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문제의 중심 (2)
‘저곳이군.’
당형이 보는 곳에는 시커먼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실제 눈으로 보이는 어둠이 아니었다. 당형 정도의 고수가 아니면, 기의 분위기를 육안으로 형상화하여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면 그저 불안감만을 느낄 것이다.
끼아아아악!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저 어둠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귀신의 형상을 그려 냈다. 그 귀신이 마구 비명을 지르며 이 위대한 가문을 폐허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당형의 눈이 번뜩였다.
훅!
안광을 번뜩이는 것만으로도 스멀스멀 번져 나오는 기운이 주춤거린다.
거리가 얼마인데, 이곳에서 발하는 의지만으로 부자연스러운 진기의 발산을 억눌러 버린다. 존재감이니 기파니 말은 많지만, 당형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타인의 기운조차 의지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지고(至高)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공기가 텁텁하구나. 언제부터 본가의 공기가 이리도 갑갑했는가.”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숨길 수 없는 자책감이 묻어 나온다.
당형은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당가의 정예 흑풍대와 녹의대가 공손하게 따르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느껴진다.’
금제를 걸었던 독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활성화되며 그의 감각 또한 본래대로 돌려놓았다.
거처에서 나왔을 때보다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
당형은 이곳, 당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볼 수 있었다. 그저 분위기를 읽고 예측하는 것을 넘어, 몇 사람이 어디서 어떤 상태로 있는지까지도 보이는 것이다.
‘오랜만이군.’
세상 모든 것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이러한 감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십 년 가까이억눌렀던 내공을 개방하여 사지 끝까지 밀어 넣으니, 걸으면 걸을수록 근육에 탄력이 붙고 오감과 육감이 예민해졌다.
그런 당형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곳,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암운(暗雲)이 지척에 이르렀음을.
‘역시.’
무시하고 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을 막지 않으면 더 많은 가인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
당형이 가주전 쪽을 바라보았다.
쿠르릉.
대지가 진동하고,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팽창되기를 반복했다.
‘관이인가.’
막강한 힘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이한 진기가 부딪치고 있었다.
당형의 눈에 아련함이 맺혔다.
‘연성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거기까지.’
제왕독경.
그는 아들에게 이 독경을 전수했지만, 사이가 틀어진 이후로는 한 번도 풀어서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한데 어느새 아들은 이 극한의 무공을 한계에 도달토록 연성하고 있었다.
기특했다. 이 무공이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 무공인지를 알기 때문에 더더욱 기특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아들은 고금제일의 무공이라도 본인이 싫으면 쳐다도 안 볼 성격이었다.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고, 주관도 뚜렷했다.
그런 녀석이 제왕독경을 이만큼 익혔다는 것은, 적어도 자신을 향한 분노가 연을 끊을 만큼은 아니란 뜻이 아닐는지.
아련한 눈으로 가주전을 바라보던 당형의 눈이 재차 차가워졌다.
“나오거라.”
스르륵.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어느새 당형의 전면 십 장 거리에 한 명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형 역시 칠십이 넘은 나이였지만, 노인은 그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못해도 구십은 훌쩍 넘어 보이는 외양이었다. 허리도 굽었고, 눈에서도 진물이 줄줄 나왔다.
그러나 진물이 흐르는 눈두덩이 아래, 가늘게 보이는 눈빛만큼은 태양처럼 강렬했고 귀신보다도 섬뜩했다.
“클클, 오랜만이구나.”
당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죽지 않은 것이오?”
“사람은 늙어서도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해. 자극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래야 늙지를 않지.”
다 늙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만들어 낸 공부와 기술을 생각하면 함부로 넘길 말도 아니었다.
당형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게 웬걸?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던 때에, 이렇게 또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느냐.”
“…….”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렇지 않느냐?”
전대 가주이자 강호에서 가장 위대한 고수라 불리는 성천의 강자, 당형을 아랫사람 대하듯 말한다.
녹의대주가 버럭 소리쳤다.
“무엄하구나! 이 분이 뉘신 줄 아느냐!”
노인이 킬킬대며 말했다.
“알지. 잘 알고말고. 재능 하나 믿고 설쳐 대던, 이 늙은이의 싸가지 없는 조카가 아니더냐?”
“뭐, 뭐라고?!”
조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당형이 손을 들었다.
“흑풍과 녹의는 이십 장 밖으로 물러나도록.”
스르륵.
두 부대는 의아함을 표출하지 않았다. 명을 받은 그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과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때가 가득 낀 그의 손톱은 맹수의 발톱처럼 길고 두꺼웠다.
“강해졌을 거라 예상은 했다만, 역시나 상상을 넘어서는구나.”
노인의 얼굴에서 비틀린 미소가 사라졌다.
미소가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신중함이 가득했다.
“수습되지 않는 기운만으로도 뼈가 저릿저릿할 정도다. 재능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은 몰랐다.”
당형의 몸에서는 어떠한 기운도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절정고수는 그리 느낄 것이다.
하지만 진짜들이 보는 당형은 달랐다.
그의 전신에는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맴돌고 있었다. 그 힘의 편린은 기감으로도 느끼기 힘들다.
노인은 그 힘을 더듬었고, 그것만으로도 긴장했다.
당형이 말했다.
“당충호.”
노인, 당충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싸가지 없는 놈! 다 늙었다고 감히 숙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오늘부로 암총귀문이라는 조직은 당가에 없다.”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얌전히 목숨을 끊어라. 그게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이 미친놈이 나잇살 좀 먹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당충호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역정을 냈다.
“내가 왜 이곳에 온 줄 아느냐?! 네놈을 족치기 위해서다! 네놈이 유폐지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제 발로 기어 나온 이상 천 갈래로 찢어 죽일 것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수십 년 묵은 한이 절절히 묻어 나왔다.
“그뿐인 줄 아느냐?! 너를 죽이고 네 자식들도 죽일 것이다! 네놈이 낳은 핏줄이란 핏줄은 전부 도륙 내어 본가를 청소할 것이야! 네놈이 이룩한 업적, 영광 가득한 명성도 전부 지워 버릴 것이다!”
“…….”
“오직 그것만을 위해 죽어도 좋다! 이 늙은 목숨을 대가로 네놈을 파멸시킬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을 수 있느니라!”
소름이 끼치는 분노였다. 켜켜이 쌓인 한의 농도는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당형이 말했다.
“호아가 그리하라 시키더냐?”
“닥쳐라! 내가 네 자식새끼의 명령이나 받는 처지로 보이느냐?!”
“유폐지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족치지 않았을 거란 말로 들려서 말이다. 계약이든 명령이든 손자뻘 되는 녀석의 말에 휘둘리다니, 그 마지막이 참으로 초라하구나.”
“닥쳐라!”
당충호가 지팡이로 강하게 땅을 두들겼다.
쿠구구구구궁!!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대지가 붉게 물들었다.
땅을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진법이 발동되고 있었다. 신의 경지에 이른 진법이나 기관술로도 불가능한 영역, 아마 이 주변 전체에 귀문의 진법이 발동되도록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리라.
물론 당충호가 아닌 당호가 그리했을 것이다.
‘나를 막으려 했겠지.’
가문을 뒤집어엎으려는 둘째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면 역시나 자신일 것이다.
나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얻었으되, 만에 하나를 위해 이와 같은 준비를 해 놓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만큼은 철두철미한 녀석이었다.
‘즉, 나는 지금 숙부와 아들이 깔아 둔 함정 안에 있는 것이로군.’
당형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한 웃음 속에 피눈물이 흘렀다.
퍼석! 퍼석!
붉은 대지 아래서 수백 개의 손이 튀어나왔다.
당관이 본 시체의 손과는 뭔가가 달랐다. 그보다 왠지 더 컸고, 훨씬 더 생생했다. 살점이 부스러졌거나 관절이 뒤틀려 있는 등의 기괴한 모습도 없었다.
화르르르르륵!
저 멀리 우측에 보이는 거대한 산은 통째로 불타올랐고, 좌측의 냇가에는 피로 물들어 토막 난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수많은 건물이 폐가가 되었고, 수백 년을 그 자리에 땅을 박고 살았던 거목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현세에 지옥이 강림한 듯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지옥의 모습을 현실로 구현한 듯한 세상이었다.
당충호가 외쳤다.
“귀문의 한이니라! 기력이 쇠해 죽을 때까지 지옥의 망자들과 싸워 보거라!”
그때였다.
가볍게 뜨인 당형의 발이 힘차게 대지를 밟았다.
콰콰콰콰콰쾅!!
순간 붉은 땅이 엄청난 폭발과 함께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땅을 뚫고 올라오던 망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골격만 남은 폐가들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고,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산의 불길은 비라도 내리는 듯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
당충호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한 번으로는 안 되나? 제법이군. 아주 그럴듯한 물건을 만들었어.”
당형이 재차 발을 들었다.
그리고 힘차게 지면을 내리찍었다.
콰르르르릉! 퍼어어어어엉!
부서지고 박살 난 대지 곳곳에서 황금빛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실제 불기둥이 아니었다. 당형의 의념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이 진법을 뿌리부터 박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두 번을 버텨? 아주 괜찮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해.”
콰콰쾅! 콰앙!
세 번의 진각 뒤, 네 번의 진각이 이어졌다.
콰쾅! 콰르르르릉! 퍼어어엉!
“이, 이놈!!”
당충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진법의 주인인 그조차도 이 빠르고 폭발적인 파훼법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악을 질러 대며 진법 변형을 명령하고 있었지만, 숨어서 진을 부리는 기둥들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귀문의 귀신들이.
당형의 무차별 폭격과도 같은 발경술 앞에서, 수십 문의 화포도 파괴할 수 없다 자부했던 진법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콰아아아앙!
화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바뀌었다.
화아아아아악!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고, 붉게 물들었던 대지도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 당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하게 서서 당충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더 재미있는 물건은 없나?”
당충호는 저도 모르게 덜덜 떨었다.
지옥 같은 진법을 만들어 현실에 구현해 냈지만, 그조차도 당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 기술이,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하든 결국 당가의 공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체계일 뿐이었다.
당가의 공부 중 일부라도 이었다면, 무공이든 진법이든 모조리 파훼해 버릴 수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당관이야말로 당가 무공의 화신(化神)이라고.
그렇다면 당형은 어떠한가?
당형은 당가 공부의 전능자(全能者)였다. 무공이든 진법이든 기술이든 뭐든, 그 어떤 영역에서도 당형보다 우월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당형과 같은 자는 없다.
사천당가, 당씨 문중의 주인으로서 수백 년 역사의 모든 것을 체득한 괴물.
미래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또 한 명의 전능자가 나오길 고대하는,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실감하는 서글픈 절대자가 여기에 있었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만, 얼추 귀문의 늙다리들은 다 모인 것 같구나.”
“……?!”
“더 보여 줄 게 없다면, 여기서 승천들 하시게.”
당형이 손을 휘둘렀다.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사자소혼진으로 만든 인위적인 어둠이 아닌, 실제로 사위를 뒤덮는 독의 구름이 당충호와 그 뒤의 대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푸스스스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