

존재감 때문이었다.

연호정이라는 인간이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모두의 넋을 빼 버렸다. 그래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는 것이고, 자꾸만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무극을 열었구나!’

이 정도 존재감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느껴 본 적 없었다.

투왕 양천.

분노 가득한 얼굴로 벼락처럼 등장한 절대자에게서나 느껴 봤던 압도적인 위압감이, 이제는 연호정에게서도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모용군의 턱에서 살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 어디선가에서 치고 올라오는 진한 감정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귀와 목덜미가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나를 봐라.’

연호정의 깊은 눈은 오로지 황면인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을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한없이 깊고 깊은 그 눈이, 마치 탈속한 도인이나 승려를 떠올리게 했다.

돌아보지 않는다,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적을 제외하면.

‘나를 봐! 너의 적인 나를 보란 말이다!’

모용군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실제로 입술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성대에서 소리가 흘러나오질 않았다.

‘이노옴!!’

모용군의 기이한 감정이 섞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내가 날려 버린 놈이 육사제장이고 네가 칠사제부의 부장이라 했더냐?”

“쿨럭! 쿨럭!”

“몇 사제부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일 번부터 칠 번까지의 사제부는 존재한다는 것이로군.”

꿈틀.

황면인은 쓰러진 자세 그대로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나려 했다.

당연했다. 다시 마주하게 된 연호정은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이 위대한 경지를 이토록 젊은 나이에?!’

그것도 충격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연호정이 육사제장님을 너무도 쉽게 소멸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육사제장, 정확히는 전대 육사제장이자 새로운 시대를 위해 혼백을 내놓은 호교귀장(護敎鬼將)께서는 전 세대 교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셨더랬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 깨어난 데다 심신의 조화가 맞지 않는 채혼술 때문에 본래 힘이 격감했다곤 해도, 이리 쉽게 죽을 분이 아니었다.

‘믿을 수 없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봐.”

“……?!”

“선천지기를 없애고 마기로 그 빈 그릇을 채웠으니 너도 곧 죽을 것이다.”

“……!!”

“어차피 죽을 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라. 그동안 너희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자신의 상태를 그대로 꿰뚫어 보고 있다.

황면인은 직감했다. 이번 당가 사태, 나아가 사천의 사태가 교단에서 기대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무극을 연 고수 하나가 더 탄생해서가 아니었다.

‘이자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벽산호장.

‘이 자를 제압하지 못하면 사천에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이대로라면 당호도 살아남지 못……!’

순간 황면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다급히 좌측으로 고개를 틀었다.

‘당호!’

전투 중이라 당호의 마기가 사라진 것도 느끼지 못했다.

‘죽었나?!’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황면인의 눈이 빛났다.

‘혼이 아직 육신에 있군. 심맥은 파열되었지만 마기는 남았다. 방금 죽은 게 분명해.’

그렇다면?

“안 돼.”

깜짝 놀란 황면인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 뭘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난장 치지 마라.”

“…….”

“이혼(移魂)의 대법은 종류를 불문하고 사도(邪道)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안 하는 게 좋아.”

감이 좋은 놈이군.

황면인이 씨익 웃었다.

연호정이 뿜어내는 압박감에서도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낸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이미 신께 모든 것을 바친 인생이다. 내 혼은 그분께서 구제해 주실 것이다.”

“광신도의 문제점을 열거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로군. 다시 말한다. 하지 마라.”

연호정이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 마.”

펄럭!

불어오는 바람이 피풍의와 이어진 두건을 열어젖혔다.

세상에 드러난 황면인의 얼굴은 반이 넘게 부패한 시체의 얼굴 그대로였다.

“……늦었어.”

순간 연호정의 몸에서 백색 바람이 솟구쳤다.

콰아앙!

황면인의 몸뚱이가 산산조각이 남과 동시에, 연호정이 당관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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