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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10화 (609/963)

610화. 문제의 중심 (5)

퍼억!

당사번이 그대로 쓰러졌다.

“끄으으윽!”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신음 비슷한 것을 흘리는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건가?”

“무엇이 말이오?”

“왜 안 죽이지? 자네 성격이면 토막을 쳐도 무방할 텐데.”

연호정이 흑백쌍룡을 허리춤에 걸었다.

“섬뜩한 소리를 잘도 하시는구려.”

모용군이 흑혈대를 바라보았다.

“이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흑혈대원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면전에서 이놈들이라니, 아무리 모용가주라 해도 도가 지나쳤다.

모용군이 턱으로 당사번을 가리켰다.

“멀리서 들어 보니, 저놈은 죽어 마땅한 놈 같은데. 그 당호인지 뭔지 하는 놈과 쿵짝이 맞아서 가주를 반역자로 모는 데에 선봉을 선 것 아닌가?”

대화 몇 마디 들은 것만으로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부 꿰뚫어 본다. 여전히 그의 안목은 날카로웠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하지만 아무리 괘씸해도 당가주님만 하겠소. 죽여도 직접 죽이고 싶을 텐데.”

“흐음, 그 말도 맞긴 하네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지금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질 때가 아니야.”

“…….”

“자네도 느꼈지? 이 불온한 기운.”

“그렇소.”

두 사람이 동시에 서쪽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거운 엉덩이를 이제야 드셨군. 그나마 다행이오.”

“이것이 암왕의 힘인가.”

황석태 역시 은은하게 퍼져 나오는 위압감을 느끼며 전율을 금치 못했다.

모용군이 한숨을 쉬었다.

“진즉에 좀 나서 주시지. 그랬다면 우리가 이 난리를 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어쩌겠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더 이상 과거지사를 들먹이지 맙시다.”

“그래, 그건 그렇고.”

스르릉.

모용군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말한 불온한 기운의 정체는 저분이 아니야.”

“나도 알고 있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공(魔功)인가…….”

무공에 살기가 가득해서, 정공(正功)과는 달리 사이한 술수로 내공을 불리거나 불순물이 많은 진기여서 마공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연호정이 느낀 기운은 진짜 마공이었다. 순리를 거역하는 역천(逆天)의 힘. 진기의 순환 방식 자체가 기존의 내공심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연성자의 영혼과 마음을 어둠으로 침식하는 진짜 마공인 것이다.

‘마공도 보통 마공이 아니야. 애초에 마공 자체가 익히기 어려운 무공이지만…….’

순천(順天)의 자연기를 심법에 맞게 정제하여 축기하는 것이 정공의 기본이라면, 마공은 호흡으로 얻는 자연기를 순행의 역방향으로 이끌어 강제로 탁하게 만드는 데에서 시작한다.

탁한 기운은 몸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바. 그 부담스러운 기운을 버텨 구결에 따라 음(陰)하게 가라앉히면 신체에 거대한 인력(引力)이 생성된다.

그리고 그 인력은 더 많은 기운을 빨아들여, 탁기를 하나의 악기(惡氣)로 생성해 낼 기반을 닦는다.

기(氣)의 움직임은 물론 성질을 바꾸는 것도 의념의 힘인바. 뭉친 탁기를 악기로 빚어내기 위해 강제로 중단전을 자극하여 분노, 슬픔, 살의, 좌절, 욕망 등의 온갖 음적인 의념으로 기운 자체의 성질을 바꿔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악기를, 최종적으로 심법에 맞게 재가공하면 이윽고 마기(魔氣)가 된다.

복잡해 보이지만, 한번 체득하는 순간 몸이 알아서 마기를 생성해 낸다. 더 많은 기운을 빨아들이고, 더 지독한 마기를 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공의 연성 속도는 빠르다. 동시에 심성(心性)이 빠른 속도로 파탄이 난다. 온갖 음적인 자극으로 상중하, 세 개의 단전을 꽉 채우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공을 익힌 자 대다수가 무림공적으로 몰리는 것이 그 때문이었다. 사람이 무공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무공이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역시.”

파지지직.

모용군의 검에 뇌기가 실렸다.

“그놈들이겠지?”

“그렇겠지.”

그놈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사음은 아니고, 신화도 아닐 확률이 높소. 그렇다면…….”

“광혈인가.”

“그럴 확률이 높겠지.”

신화교는 대대로 열양공을 익힌다. 애초에 종교 자체가 불을 숭상하는 종교였다. 설령 마공을 익혀도, 이토록 끈적하고 음습한 마공을 익히진 않을 것이다.

‘광혈.’

광혈교.

광신삼교의 한 축이자 셋 중 가장 신비롭다고 알려진 세력.

실제로 연호정이 흑암제이던 시절, 광혈교의 교인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화려하게 충돌했던 것은 사음교였고, 신화교의 고수들도 몇몇은 보았다.

천운인지 뭔지, 과거로 돌아와서는 사음교보다 신화교의 고수들과 많이 부딪쳤더랬다.

사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신화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광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한데, 괜찮나?”

“음?”

모용군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평소와는 좀 다르군.”

“뭐가 말이오?”

“삼교 놈들이 등장하면 상대가 누구라도 미쳐 날뛰던 게 자네 아닌가? 한데 오늘은 아주 차분하군.”

“그렇소?”

실제로 연호정은 차분했다. 아니,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신삼교 전원이 죽어 마땅한 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당가였다.

다른 문파나 무가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당가에서만큼은 신중해야 했다.

‘당가는 절대 무너져선 안 돼.’

당가는 사천의 중심이요, 적의 진군을 일차로 봉쇄하는 성벽이었다.

다른 문파도 무너져선 안 되지만, 특히나 당가가 무너져선 안 된다. 설령 이곳이 폐허가 되더라도, 당가의 기술자들은 절대 목숨을 잃어선 안 되는 것이다.

“신중해야 하오. 화가 난다고 미쳐 날뛰면 안 돼.”

우두둑.

연호정의 손가락에서 살벌한 소리가 났다.

“차분히, 하나하나씩, 어느 한 놈도 놓치지 않게 싸워야 할 것이오.”

“……그렇군.”

연호정이 흑혈대를 향해 말했다.

“자네들은 어쩔 건가?”

일 조장이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현재 당가 내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인들이 들어와 있다. 우리는 그 마인들을 상대하러 가야 해.”

“……!”

모두가 놀랐지만, 일 조장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마인이라면 마공을 연성한 그 마인 말이오?”

“그래.”

“확실하오?”

“확실해.”

“우리가 당신들을 어찌 믿소?”

“쓸데없는 잡담으로 분명한 신뢰가 쌓이기 어려운 관계를 더 난잡하게 만들고 싶다면, 계속 그렇게 되물으시든지.”

“…….”

“어차피 마인들은 자네들이 협조하지 않더라도 없애 버려야 해.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든 우릴 돕든 알아서 하도록.”

연호정이 모용군과 황석태에게 말했다.

“갑시다. 마기의 집단이 벌써 외원 중앙을 통과한 것 같소.”

“그러지.”

그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사람은 당숙총이었다.

연호정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그의 표정과 언사는 몹시 친절하고 부드러웠다.

당연했다. 귀옥에 갇힌 장로들은 끝까지 당관을 믿고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올바른 신념과 고집을 지닌 이들이다. 연호정은 그런 장로들을 존중했다.

당숙총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소이다. 나는 당숙총이라는 늙은이외다.”

“연호정입니다.”

“은인께 만 번의 감사 인사를 드려도 모자랄 판국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러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오.”

당가의 인물답지 않게 몹시 깍듯한 태도였다.

이 또한 당연했다. 당가는 원한을 잊지 않지만, 또한 은혜도 잊지 않는다. 명확한 은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연호정 일행은 당가의 평생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괜찮습니다. 해서,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가주님을 구해 주시오.”

“…….”

“은인들께 면목이 없소. 하지만 우리가 아는 당호는, 어설플지언정 일신의 안위를 위해 온갖 끔찍한 짓도 불사하는 위인이라오.”

“……그렇더군요.”

“아무 대책도 없이 가주님을 끌어들였을 리가 없으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힘이 없소. 그러니 부디 마인 척결 이전에 가주님부터 도와주시길 감히 부탁드려 보오.”

연호정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의 얼굴도 떨떠름했다. 이문 따지길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조차도 어느 쪽에 힘을 실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다시 장로들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흑백쌍룡부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시원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두 자루 손도끼는 누가 봐도 명품이라 할 만했다.

“가주님께서 제게 만들어 주신 도끼들입니다.”

“알고 있소. 딱 봐도 본가 장인들의 솜씨외다. 최고의 명공들이 달라붙어 만든 물건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 가주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가주님을 도와드려야지요.”

“하면……?”

연호정이 모용군과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올 동안 버틸 수 있겠소?”

모용군이 콧방귀를 뀌었다.

“잊고 있나 본데, 자네는 나보다 약해.”

“그 반대가 아닐지.”

“웃기고 있군. 남 걱정 말고 자네나 잘하게. 뜬금없는 기습에 목숨 잃지 말고.”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황석태가 적룡신창을 툭툭 두들겼다.

그걸로 끝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것, 연호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황석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당충호가 흑혈대 일 조장을 바라보았다.

“자네들도 이분들을 돕게. 자네들이 그리 원하는 진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마당이지만, 마인들은 공공의 적이야. 누가 진짜이든, 본가에 더러운 발을 들인 악적들을 그냥 둬서는 곤란할 게야.”

일 조장의 눈이 깊어졌다.

“우리는 내원 가주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요.”

“그래서 안 갈 텐가?”

“…….”

잠시 고민하던 일 조장이 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모든 일은 적을 분쇄한 이후에 따지기로 한다!”

“존명!”

시원시원한 결정이었다.

어떤 의미로 일 조장의 판단은 지극히 옳은 것이었다. 훗날 당관의 진실이 드러날 때, 적을 물리친 공을 세우면 그들의 죄도 경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흑룡부와 백룡부를 맞부딪쳤다.

캉! 캉!

모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전대 가주님, 암왕 노선배께서도 나선 마당이니 아마도 이번 싸움이 마지막이 될 것이오.”

“…….”

“각자 맡은 바 싸움을 화려하게 마무리해 봅시다.”

그때였다.

퍼어엉!

한 줄기 강렬한 폭음과 함께 음습한 기운이 허공을 감돌다 사라졌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군이 턱으로 가주전 북쪽을 가리켰다.

“자네는 먼저 가 보게. 아무래도 당가주에게도 마인이 붙은 것 같네. 인기척까지 지워 버리는 진법이라…… 심상치가 않아.”

“그럼 먼저 가겠소.”

파아아앙!

주작화기를 피워 올린 연호정이 단숨에 가주전 북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당관과 백면인이 싸우고 있는 그 장소, 그 진법이 있는 방향이었다.

모용군이 황석태에게 말했다.

“우리도 갈까?”

“그럽시다.”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데 도망은 안 가는군.”

“군소리 그만하고 움직입시다. 상황이 급하게 되었소.”

“하하하!”

그렇게 이 전투의 핵심이 되는 고수들이 제각기 마지막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전투의 핵심이 되어 가고 있는 한 청년 고수 역시도.

푸화아악!

“끄르르륵.”

“헉헉! 역시 너도 사람은 사람이었구나. 시발, 세상 독한 새끼.”

스르륵.

쓰러진 황면인을 내려다보던 강량은 일순 어지러움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허억! 허억!”

충혈된 눈으로 황면인을 보던 강량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이겼지, 내가?’

알 수 없었다. 이 전투에 극한으로 집중하던 와중, 기이한 힘이 그의 검법 투로를 이끌어 황면인의 몸을 양단했다.

가만히 검을 내려다보던 강량이 강하게 검을 쥐었다.

“후욱! 아직 멀었어. 형님에게 가야 해.”

강량이 비틀거리며 황면인의 시체를 지나쳤다.

잠시 후.

푸스스스스.

황면인의 시체가 옷과 가면만 남겨 두고 푹 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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