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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14화 (613/963)

614화. 무너트리다 (2)

“크윽!”

비틀거리며 물러난 백면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이놈!’

파악!

자세가 무너질 정도의 일격, 쌍도끼를 교차한 십자참(十字斬)으로 극강의 공격력을 발휘했음에도 어느새 흔들리던 상체를 지탱했다.

균형 감각도 대단했지만, 그 이전에 하체의 근력이 엄청난 수준이었다.

저런 건 내공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내공으로 근력이 향상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바, 고관절부터 발목에 이르는 모든 근육과 유연성이 인간의 한계를 넘도록 단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창봉을 잘라 내다니!’

쾅!

잠시간 자세를 바로잡기가 무섭게 다시 질주하는 연호정.

그야말로 짐승이다. 처음과 같이 두 도끼를 앞발 삼아 대지를 찍어 내며 낮은 자세로 돌진하는데, 그 움직임이 인간의 수준을 한참이나 초월했다.

백면인은 잘려서 허공에 띄워진 창봉을 칼날로 후려쳤다.

카아아앙!

삼첨도의 칼날 면에 맞은 창봉이 화살이 되어 연호정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퍼억!

쏘아진 창봉이 대지에 박혔다.

사람은 네발 달린 짐승이 아니다. 당연히 두 팔과 도끼를 이용해 폭발적인 출력을 냈다고 하여, 짐승 특유의 유연성과 방향 전환 능력까지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코앞에서 쇠뇌를 쏘아도 이보다 빠르진 않을 텐데, 그 빠른 속도로 치고 들어오는 대각의 직선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 냈다.

파바박!

갈지자를 그리며 접근한 연호정이 자세를 완전히 낮춘 후 오른 다리를 올려 쳤다.

쩌어어어엉!

백면인은 이를 악물었다.

삼첨도로 베어 낼 찰나의 시간도 없었다. 왼팔을 들고 상체를 눕혀 충격을 분산했는데도 척추가 부러질 것처럼 아파 왔다.

쐐애액!

백면인이 기울어진 자세 그대로 삼첨도를 휘둘렀다. 창봉 끝이 날아갔지만, 여전히 어지간한 장검보다도 길쭉했다.

카앙!

하단에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든 삼첨도의 칼날이 흑룡부에 막혔다.

무너진 자세에서도 용케 공격을 막았다. 반응 속도가 그야말로 번개 같았다.

치리리링!

흑룡부와 삼첨도가 부딪친 그대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때, 연호정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후웁!”

카앙!

힘으로 눌린 삼첨도의 칼날이 땅에 박혔다.

‘헉!’

이전에도 놀라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아무리 상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쳤다 한들 자세가 무너진 채로 받아 낸 일격이었다. 한데 찰나지간의 호흡으로 찍어 내듯 중량을 실어 삼첨도를 땅에 박아 버렸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력인가!’

힘을 주어 삼첨도를 뽑으려 했지만, 삼첨도를 짓누른 흑룡부 뒤로 백룡부까지 가세했다.

카아아아앙!

이전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쇳소리.

흑룡부에 힘을 실은 백룡부가 삼첨도의 칼날을 그대로 베어 버린 소리였다.

더 이상의 병장기술은 의미가 없었다. 삼첨도의 창봉을 놓은 백면인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 자세를 낮추었다.

번쩍!

흑룡부에 힘을 실어 준 백룡부가 기다렸다는 듯 허공을 베었다.

거리가 떨어졌다고 안심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도끼날이 허공을 격하고 쏘아졌다. 검기공(劍氣功)이었다.

백면인의 수도(手刀)가 대각선으로 휘둘러졌다.

쩌어어어어엉!

폭발적인 참격과 마력 가득한 참격이 부딪치며 엄청난 공명음을 일으켰다.

사아아아악!

그 충격파가 얼마나 거셌는지, 어두웠던 하늘 위로 새하얀 빛줄기가 번져 나갔다. 충격파만으로 진법의 일부가 갈라져 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파바바박!

곧바로 치고 들어가려던 연호정이 두 발로 땅을 마구 밟아 속도를 늦췄다.

사아아아악!

백면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멋모르고 돌격했다가는 예상치 못한 일격이 날아왔을 것이다. 한껏 달아오른 육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연호정이 질주를 멈춘 이유였다.

그러한 연호정의 감각에, 백면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구나.”

화르륵! 화르르륵!

열양공이 아님에도 피어오르는 검붉은 마기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듯하다.

뜨겁고도 끈적거리는 기운이었다. 은은한 광기가 묻어 나오는 기파에 소름 돋는 살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창졸지간이지만 확실히 밀렸어. 실력이 대단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퍼어엉!

연호정의 권풍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대화 따위는 필요치 않다. 백룡부를 휙 던지듯 놓고는 곧장 주먹을 내지르는데,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백면인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콰앙!

날카로운 권풍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작정하고 타격을 주기 위해 내지른 권풍이 아니었다. 신경을 분산하고 내공 발산의 최대치를 억압하기 위한 견제의 용도였다.

“대화가 필요치 않다는 건가.”

손에서 놓은 백룡부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 연호정의 좌측 발이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퍼억!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백룡부가 백면인의 빗장뼈를 노렸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그 순간.

전투 중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사치겠지만, 백면인은 연호정의 실력에 감탄을 넘어 감동했다.

‘완전히 물 만난 고기로구나.’

떨어진 병장기를 발로 차서 상대의 목숨을 노린다.

경지가 높다고 한들 아무나 쓸 수 없는 감각적인 한 수였다. 이런 건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 속 수백, 아니 수천 번의 몰입으로 승부를 논했던 백전노장이 아니면 흉내조차 내기 힘들다.

‘피해야 하나.’

회전하는 백룡부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백면인은 끝까지 연호정을 주시했다. 연호정은 어느새 흑룡부를 치켜든 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속타를 상정하는 것이다. 상대의 회피 방위 몇 군데를 이미 읽고 있다.

번쩍!

백면인의 눈이 빛났다.

그의 눈에도, 그리고 사방에 드리워진 시체들의 눈에도 연호정의 다음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막는다!’

백면인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카아앙!

백룡부의 공격이 날카롭다 한들, 직접 잡아 휘두르거나 던진 게 아닌 이상 제 위력이 나오긴 힘들다.

허공을 나는 백룡부, 백면인의 주먹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광마신공의 철마결이 주먹을 강철보다도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그때였다.

전방으로 달려 나가는 자세 그대로, 연호정의 상체가 확 수그러졌다.

번쩍! 피슉!

백면인의 눈이 흔들렸다.

‘이런……!’

좌측 어깨에 제법 깊은 상처가 생겼다. 백룡부보다 세 배는 더 빠르게 날아온 흑룡부가 만들어 낸 상처였다.

본능적으로 몸을 사선으로 기울인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흉골 중앙에 도끼날이 박혔을 것이다.

회피가 정답이 아니었다. 연호정은 자신이 회피할 거라고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회피, 방어, 심지어 반격까지.

본인의 공격에 대응하는 모든 움직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빠르고 변칙적인 공격이 튀어나올 수가 없다.

백면인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미친놈!!”

순간 연호정이 왼발이 대지를 찍었다.

쾅!

결정적인 순간을 잡아낸 야수의 직감.

그 직감이 알려 준 공격의 때를 연호정의 몸은 충실히 따랐다.

후우우우우우웅!

주먹을 내지르자마자 생성된 새하얀 소용돌이가 그대로 백면인의 상체를 향해 돌진했다.

천하의 백면인도 지금 이 공격만큼은 제대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백면인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제대로 들어간 일격, 확실한 유효타였다.

치리리리리링! 타악!

흑백쌍룡부가 연호정의 양손에 잡혔다.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끌어온 것이다.

“…….”

연호정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눈으로 쓰러진 백면인을 바라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달려들어 도끼질 몇 번 박아 주면 그대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후속타를 먹이지 않았다.

‘이상하군.’

결정적인 순간에 머뭇거리게 되는 이유.

백면인에겐 아직 드러내지 않은 한 수가 있다. 그 한 수를 드러내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것이 생사결의 법칙이지만, 어쩐지 이런 순간마다 멈칫하게 된다.

그리고 연호정은 자신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지금 백면인을 공격하는 건 자신에게 손해라는 직감의 경고를 따랐다.

“……쿨럭!”

새하얀 가면 밖으로 붉은 선혈이 흘러나온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스르르륵.

백면인의 몸이 바로 세워졌다.

땅을 짚고 무릎을 굽혀 일어난 게 아니다. 누워 있던 자세 그대로, 마치 뻣뻣한 나무가 지렛대의 원리로 일어나는 것처럼 몸을 쭉 세웠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가면 밑, 목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보였다. 내상으로 토혈을 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가. 드러난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사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철마신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격으로 승부가 났을 것이다. 과연 벽산호장의 명성은 헛것이 아니었군. 아니, 소문 이상이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재미없는 무공을 익히고 있군.”

“네 입장에서야 그럴 수 있겠지.”

백면인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비슷한 경지, 아니 근소하게나마 내가 위인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도 손 한번 제대로 못 써 보고 죽을 뻔했다.”

“…….”

“형용할 수 없는 전투력이군. 싸움에는 도가 텄어. 사람 죽이는 일에 이골이 난 전사도 이렇게는 못 싸울 것이다.”

살기로 상대의 인지 능력을 교란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거야 천성적으로 살기를 과하게 안고 태어났다고 칠 수 있다.

연호정의 전투술은 재능 이전에 경험의 영역이었다. 대체 저 나이에 얼마나 많은 아수라장을 겪었으면 이와 같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지가 높다 하여 싸움의 우위가 절대적으로 갈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가만히 백면인을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많아진 건 둘째 치고, 말투와 목소리도 이전과 달라졌구만?”

“…….”

“마치 다른 사람처럼.”

백면인의 안광이 번뜩였다.

“감도 좋고.”

“뭐가 어찌 되었든, 필살기니 뭐니 비밀 병기 같은 거 숨기고 있는 놈들 안 좋아해.”

우두둑. 우두둑.

천천히 목을 돌리면서도 백면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연호정의 모습은 마치 뒷골목 파락호처럼 보였다.

백면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외양이나 위치를 보면 분명 백도 무림의 기린아인데, 싸움법이나 말투, 그리고 지금의 몸짓을 보면 저잣거리 왈패나 다를 바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연호정이 흑룡부를 까딱였다.

“시간 없다. 널 잡고 나면 토막 쳐서 육젓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생각하면 더 빠듯해.”

“…….”

“오려면 제대로 와라.”

번쩍! 콰아앙!

폭음과 함께 새하얀 연기가 일었다.

콰드득!

싸움의 첫 기습을 연호정이 감행했다면, 이번 기습은 백면인의 차례였다.

연호정의 두 발이 고랑을 만들어 냈다. 자신이 기습을 가했을 때 백면인이 물러난 거리와 거의 비슷했다.

치이이익.

교차해서 막은 흑백쌍룡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고작 이 정도냐?”

백면인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보고 중에 이런 말도 있었지. 상대를 도발하는 능력이 수준급이라고. 과연 그 보고 그대로구나.”

“도발한 적도 없는데 혼자 열 내고 지랄이야. 자존감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

“……이놈!”

훅!

백면인이 어느새 연호정의 좌측에서 나타났다.

신기(神技)의 이동 속도, 천하의 연호정조차 찰나지간 시야에서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백면인의 주먹이 연호정의 옆구리를 노렸다.

퍼어억!

순간 백면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휘두른 주먹, 그 주먹에 새하얀 도끼가 박혀 붉은 핏물이 마구 솟구쳤다.

“하나 말을 안 해 줬군.”

연호정이 씨익 웃으며 백면인을 내려다보았다.

불그죽죽한 살기로 물든 그의 얼굴은, 백면인보다 훨씬 더 마인 같았다.

“눈에 보이는 움직임만 좇다가는 이런 꼴이 나는 거다. 그래서 너한테는 도발도 안 한 거야. 할 필요가 없었거든.”

“……!!”

“유치한 필살기 같은 건 안 꺼내는 거지? 그럼 잘 가라.”

연호정이 그대로 흑룡부를 내리쳤다.

퍼석!

백면인의 가면이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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