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618화 (617/963)

618화. 무너트리다 (6)

변모한 강량의 기파는 그 영역에 있는 모든 고수에게 전파되었다.

‘저놈.’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번쩍!

내상을 수습한 그는 빛살처럼 빠른 검격으로 적면인 셋의 몸통을 그 자리에서 토막 내 버렸다.

‘무종을 뚫었군.’

무종지벽이란 곧 무공을 연성한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맞이하는 최종 관문이다. 즉, 무종지벽을 돌파하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아무나 오를 수 없다. 재능 있는 자가 노력해도 중년의 연배에나 겨우 도달하는 경지이며, 그마저도 무림인의 숫자를 생각하면 극소수라 할 만했다.

그 극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한계 너머의 경지를, 저 젊은 청년이 지금 오른 것이다.

파지지직! 파직!

휘황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뇌기에 모용군을 지나치려던 적면인 스무 명이 그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미치겠군.’

적들을 노려보는 모용군. 그러나 그는 적을 어떻게 처리할지보다 강량의 성장이 더 신경 쓰였다.

‘구시대보다 새 시대의 인재들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연호정만 해도 충분히 괴물이다. 연호정의 부관이었던 묵비는? 그녀 역시 희대의 천재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한데 이제는 강량까지도 무종지벽을 돌파했다. 심지어 강량은 연호정보다 한 살 어리다. 물론 연호정은 그보다 어린 나이에 무종의 벽을 돌파했지만, 모용군 입장에선 연호정이나 강량이나 괴물인 건 똑같았다.

하물며 연호정이 부리는 멸사군은 또 어떤가?

동생인 모용우가 실질적으로 의정군을 이끌고 있다지만, 아직도 멸사군은 심적으로 연호정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멸사군을 이루는 군병들 대부분이 구파일방, 육대세가에서도 빛을 보지 못한 청년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멸사군에 들어가, 무림맹 최고의 유군 부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모용군은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다. 연호정에게 천운이 따라서 그 주변에만 인재들이 득실거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결국.’

우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가는 무정천뢰식의 검기에 적면인들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결국은 또 연호정이다.’

불세출의 전투 능력, 괴물 같은 재능.

수십 년 동안 강호 무림에서 굴러먹던 노회한 정치가조차도 눈 아래로 보는 정치력에, 상상을 초월하는 육감까지.

한 개인에게 주어질 만한 능력이 아니다. 한데 거기에, 무인의 재능을 살리는 ‘스승’으로서의 역량까지 겸하고 있었단 말인가?

콰아앙!

힘이 들어간 일장(一掌), 눈앞의 적면인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뇌기는 그 특성상 강하고 빠르다. 하지만 워낙 난폭한지라 섬세하게 다루기가 어렵다. 조금만 긴장을 놓아도 내공 소모가 극심해진다.

모용군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졌다. 밀려오는 착잡함과 분노, 치미는 짜증과 자괴감에 구사하는 무공의 위력이 저절로 올라갔다.

‘막막하군.’

막막하다. 언제고 연호정을 밟고 무림맹의 주인이 되어 천하를 통치할 생각을 하는 그는, 연호정이란 존재가 새삼 거대해 보이는 것을 느꼈다.

파아아앙!

모용군의 옆을 지나쳐 나아간 황석태가 강철처럼 단단한 일격을 가했다.

쩌어어어엉!

매서운 창격에 황면인이 옆으로 물러났다.

강량이 외쳤다.

“이놈은 제가 쓰러트릴 겁니다!”

“쓰러트리는 게 전부가 아니야!”

적룡신창의 창대 중간을 잡아 돌린 황석태가 뒤이어 쏟아져 들어오는 공격을 쳐 냈다.

휘리릭! 퍼퍼펑!

황면인의 뒤에 숨어 권장을 내지르던 적면인들의 공격이 모조리 무위로 돌아갔다.

파앙!

동시에 황면인이 움직였다.

무너진 흑혈대의 진형과 황석태, 강량의 손이 닿지 않는 측면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황석태가 외쳤다.

“한 놈도 가주전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그건 당연합니다!”

“임무이기 때문이 아니야! 이놈들, 뭔가 불길하다! 가주전에 들어가면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일을 벌일 게 분명해!”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명확한 논리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석태의 말을 듣는 순간, 강량은 그의 말을 신뢰하는 자신을 느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 역시 처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 황석태의 외침은 무종지벽을 돌파한 환희와 막강해진 전투력으로 잠시 자만에 빠졌던 그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황석태가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쿵! 콰앙!

진각과 함께 내지른 권풍이 황면인의 오른쪽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를 그대로 분질렀다.

맞추지 못한 것이다. 황면인 역시 초절정고수. 맞상대라면 모를까, 작정하고 빠져나가려는 그를 막기는 누구라도 힘들다.

‘빌어먹을!’

강량은 귀왕진기를 모조리 하체에 밀어 넣었다.

번쩍!

무종지벽에 오르자마자 처음으로 구사하는 극한의 귀영신보다.

경신술의 수준만 보면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귀영신보. 그러한 보법이 초절정고수의 진기를 빨아먹고 극한까지 발휘되니, 그 속도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한참이나 초월한다.

콰콰콰쾅!

강량의 두 발이 대지를 마구 갈아 냈다.

급한 마음에 힘을 너무 쏟았다. 막 올라선 경지라 진기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강량이 어느새 황면인의 전방에 도달했다는 것.

“으아압!”

기합과 함께 귀영검이 허공을 갈랐다. 과격한 내공 운영으로 귀살검까지 펼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쩌어어엉!

황면인의 반응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했다.

기울이듯 검격을 받아 내더니, 적당한 힘과 부드러움으로 아무 피해 없이 강량의 공격을 무효화시킨다.

퍼엉!

강량의 공격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귀영검을 튕겨 낸 황면인이 강량의 좌측으로 이동하며 무너진 흑혈대의 진형 앞에 나타났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안 돼!”

황면인이 장도(長刀)를 휘둘렀다. 피풍의 안에 무기가 많은 듯, 왼손에는 어느새 소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푸화아악!

회복하지 못한 흑혈대원 둘의 목이 날아갔다.

하나에 하나를 더한다고 꼭 둘이 되라는 법은 없다. 와중에 그 하나가 온전하지도 않은 이상, 황석태와 강량의 합공은 황면인에겐 오히려 허점으로 보였다.

파아아앙!

황석태는 흑혈대가 죽는데도 황면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주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냉정해 보이지만, 옳은 판단이었다. 적을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다소 비정할지라도 황석태의 판단이 옳은 것이다.

번쩍!

황면인의 눈이 빛났다.

파아아앙!

등 뒤에서 달려온 강량의 검격을 교묘하게 피한 황면인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적면인, 아군에게 돌진했다.

퍼어어억!

황석태와 강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병찬과 흑혈대원들도, 멀찍이서 적면인들을 상대하던 모용군조차도 놀라서 입을 벌렸다.

울컥!

황면인의 도검이 적면인의 심장과 복부를 뚫었다.

털썩!

쓰러진 적면인. 황면인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기다란 장창을 빼내 제 손에 쥐었다.

그때부터였다.

바로 그때부터, 남은 황면인의 기질이 바뀌었다.

후욱!

무겁게 깔리는 기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어두웠다.

“……?!”

가장 가까이 선 강량은 황면인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크게 느낄 수 있었다.

‘뭐야.’

화르르륵!

창을 쥔 것뿐인데, 몸 전체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의 깊이가 달라졌다.

‘갑자기?’

황면인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욱!”

숨을 들이쉬는 그 순간순간마다 진기의 밀도가 깊어지는 듯했다.

가만히 놔둬선 안 된다. 본능이었다. 강량은 득달처럼 달려들어 귀살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강량의 몸이 세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달려가던 속도, 진기의 섬세한 운용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큭!’

창봉과 충돌한 검에서부터 전달된 충격이 손목과 팔꿈치를 지나 견갑골까지 전해져 왔다.

순간적으로 진기를 운용, 충격을 상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그만큼 엄청난 반탄력이었다.

지이이이잉.

황면인이 든 창이 미세하게 울렸다.

내공이 실린 병장기의 울림치고는 지나치게 맑고 청아했다. 황석태의 눈이 커졌다.

“창명(槍鳴)!”

창명은 곧 검명과 같다.

주인의 손에 들린 창이 스스로 운다. 내공을 주입해서 떨리는 게 아니라, 주인의 영혼과 감응한 병장기가 알아서 울음을 토해 내는 것이다.

무생물인 철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무술, 무공을 넘어 무도(武道)에 도달한 자만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였다.

“과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

황색 가면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묘했다.

속삭이는 듯한 말투. 실제로 목소리도 작았다. 한데도 그의 말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명확히 들을 수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되었어. 연호정 그놈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벅찬 적이었다. 벽산호장, 그 명성이 헛것이 아니었어.”

묘한 말이었다.

그의 말은 마치, 조금 전까지 연호정과 맞붙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어지간하면 그 육신으로 끝낼 작정이었거늘, 아무래도 당호와의 약속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 같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서 기괴한 공포감이 묻어 나온다. 사람인 듯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존재의 속삭임이었다.

황면인이 가면에 손을 올렸다.

순간 모용군이 외쳤다.

“강량! 공격해!”

남들보다 더 빠르게 불안감을 감지한 모용군이었다.

긴장한 채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던 강량이 모용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파아아악! 쐐애애애액!

움직임, 검격, 살기 그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이 없다.

하지만 강량의 검이 황면인에게 닿기도 전에 가면이 깨졌다.

퍼석!

찰나에 찰나를 쪼갠 그 순간.

강량은 머리 한구석에서 번쩍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위험!’

콰아앙!

폭음과 함께 강량의 몸이 날아갔다.

쾅! 푸스슥!

멀찍이 떨어진 숲까지 날아간 강량이 나무 두 그루를 박살 내고는 바닥을 굴렀다.

쓰러진 강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병찬이 외쳤다.

“흑혈대 전원……!”

“물러나!”

파아앙!

황석태가 당병찬의 옆으로 날아오며 외쳤다.

“너희는 물러나라! 너희로는 감당할 수 없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는 물러날 수……!”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일단은 물러나! 가주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라!”

황석태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하게 들렸다.

이를 악물던 당병찬이 이내 흑혈대를 이끌고 움직였다. 황석태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쩌어어어어엉!

강렬한 공명음과 함께 모용군이 황석태의 뒤에 나타났다. 적면인들의 공격을 모조리 튕겨 내고 이동한 것이다.

적의 전력 대다수를 홀로 막아 내는 것. 그것이 모용군의 역할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석태가 긴장한 얼굴로 황면인, 아니 황면인이었던 사내를 향해 적룡신창을 겨누었다.

“너, 누구냐?”

“알아서 좋을 것 없다네. 말해 줘도 모를 테고.”

가면을 벗었는데도 코까지 가린 피풍의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석태는, 놈의 손에서 가면이 부서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드러난 맨얼굴도.

‘괴물?’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얼굴이었다. 정확히 어떤 얼굴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파지지직!

뇌정공을 한껏 개방한 모용군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도통 알 수가 없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어.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귀신? 그건 좀 섭섭하군. 나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야. 적어도 이 육신에서는 그렇지.”

부우우웅!

한 손으로 창을 돌린 황면인이 자세를 낮추었다.

“육사제장(六司祭長)께서 모습을 드러내신 이상 연호정은 죽는다. 너희는 칠사제부(七司祭部)의 부장인 내 손에 죽을 것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