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화. 문제의 중심 (7)
“…….”
묘한 침묵이 일었다.
백면인의 고개가 살짝 꺾였다.
“발랄하기 그지없는 인사로군.”
백면인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당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무슨 말이냐?”
“담당자 바꿔 주기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입니다. 다음은 없어요.”
“……?”
“가십시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백룡부를 휘휘 흔들었다. 귀찮으니 어서 나가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당호를 잡아야 할 거 아닙니까.”
“……여기는 내 싸움터다.”
“틀렸습니다. 가주님의 싸움터는 이 병신 같은 곳이 아니라 가주전입니다.”
“…….”
“아니, 그러게 진즉에 작살을 내 놓지 왜 자꾸 사람 힘들게 이러는 겁니까?”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도 아군이 와서일까? 당황했던 그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상대가 치사하게 나오더구나.”
“치사하게 나오기 전에 작살내는 게 생사결의 기본 아닙니까? 다 아시는 분이 오늘따라 왜 이럽니까?”
“글쎄다. 나도 늙은 게지.”
“보아하니 당호 그놈도 단숨에 죽일 수 있었음에도 혈육이니 뭐니 하면서 기회를 줬겠지요?”
당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을 힘들게 만드셨습니다.”
“안다.”
“힘들게 만든 일, 직접 처리하러 가십시오. 여기는 제가 맡지요.”
“어려울 거다.”
“가정은 싫어합니다만, 그러게 진즉 작살을 내 놓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연호정이 당관의 소매를 힐끔거렸다.
“보아하니 한 번 쓰신 것 같은데.”
“뒤가 없는 무공이다. 아직까지는 그래.”
“뒤가 없으니까 다 작살낼 수 있지요. 그 정도 파괴력은 나오잖습니까?”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
“젠장, 결국 돌고 도는 대화로군.”
연호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어서 가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만나자마자 그 비기로 박살을 내 버리세요. 이건 권고나 충고가 아니라 이번 작전의 수장으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시끄럽다.”
몸을 일으킨 당관이 백면인을 힐끔거렸다.
백면인은 당관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모호한 눈으로 연호정만을 주시할 뿐.
당관이 몸을 돌렸다.
방금까지 치열하게 부딪쳤던 적이 몸을 돌리는데도 백면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연호정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진법 후방으로 가던 당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싸가지.”
“말씀하십시오.”
“…….”
“……?”
“어떻게 나가는지 모른다.”
한껏 고조되던 긴장감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고, 백면인조차도 그 조용한 음성으로 헛기침 비슷한 소리를 냈다. 꽤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니 이 진법도 결국 당가의 기술을 근본으로 한 진법입디다.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어 어렵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허(虛)의 허(虛), 역(逆)의 역(逆)입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허의 허, 역의 역.
과거 연호정과 만천공, 화우공을 연마했을 때 자신이 말했던 당가 무공의 특성이었다.
‘그렇군.’
당관이 탄식을 토해 냈다.
‘이 간단한 것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눈앞의 일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주변을 보지 못했다.
그런 걸 보면 연호정은 참 대단한 녀석이었다. 생각의 범위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처음 본 진법이라도 이 방법, 저 방법 써 가면서 생로와 사로를 파악하지 않았는가.
당관이 오른손을 들었다.
‘허의 허.’
스르륵.
올올이 풀려 나온 진기가 허공을 가르며 꿈틀거리니, 진법의 기운이 슥 하고 쫓아왔다.
그때, 당관의 왼손이 올라왔다.
밀도가 낮아진 공간으로 진기를 방사하니, 진법의 기운이 더 강하게 일어나며 그 자리를 채웠다.
당관은 끊임없이 공간을 바꿔 그 행위를 반복했다. 그러자 그가 진기를 방사하는 곳의 진형이 미친 듯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당관이 양손의 위치를 바꾸었다.
‘역으로.’
진기를 뿜던 장심에서, 일순 강한 인력(引力)이 일어났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출구였다. 너무나도 쉽게 출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어지간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기예였다. 하지만 당가의 공부를 이은 당관에게 있어선, 이보다 더 쉬운 파훼법이 달리 없을 것이다.
다만, 진기로 진법의 생로를 연다는 발상 자체를 못 했을 뿐이었다.
당관이 말했다.
“간다.”
“아직도 안 가셨습니까?”
“……싸가지 없는 놈!”
훅!
그렇게 당관이 진법을 나갔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이전보다 한층 살벌해진 웃음이었다.
“방해꾼은 갔으니, 이제 우리끼리 놀아 봐야지?”
“열일곱 번.”
“음?”
백면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가주가 나갈 때까지, 열일곱 번의 빈틈을 발견했다. 그리고 공격하려 했지.”
“안다.”
“하지만 전부 막혔다.”
“너 같으면 그런 걸 허용하겠냐?”
“과연…….”
치이이익!
백면인이 든 삼첨양인도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당호가 피웠던 진기와 지극히 유사한 색깔이었다. 하지만 색깔만 비슷할 뿐, 그 깊이와 농도는 천지 차이라 할 만했다.
스르르르륵.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시체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허상에 불과한 시체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일었다. 허상을 허상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었다. 생명이 없는 존재에게도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기운이었다.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역시 마기(魔氣)로군.”
“마기의 존재까지! 역시 벽산호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이건가?”
“날 아나?”
“알지. 모를 수가 없지.”
백면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
“몇 해 전 중원 무림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진 고수. 구주명가를 무너트리고 멸사군의 수장이 되어 흑도 문파들을 분쇄한 희대의 장수. 이후 신화교의 무장들과 사음교가 파견한 고수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나아가 무림맹과 묵룡부 관계를 중재하기도 한 당대 최고의 외교가이자 무림인.”
“……!”
“그 위험도는 산출이 불가한 영역에 있어. 무력을 제외한 단순 위험도로만 치자면 성천십삼좌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으로 분류되는 초특급 위험인물이 바로 벽산호장이라 하였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대놓고 비웃는 듯했지만, 그는 내심 무척이나 놀랐다.
“많이도 조사했군. 듣기 좋은 소리도 할 줄 알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만큼 널 위험하게 보고 있거든.”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성천보다도 위험하다고 평가했다는 소리다. 충분히 영광이지.”
백면인의 눈이 휘어졌다.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일선에서는 너무 과한 평가라고 하였다. 이제 서른도 안 된 청년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못하는 것이지.”
“…….”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네놈에 관한 정보를 하나하나 확실하게 모아 두었다. 그리고 분석했지. 그 결과,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너란 인물을 평가할 수 있었다.”
“자랑이다, 인마.”
“잘되었어.”
훅!
흘러나온 검붉은 마기가 이내 씻은 듯 사라졌다.
동시에, 백면인의 동공이 피처럼 끈적끈적해졌다.
“안 그래도 네놈이 당가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당호 선에서 정리되지 않으면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와 주니 고맙기까지 하군.”
당관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와는 말투가 다르다.
당관 역시 죽여 마땅할 자였지만, 연호정은 차원이 다른 적이었다. 실력의 고하를 떠나, 목적의 선후 문제였다.
당관을 죽이겠다고 거래를 했지만, 어차피 당호 역시 이 거래를 신뢰하진 않을 것이다.
설령 신뢰했다 해도, 연호정이 나타난 이상 당관은 그 뒤의 문제다.
“아직 맑은 이 세상의 공기, 너의 피를 제물 삼아 본교의 전진을 한층 더 빠르게 하리라.”
쩌어어어어어엉!!
순간 엄청난 공명음과 함께 백면인의 몸이 뒤로 확 꺾였다.
백면인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난 힘!’
강력한 참격이었다. 일순간 거리를 좁혀 시커먼 손도끼를 내리치는데, 그 힘이 중병인 삼첨양인도에 비견될 만했다.
“제물이라.”
폭발적인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후속타를 상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인사이자 분풀이였다. 연호정의 일격이 유독 빠르고 신경질적이었던 이유였다.
“너, 광혈에서 나왔지?”
“…….”
백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호정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더 벌어지더니, 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제물 좋지, 좋아. 너희 정신 나간 미친놈들을 제물 삼아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해진다면, 내 친히 네놈들을 모조리 불태워 주마.”
달라졌다.
백면인은 생각했다. 연호정이 달라졌다고.
사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났다.
백면인이 피우는 진기와 거의 유사한 색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이 피우는 기운은 마기 따위가 아니었다.
‘살기(殺氣)!’
그렇다.
고농도로 응축된 살기, 굳이 세상의 본질을 볼 필요도 없이 범부의 눈에도 보일 만큼 유형화된 살기는 백면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미쳤군.’
가공된 진기도 아니요, 그저 순수한 의념에 불과한 살기가 사람 눈에 보일 정도로 농축되었다.
저런 살기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공을 연성한 백면인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마기보다도 위험한 살기다. 마기를 익힌 자보다 훨씬 더 미쳐 버린 자가 피워 올리는, 대자연의 일부인 생명체가 생명의 한계를 깨고 불사르는 최악의 살기였다.
“오늘 제대로 죽어 보자고.”
번쩍!
백면인의 눈이 커졌다.
‘사라졌다?!’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였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인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어디……?’
순간 백면인은 하단에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살기의 칼날을 느꼈다.
그 크기가,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초승달이 지상에 떨어지면 이러할까 싶은 수준으로 거대했다. 진짜 칼날이 아님에도 살기로 인해 산조차 쪼개 버릴 것 같은 칼날이 내 육신을 노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백면인은 온 힘을 다해 삼첨도를 내리쳤다.
쾅!!
폭음은 크고도 짧았다.
훅 밀려난 백면인은 어느새 자신의 뒤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튕겨 나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밀려 나가는 공기가 무섭게 과열되는 것이다.
백면인이 이를 악물고 두 발을 대지에 꽂았다.
콰콰콰콰콱!!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대지가 갈려 나갔다.
등판이 쪼개질 것 같고, 발목과 무릎이 부러질 것 같았다. 광마신공(狂魔神功)의 철마신(鐵魔身) 구결이 아니었다면 분명 어느 한 곳은 부러졌을 것이다.
“미친!!”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욕설에 분노와 당황이 어렸다.
백면인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핏빛 동공 위에 경악이 어렸다.
크허어어엉!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야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는 살기의 일격. 공격한 연호정도 내상을 입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른 일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다.
공격한 본인이 내상을 입고 얼굴도 하얗게 질렸지만, 두 눈 가득 떠오른 살기는 이전보다 더 강렬해져 있었다.
콰쾅! 콰쾅! 콰아앙!
살기를 띤 채, 두 도끼를 앞발 삼아 땅을 찍으며 달려오는 연호정은 한 마리 야수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순간 백면인은 깨달았다. 자신이 왜 연호정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는지.
연호정이 흘리는 살기가 너무 짙고 거대해서 인지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말도 안 돼!!”
“으아아압!!”
번쩍!
흑백쌍룡의 참격이 십자로 교차되어 백면인의 몸을 노렸다.
퍼어어억!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핏물과 함께 잘려 나간 창대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