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끝이 없음이라 (5)
당관을 보내고 백면인과 싸우며 온갖 사선을 넘나들었지만, 실제로 연호정이 무극의 경지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천하를 뒤흔들 절대고수가 탄생하기 일각 전.
드넓은 당가 한편에서 패륜과 배덕으로 얼룩진 부자지간도 점차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는.”
둘째 아들을 내려다보는 당형의 눈에 더 이상 안타까움이나 애정의 빛은 엿보이지 않았다.
“포기하거라.”
아니면 죽는다.
이제는 당호가 무슨 수를 써도 이 사태를 역전시킬 방법이 없다. 당형이 유폐지에서 나온 순간, 당호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쓰러져 꿈틀거리는 아들에게 포기하라 말하는 것은, 아버지로서 버릴 수 없는 일말의 연민 때문일까.
“…….”
당호가 이를 악물었다.
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꽉 쥔 주먹, 식은땀과 피로 범벅이 된 몸은 누가 봐도 패배자의 그것이었다.
가만히 아들을 내려다보던 당형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한다. 지금 네 죄를 인정하거라. 그리하면, 너의 자식이 참형에 처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옆에 서 있던 당여선이 움찔했다.
당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죄가 무엇입니까.”
당형의 눈이 차가워졌다.
“아직도 의미 없는 고집이나 부릴 참이냐?”
“저는……!”
“그것이 네가 선택한 최후라면, 좋다. 전대 가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도 더 이상의 관용은 베풀지 않겠다.”
“……!”
당형이 당여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당여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도주하고 싶었지만, 조부님의 눈빛을 보자마자 오금이 저렸다.
당형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신과 손주의 격차는 말 그대로 천양지차다. 하지만 당가의 핏줄이라면, 힘이 풀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고개를 빳빳하게 드는 독기가 있어야 했다.
‘이 또한, 내 잘못이다.’
둘째에게는 독기가 있었다. 그 독기가 개인의 욕심과 맞물려 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 뿐.
하나, 둘째의 씨에서 나온 손주에게는 그만한 독기도, 자존심도 없는 것 같았다.
당형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청아한 소리와 함께 당여선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무형의 용독술, 어떤 식으로 한 사람을 잠재웠는지 알 수 없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신묘한 독술이었다.
“이제 끝내도록 하자.”
그때였다.
“아니 됩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
당형은 당황하지 않았다. ‘녀석’이 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동시에 당형은 당황했다. ‘녀석’ 앞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관아.’
당형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지켜 주고, 감싸 주고, 위해 주고 싶었던 첫째.
가주위를 물려준 이후 지독하게 싸워 대며 결국은 오랜 세월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았던 장남.
그 장남이 마침내 이곳에 온 것이다.
저벅저벅.
당관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또한 마음은 당형과 다르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과 살벌하게 일어나는 기파는 그대로였으되, 그의 마음은 당황과 알 수 없는 착잡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스륵.
그리고 마침내, 당관이 도착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관은 당형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아버지.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시커먼 장포 자락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여전하시군.’
정말이지 여전한 위용이었다.
자신의 힘을 절대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기척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관은 흘러가는 물길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아버지에게서, 실로 감당키 어려운 힘을 느꼈다.
오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절대의 힘.
이제는 당관에게도 보인다. 끊임없이 발전한 그는,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의 힘을 보다 확연히,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에 내재된, 정체를 알 수 없는 병마(病魔)까지도.
한참 동안 아버지를 응시하던 당관이 이내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그간, 옥체 만강하셨습니까.”
순간 당형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아들의 목소리인가.
시간이란 참으로 묘하다. 서로 죽일 듯이 싸워 댔던 부자간의 증오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긁어 내고 벗겨 낸다.
그리고 그 시간이 무려 이십여 년이다.
별것 아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세월이었다. 칠십이 훌쩍 넘은 당형에게도 그 시간은 고통과 후회, 원망과 애증으로 점철된 지옥과도 같았다.
‘낮아졌구나.’
아들의 목소리는 그가 기억하던 때와는 또 달랐다.
더 낮아졌고 더 차분해졌으며 더 담담해졌다.
사람 자체가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아들이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당형은,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해 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건강하다.”
말을 함과 동시에 당형은 또 한 번 당황했다.
이십여 년 만에 만난 아들이었다. 그 아들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멋이 없지 않은가.
당형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첫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녀석이 어색해하지 않을까.
“…….”
다시, 침묵이 일었다.
가만히 당형을 보던 당관이 입을 열려는 순간.
“많이 성장했구나.”
당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뻔했다.
“예. 철이 조금은 들었지요.”
꽤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참으로 당관다우면서도, 어색함 없는 한마디였다.
당형이 잠시 숨을 골랐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성천의 강자에게도 심호흡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제왕독경의 성취가 몰라볼 정도로 늘었다. 벌써 대성에 가깝게 연마했구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보고자 칭찬을 건넨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칭찬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꺼내기 적당한 말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당형은 아직도 당황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죽기 살기로 싸웠던 아들과의 이십 년 만의 재회인데,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한 무공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했다 하여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그래, 그렇지.”
잘 알고 있구나.
당형은 내심 뿌듯했다.
당관은 대성(大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줄줄 외우는 경전을 완벽하게 해석했다고 한들 그 경전에 통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성이란 곧 통달한 경전을 통해 작게는 나 자신, 크게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무공 역시 마찬가지. 제왕독경을 대성했다고 해서 정녕 위대해졌다고 말할 순 없다.
그 무공으로 어디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을 갖고 어떤 세상과 싸우려 하는가.
극치(極致)라 함은, 무극이라 함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들은 자신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나 커 버린 것이다. 그렇게나 성장한 것이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당관이 당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식은땀 가득한 얼굴, 일그러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올려보는 당호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추해 보였다.
“무공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습니다.”
하늘을 향하던 당형의 시선도 당호에게로 향했다.
으드득.
당호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위대한 가주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위대한 가주가 된 형.
당가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는 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당형의 눈빛은 무심했고, 당관의 눈빛은 깊었다.
‘나를 그렇게 보지 마!’
당호를 주시하며, 당형이 당관에게 물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제야 조금 아버지답다고 생각하며, 당관이 답했다.
“무엇입니까.”
“호아의 말처럼, 정녕 네가 삿된 무리를 끌어들여 본가와 사천의 안위를 위험에 빠트린 것이냐?”
당관의 눈이 차가워졌다.
“자기 집안을 얼굴 한번 못 본 외인에게 맡기는 정신 나간 작자들이 종종 있긴 하더군요.”
“…….”
“그런 놈들을 보면, 정말이지 머리통을 부숴 그 안을 엿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대답으로 충분한 말이었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그런 놈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당형이 되물었다.
“확실한 것이냐?”
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상의 대답이 필요치 않다. 말 몇 마디로 진실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무사가 아니라 점쟁이다.
당관이 당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당관의 장심(掌心)으로 시커먼 연기가 모여드는가 싶더니, 곧 일렁이는 흑색 구체를 만들었다.
훅!
생성된 것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밀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일격으로 집 한 채도 날려 버릴 만한 무시무시한 발경술이 집약되어 있었다.
오싹!
당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했을 것이다. 더 이상 형제로 대하지 않겠다고.”
당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용서의 기회를 주었고, 반성할 기회도 주었다. 본가 역사에 길이 남을 대죄를 지었지만, 그간의 공이 있는 형제였기에 몇 번이나 망설였다.”
“……!!”
“너는 그런 나를 죽이기 위해 중원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려는 괴집단의 마인들을 불러들여 본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사아아악!
당관의 몸에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진심 어린 살기였다. 당호는 물론 당형의 얼굴 역시 눈에 띄게 굳었다.
“더는 변명 안 해도 된다. 너는 본가 역사 최악의 반역자로 이름을 올릴 것인즉. 저승에 갈지 지옥에 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승에 네가 발 디딜 곳은 없다.”
“혀, 형님!”
“잘 가라.”
제왕독경 상의 비전, 묵룡신장(墨龍神掌)이 뿜어졌다.
퍼어어어어엉!
폭음과 함께 쏘아진 흑색 발경 구체가 산산이 폭발하며 스러졌다.
스스스스스.
구름처럼 흩어지는 흑연이 사위를 휘감아 돌았다.
당관이 당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주르륵.
그 자리에 엎드려 있던 당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내상이 아니었다. 경악과 공포를 참지 못하고 깨문 입술이 찢어져 나온 핏물이었다.
다시 말해, 당호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살려 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형이었다.
당관의 시선을 느끼며, 당형은 주먹을 꾹 쥐었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당관의 묵룡신장을 막은 것이 아니었다. 첫째가 둘째를 죽이려 하는 순간, 손이 멋대로 움직여 버렸다.
“나는…….”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당형.
“나는 그저…….”
“아버지.”
당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저는 아버지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안다.”
“하지만 제 일행 중 하나는 그리 생각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와의 상의도 없이 냉큼 아버지의 거처로 가서, 어떻게든 설득한 모양이로군요.”
“…….”
“아버지의 번민을 이해합니다.”
왜일까.
그 말에 당형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훅!
부드럽기만 했던 당관의 기세가 순식간에 삼엄해졌다.
“그러나 이 이상은 안 됩니다. 저는 당씨 문중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이 주인 자리를 넘겨주신 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입니다.”
“…….”
“당가의 주인은 그 누구의 명령도, 제지도 받지 아니합니다.”
당형이 눈을 감았다.
스르르.
천천히 팔을 내리는 그의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났다.
당관이 다시 당호를 내려다보았다.
당호는 덜덜 떨며, 그래도 기가 죽지 않은 눈으로 당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보았느냐?”
“……?!”
“이것이 바로 본능이다. 혈육을 보는 혈육의 본능.”
“……!!”
“그것을 버린 너는 실로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당관이 냉정하게 손을 휘둘렀다.
콰득!
당호의 척추가 그대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