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무너트리다 (5)
울컥!
한 움큼 핏물을 쏟아 내고 나니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치리리링!
의복 안에 칭칭 감긴 교룡쇄가 비명을 질렀다.
연호정이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복부에 가해진 충격에 몸을 싣고, 찰나지간 발동한 현무기로 퍼져 나가는 충격량을 해소했다.
타다다닥!
십여 걸음 만에 모든 충격을 상쇄한 연호정이 백면인을 바라보았다.
화르르르륵!
환상인 듯 실제인 듯.
불지옥이 된 세상 앞에 서서,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을 노려보는 거대한 짐승이 있었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헷갈린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리 혼란스럽게 보였다.
‘마기!’
마치 연호정의 폭발적인 살기가 백면인의 인지 능력에 혼란을 줬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였다. 너무나도 거대한 마기가 연호정의 오감을 교란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우우웅!
연가신단에 회전을 걸고 사신기(四神氣) 전부를 끌어 올렸다.
심장의 주작기, 폐장의 백호기, 간장의 청룡기, 신장의 현무기가 전신에 스며들며 연호정의 감각을 극도로 선명하게 일깨웠다.
후욱!
마기가 주는 환상이 씻겨 나간다.
사신무(四神武)는 전장의 무공이라는 이명이 있지만, 기운 하나하나가 비할 데 없는 신공(神功)이었다.
선명하고 깨끗한 기운이 일며 불순한 기운의 침투를 막았다.
신체가 극도로 활성화된 느낌. 지속적인 내공 소모 때문에 사신기 전부를 일깨운 적은 많지 않지만, 일단 모든 기운을 끌어 올리면 신체와 내공이 이상적인 상태로 돌입한다.
달리 말하면 무극지경을 코앞에 둔 고수가 내공 소모를 감수하고 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린 상태라야, 이 정도 마력 앞에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쿠르르릉!
마기의 폭풍과 신기(神氣)의 불꽃이 부딪치며 공기가 뜨거워졌다.
“대단해.”
오른 주먹을 까딱거리는 백면인의 모습에서는 한결 여유가 넘쳤다.
여유는 넘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가면이 쪼개지기 전에도, 그리고 방금도. 너는 절대 방심하지 않는구나.”
“…….”
“그게 네 강함의 이유로군.”
실전의 위험을 아는 사람일수록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그건 누구라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백면인이 보는 연호정의 무방심은 그 깊이가 달랐다.
상대의 어떠한 변화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마음.
폭발적으로 증가한 마기, 그 마기에 힘입어 두 배 이상 향상된 신체 능력으로 가한 일격에도 치명상을 입지 않는다.
방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황하지 않기 때문이다. 놀라긴 해도, 그 찰나의 순간 적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끊임없이 의식한다.
극단적인 정신력이 만들어 낸 범상치 않은 반응 속도. 그 반사 신경은 불현듯 떨어지는 벼락에도 반응할 정도다.
“셀 수 없는 경험, 극단적인 정신력, 전투 방식에 부합하는 무공까지. 그 모든 것이 네 몸에 있구나.”
백면인이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가려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오로지 전투에 특화된 인간. 움직이는 전쟁 병기가 따로 없도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바뀌었어.’
가면이 쪼개지고 마기가 폭증하면서, 사람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점점 확신하게 된다.
‘이전까지 싸웠던 그놈이 아니야.’
움찔!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연호정은 또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지금 이 순간, 분명 빈틈을 보았다. 하지만 빈틈을 노리고 공격을 감행했다간 곧장 반격이 날아왔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극에 이른 반사 신경이 종국에는 육감까지 활짝 열어 두었군. 과연 대단해. 생존을 위한 게 아닌, 상대를 철저하게 죽이기 위해 단련된 육감이라 이건가.”
새삼스럽군.
연호정이 흑백쌍룡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너, 누구냐?”
백면인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스르르륵.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던 마기가 서서히 백면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이번 역시, 연호정은 선공을 날리지 못했다. 섣불리 공격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훅.
세상이 밝아졌다. 백면인이 뿜어내던 마기가 다시 그의 육신으로 스며든 것이다.
‘……!’
연호정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위험하군.’
방대한 마기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모조리 몸에 담았다.
전에는 마기가 봉인되었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대량의 마기를 온전하게 담아 두었다는 느낌이었다.
그 차이는 컸다. 활용할 수 있는 힘의 총량이 다르다는 뜻이니까.
“무의미한 질문이로고.”
백면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희극적인 몸짓. 처음 당호나 당관을 대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더 기묘한 불길함이 전해졌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네를 상대하는 사람에게 정체를 묻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내 이름을 안다고 달라질 것이 있을까? 이미 자네는 내가 광혈에서 나왔음을 알고 있는데.”
“…….”
“하나 말해 주지. 지금 자네를 보고 있는 이 얼굴이 진짜라고 생각하나? 틀렸네. 이 얼굴은 또 하나의 가면일 뿐이야. 자네가 자네의 가족에게 보여 주는 모습과 적에게 보여 주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나 또한 무수히 많은 가면을 쓰고 있을 따름이지.”
“…….”
“즉, 자네는 내 이름을 알 필요가 없네.”
연호정이 퉁명스레 말했다.
“말이 많군.”
“깨달은 자는 말이 없고, 배운 자는 말수가 적으며, 범부는 말이 많다고 하네. 나아가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지.”
“…….”
“내 생각은 달라. 말은 곧 힘이야. 인간 사회는 전달과 공유에서 시작되었지. 전달이란 언어였고, 공유란 글자였네. 언어와 글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지닌 초능(超能)이지.”
“그래서 어쩌자고?”
“다만 지금 우리는 언어로도, 글자로도 해결을 볼 수 없는 피비린내 그득한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군.”
“…….”
“자네는 말로 포기시킬 수도, 글자로 감화시킬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렇다면 혈향 가득한 이 울타리 안의 법도대로 끝을 봐야겠지.”
묘한 자다.
일장 연설에 가까운 말을 했지만, 이 상황에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다. 당장에 의미도 없고, 곱씹어 봐도 배울 점이 없다. 적어도 연호정에겐 그러했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지껄이는 느낌이 강했다. 마치 오랜 시간 외롭게 지낸 반쪽짜리 석학이 사람을 만나 주절거리고 싶어 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하나는 확실해.’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나한테 불리한 싸움이다.’
이전의 무력이었다면 충분히 이기고도 남았다. 가면이 깨지기 전의 백면인은 ‘본능의 싸움’에서 약세를 보이는 자였으니까.
이자는 달랐다.
자신의 무력으로는, 자신의 경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단순한 마기의 농도 때문이 아니라,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자체가 궤를 달리하는 고수라는 걸 증명했다.
‘까다롭군.’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건물 하나를 뚫고 들어갔다.
“오호?”
그 자리에서 주먹을 내지른 백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즉사까진 아니어도 치명상은 입힐 줄 알았더니, 이걸 또 막았나?”
퍼어어어어엉!
뚫린 건물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훅!
동시에 연호정이 백면인의 코앞에 도달했다.
사신기 전부를 꺼내 든 그였다. 주작화기에만 힘을 실을 때보다는 속도가 미세하게 줄었다.
그래도 빠르다. 누가 뭐라 해도 연호정의 혈익휘천은 속도의 정점에 도달한 경신술이었다.
연호정의 흑백쌍룡이 백면인을 향해 난도질 치듯 휘둘러졌다.
콰콰쾅!
속도는 느려졌을지라도 도끼에서 뿜어지는 파괴력은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수준이었다. 총 열두 번의 참격을 휘두르는데 일격, 일격에 파멸적인 위력이 실렸다.
하지만.
쩌어어어어엉!
그리 강렬한 참격을 오른손 수도(手刀) 하나로 모조리 막아 낸다.
“반사 신경이 전부가 아니군. 힘과 속도, 양측 모두 극한의 경지에 올랐어.”
파라락!
그 자리에서 회전한 연호정이 백면인의 얼굴과 몸통을 향해 쌍룡을 휘둘렀다.
쩌정!
막혔다. 너무나도 쉽게.
여전히 왼손으로는 얼굴을 가린 채, 우수도(右手刀) 하나만 휘둘러 막아 내고 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막혔다. 어떻게 막았는지는 연호정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다.
훅! 쾅!
연호정이 막힌 도끼날을 그대로 끌어내리며 회전해 백면인의 어깨에 뒤꿈치를 박아 넣었다.
백면인의 몸이 움찔했다.
반면 연호정은 발뒤꿈치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내공 없이 강철에다가 발길질을 한 기분이었다.
백면인의 손이 부드럽게 전방을 향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땅을 굴렀다.
미친 듯이 구르다가도 어느새 자세를 잡는다. 헛바람이 절로 나올 만큼 막강한 일격이었지만, 현무기의 방어력과 청룡공의 답운보로 대부분의 충격을 상쇄시켰다.
주르륵.
하지만 미세하게 남은 충격만으로도 내상을 입었다. 창백한 얼굴,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달라도 너무 달라졌군.”
“사람이란 언제나…….”
“너희는 하나같이 밥맛이야. 시발, 거지 같아서 진짜.”
회귀 후 오랜 시간 백도 무림에서 활약하며 바뀌어 가던 성격과 말투가, 마치 흑암제로 불리기도 전 흑도의 잡배들과 싸우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저잣거리 파락호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욕설이 튀어나온다. 백면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속한 말투로고. 이처럼 품위 없는 자가 어찌 고도로 연마된…….”
“주둥이 닥쳐, 괴물 낯짝!”
콰앙!
다른 건 몰라도 이 패기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단 몇 합에 불과했지만 실력의 차이는 분명했다. 지금의 연호정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백면인을 이길 수 없었다. 살기, 경험, 살법 등등 지닌 모든 것을 총동원해도 몸에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주저 없이 달려든다.
백면인의 눈이 깊어졌다.
화아아아아악!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연호정.
접근하는 속도보다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가 더 무섭다.
연호정의 살기는 또 하나의 재능이라 할 만했다. 온갖 사선을 넘나들며 한계를 돌파한 살기는, 백면인의 마기 못지않게 상대의 심신을 무너트리는 무형의 칼날과도 같았다.
움찔!
그 살기 앞에, 백면인은 저도 모르게 발을 떼었다가 멈추었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살기에 한순간 짓눌린 정신이 상대를 죽이려 했지만, 들이닥치는 하수에게 위압감을 느꼈다는 사실이 백면인의 움직임을 억제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군.”
콰앙!
허점을 노리는 연호정의 변칙적인 공격을, 백면인은 손짓 두 번 만에 무력화시키고 튕겨 내 버렸다.
“쿨럭!”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했다.
백면인이 말했다.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써도 나를 넘어설 수 없음을.”
“쿨럭! 우웨엑!”
“자네 정도 되는 고수라면 그 차이를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을 터. 한데 어찌 그리 무모하게 덤비는가?”
“캬아악! 퉤!”
보란 듯이 가래침까지 뱉은 연호정이 입가를 닦으며 일어났다.
화아아아아악!
내상은 더 깊어졌는데, 그럴수록 살기의 농도 또한 한층 짙어졌다. 이제는 그야말로 귀신이 따로 없었다.
백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복할 수 없는 산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추한 짓은 없다네.”
“지랄 적당히 해라. 넌 산이 아니야. 마공을 익힌 머저리일 뿐이지.”
“추한 모습 그만 보이고 얌전히 죽게나. 자네는 할 만큼 했어.”
“누가 할 만큼 했대? 네 할머니가?”
“…….”
“진짜 할 만큼 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리고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연호정이 살벌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너와는 달리 포기하길 싫어하거든. 이해해라.”
“결국 추한 죽음을 원하는가.”
“추하게라도 이길 수 있으면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좋지!”
콰아앙!
연호정이 또다시 질주했다.
질주하는 그의 뒤.
길쭉한 그림자 위로 비단처럼 깔린 사색의 진기가, 은은한 금빛 광휘를 끌어오기 시작했다.
“모가지 내밀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