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무너트리다 (3)
“저놈들이로군.”
모용군과 황석태, 흑혈대가 도착한 곳은 가주전으로 통하는 내원의 샛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용군은 느꼈다.
길의 반대편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무리의 존재를.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상 이상인데.’
기감으로 막연하게 느꼈을 때와는 다르다. 피부로 와닿는 전력의 격차가 굉장했다.
‘이 정도면…….’
초절정고수가 둘, 절정고수가 오십 정도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꿀릴 게 없다. 모용군 자신만 해도 어지간한 초절정고수 서너 명을 상대할 수 있으며, 황석태 역시 이룬 경지와 전투 능력이 대단했으니까.
거기에 수성에 특화된 흑혈대까지 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이쪽이 더 유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군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황석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용가주.”
“자네도 느꼈나.”
“그렇소.”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싸움, 생각보다 어렵겠는데.”
일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최전방 정예 부대의 수장다운 감각이었다.
모용군이 흑혈대 일 조장, 당병찬을 바라보았다.
“준비하시게.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야.”
당병찬은 모용군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그가 흑혈대를 향해 말했다.
“전원 흑혈호성진을 펼쳐라.”
스르륵.
말없이 조용히 좌우로 움직여 진형을 형성하는 그들.
고요하지만 첨예한 기도였다. 모용군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훈련받았어.’
당관과 연호정의 활약으로 그 수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정예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그들이었다.
어쩌면 당사번이 지휘했을 때보다 더 강하고 단단할지도 모른다. 그때의 흑혈대는 거의 자폭 부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한 전술은 흑혈대에게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용군의 손이 검병에 닿았다.
‘초장에 기를 꺾어 버리는 것이 좋겠지.’
이 불길함의 근원을 모르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은 언제고 승부에 변수를 일으키는 법. 모용군은 이번 전투를 지극히 신중하게 끌어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후.
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가오던 일단의 무리가 이동을 멈추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모용군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에 멈췄어?’
보이지 않지만 들을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놈들은 누구 하나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멈춰 섰다.
입 밖으로 멈추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전음 특유의 공기가 떨리는 느낌도 없었다.
마치 한 몸처럼, 그 자리에 딱 멈추었다.
까드득.
적룡신창을 쥔 황석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용군의 입이 열렸다.
“전투 준비하게.”
후우우웅.
서늘하고도 습한 바람이 서로를 보지 못하는 두 병력 사이를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웅.
움직이는 소리 없이, 그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침묵을 걷어 냈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저건?!’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오십여 개의 검은 물체들.
황석태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화탄?!”
퍼어어어엉!
동시에 흑혈대의 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쏘아 냈다.
화악!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는 반투명한 그물. 당관을 상대로 썼던 탈혼화망(奪魂火網)이었다.
여섯 개의 탈혼화망이 오십여 개의 검은 구체를 모조리 휘감았다.
그 순간.
콰아아아아앙!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화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파가 일행을 덮쳤다.
모용군은 깜짝 놀랐다.
‘이런!’
찰나의 순간 그는 깨달았다.
‘화탄이 아니다?!’
폭발하는 소리가 났지만, 이것은 화탄이 아니었다.
이 충격파는 화약의 폭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음파에서 나온 충격이었다.
터지는 순간 새하얀 빛으로 시각을 차단하며, 폭발과 함께 주변을 휩쓸어 버리는 음파 공격으로 인체의 귀와 뇌를 공격하는 물건인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때, 모용군은 적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모용군이 외쳤다.
“적습이다!”
차아아앙! 번쩍!
발검과 함께 휘몰아치는 천뢰무정식(天雷無情式).
시작부터 최고 절기를 뽑아내는 그였다. 뇌정공의 힘을 받은 무자비한 검뢰(劍雷)가 변칙적으로 움직이며, 돌격하는 적들을 향해 쏟아졌다.
퍼버버버벅!
검뢰에 맞은 적 몇 명이 그 자리에서 피를 뿜고 쓰러졌다.
모용군은 확신했다. 이번 검격으로 족히 다섯의 목숨을 날려 버렸음을.
하지만 적들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
터어어엉! 촤아아악!
“크윽!”
“컥!”
짧고 처절한 비명.
어느새 전방에 선 모용군과 황석태를 돌아간 적들이 후방의 흑혈대를 베어 넘기는 소리였다.
모용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놈들!”
그때, 황석태가 외쳤다.
“이곳을 맡으시오! 내가 가겠소!”
모용군의 뇌정공은 천하에 다시없을 절기지만, 그 파괴력이 대단한 만큼 섬세함은 떨어진다.
미리 겨누고 있었다면 모르되 난전 중에 함부로 발산했다가는 아군까지 휘말릴 수 있다. 황석태는 그 때문에 자신이 나서겠다고 외친 것이다.
모용군은 황석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번쩍!
뇌기를 이용, 인체의 반응 속도를 직접적으로 끌어 올린 모용군의 단거리 이동 속도는 연호정의 혈익휘천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순식간에 흑혈대의 후방으로 이동한 모용군이 모용세가 최고의 절기,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를 구현해 냈다.
치리리리리링!
파괴력 넘치는 뇌정공에서, 장중하고도 섬세한 검도(劍道)가 좌중을 지배한다.
수십 줄기의 검기는 난해한 검초에서 일어난 검풍과 맞물려 사십여 명의 적들을 일거에 몰아붙였다.
쩌저저저저저정! 퍼엉!
무서운 검법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두르는 쾌검(快劍) 속,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검리(劍理)가 깃들어 목표한 적들에게 일검(一劍)씩 살초를 쑤셔 박는다.
천하에 다시없을 광범위한 검법이었다. 뇌정공의 검법으로 건곤백팔검해를 구사하는 것, 본래의 섬세한 검도에 위력과 속도를 가미한 눈부신 무공이 여기에 있었다.
파바바박!
모용군의 무시무시한 검법 아래, 적 대다수가 뒤로 튕겨 나갔다.
그중 둘은 죽었고, 셋은 모용군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모용군은 빠져나간 그들을 쫓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주르륵.
모용군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폭발적인 뇌기를 이용, 엄청난 속도로 이동 후 방대한 내공으로 일거에 적들을 몰아쳤지만, 그 후유증이 상당했다.
잠시지간 움직이기가 버겁다. 큰 힘을 낼 때는 그만한 반동이 뒤따르는 법,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그때, 당병찬이 외쳤다.
“산형비(散形飛)!!”
촤아아아악!
눈앞의 적들을 무시한 채 진을 빠져나간 이들을 향해 수백 개의 암기가 쏟아졌다.
빠져나간 세 명의 적들, 황면인 둘과 적면인 하나가 제각기 병장기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정! 퍼퍼펑!
쏘아지는 암기 대부분을 튕겨 냈지만, 그중에는 충격을 받으면 터지는 독탄도 있었다.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독무에 세 복면인이 비틀거렸다.
당병찬이 외쳤다.
“후방중첩진이다!”
파라라락!
이십여 명의 흑혈대원들이 또다시 후방으로 물러나 진을 형성했다.
빠르고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움직인 대원들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이익!’
당병찬은 내공을 끌어 올려 눈과 귀의 이상을 최대한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화탄이 있단 말인가?!’
폭탄(爆彈)이 아니었다. 폭발과 함께 눈과 귀에 이상을 일으키는 치명적인 물건이었다.
세상에 그런 화탄이 존재한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감각이 예민한 무림인들에게는,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더욱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무기였다.
허를 찌르는 적습이었다. 당병찬은 직접 후방중첩진으로 이동하여 황면인과 적면인을 주시했다.
“공격해라! 다 쏟아부어!”
퍼퍼퍼퍼펑!
그나마 멀쩡한 대원들이 탈혼화망, 자오분심, 금전표 등의 독과 암기를 마구 쏟아 냈다.
파라라락! 쩌저정!
적면인도 대단했지만, 두 황면인은 확실히 대단한 고수였다.
독에 노출된 상태에서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병장기술로 암기를 쳐 내고 독무를 흩어 낸다. 초식이 전부가 아니다. 기공술에 있어서도 초일류의 실력을 보유한 진짜 고수들인 것이다.
그때였다.
푸화아악!
“크으윽!”
“아악!”
활동을 재개한 사십여 명의 적들이 일진(一陣)의 흑혈대원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했다.
그 잠깐 새에 죽은 대원의 수가 삼십이 넘었다. 모용군은 공방이 힘든 상태였고, 황석태는 황면인 하나와 접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당병찬의 눈이 흔들렸다.
“이럴 수가!”
단 한 번의 허를 찌르는 기습.
그 한 번의 예기치 못한 공격으로, 자신감 넘치던 흑혈대가 진형과 수성 능력을 대부분 상실해 버렸다.
변명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기에는 적의 기묘한 화탄이 지나치게 말도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당병찬은 분노와 동시에 허탈함을 느꼈다. 적이 어떤 식으로 들이닥치든, 그 모든 것을 막아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흑혈대 아니던가.
당관과의 대치부터 이곳, 마인들의 기습까지.
흑혈대는 지닌바 명성의 절반도 보여 주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모두 정신들 차려라! 눈앞에 적이 있다! 절대 놈들을 가주전까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그때, 독무를 뚫고 달려든 황면인이 묵직한 참마도(斬馬刀)를 들어 올렸다.
당병찬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막을 수 없다!’
황면인이 냉정하게 칼을 내리쳤다.
* * *
“크윽!”
백면인이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뭐지.’
쪼개진 가면 뒤, 드러난 백면인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본 그였다.
‘…….’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괴물?’
너무 찰나지간이라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다. 심지어 백면인은, 그 얼굴이 드러나선 절대 안 된다는 듯 휘둘러진 도끼에 손목이 너덜너덜해지는 걸 감수하고 얼굴부터 가렸다.
상대의 반응이 너무 의외라서 후속타를 날릴 시기를 놓쳤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얼굴에 금칠이라도 해 놨나…….”
그때였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화아아아악!!
가면이 쪼개진 백면인의 몸에서 폭풍 같은 마기가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폭증하는 마기다. 농도 이전에 그 양이 무시무시했다. 대량의 마기는 뿜어져 나오는 순간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진법의 중추마저 뒤흔들고 있었다.
이 정도로 거대한 마기는 연호정조차 본 적이 없었다.
‘뭐야?!’
굳은 얼굴로 두 도끼를 고쳐 쥐는 연호정.
그는 떠올렸다. 놈을 끝장내려 할 때마다 자신의 육감이 자꾸만 후속타를 제어하려 했던 순간을.
쿠르르르릉!
백면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그야말로 통제 불가였다.
번쩍! 번쩍!
진법 곳곳이 새하얀 빛을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호정이나 당관처럼 파훼를 한 것이 아니었다. 백면인의 이질적인 마기가 폭풍을 일으키며 진법 자체를 망가트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간마저 분리시킬 정도로 신비로운 진법을, 뿜어져 나오는 진기의 힘으로만 무너트리는 것.
이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무극지경을 눈앞에 둔 연호정조차 내공의 발산만으로 진법을 무너트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는 것은?
‘놈의 마기 양이 성천십삼좌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콰지지지직!
통제되지 않는 마기가 결국 사자소혼진을 완벽하게 무너트렸다.
우우우우우우웅!
진법이 무너지고 본래의 세상이 돌아왔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니, 어둡게 보였다.
백면인이 자아내는 마기가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기어이 네놈이, 일을 치르는구나.”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우웅! 우우웅!
목소리에서 엄청난 울림이 전해져 왔다.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글쎄, 이런 곳에서 내 천명이 끝나게 될 줄은 몰랐다.”
도끼에 찍혀 너덜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백면인이 눈을 빛냈다.
“너, 이젠 죽을 것이다.”
번쩍!
백면인의 주먹이 연호정의 복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