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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605화 (604/963)

605화. 격돌 (5)

퍼억! 퍼억!

도끼질 한 번에 한 명씩 목숨을 잃는다.

화려하고 광범위한 무공은 없었다. 이전처럼 거대한 진기를 담아 충격파를 일으키거나 진각으로 지진을 일으키는 등, 상대의 허를 찌르는 방법도 쓰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적의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레 사각을 점하며 하나씩, 하나씩 수를 줄여 간다.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진기의 소모가 거의 없다시피 한 움직임, 특유의 빠르고 힘찬 보법 없이 상대의 무공에 맞춰 반응만 할 뿐이었다.

당사번의 눈이 커졌다.

당황하여 어, 어 하는 사이에 이름 모를 청년의 도끼질로 대원을 열다섯 명이나 잃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당사번이 버럭 외쳤다.

“모두 물러나서 하독하라! 상대는 당관이 아니야!”

홀린 듯 연호정을 상대하던 흑혈대원들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 상대는 당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부딪치는 순간 반사적으로 반격을 가하다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번쩍!

흑혈대가 물러나자 연호정이 당사번을 바라보았다.

당사번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네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본가를 건드린 이상…….”

“당가엔 위아래도 없더냐?”

“뭐라?!”

“감히 일개 대주 주제에 가주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당가 놈들은 기본예절도 안 배우는 거냐?”

당사번의 얼굴이 붉어졌다.

“닥쳐라! 외세에 가문을 팔아넘기려 한 희대의 망종에게 가주가 웬 말이란 말이냐?!”

연호정이 백룡부로 당사번을 가리켰다.

순간 당사번이 움찔했다. 그저 도끼를 겨눈 것뿐인데, 알 수 없는 압박감으로 등골이 서늘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사실도 아닐뿐더러,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한들 한낱 대주가 그따위로 설쳐서는 아니 될 일이지. 당가의 수뇌부들은 이런 일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건가? 일개 대주 놈의 주둥이에서 부도덕한 발언이 나오는 것도 막지 못할 만큼 무능력한 놈들이었나?”

“닥치지 못해!!”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얌전히 대기하고 있어라. 그럼 적어도 진실이 드러났을 때 최소한의 변호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화아악!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당사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상대의 살기에 오금이 다 저렸다.

주춤주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아차 하며 흑혈대를 바라보았다.

살아남은 흑혈대원들의 얼굴에 은근한 충격이 일었다. 적이 노려본다고 뒷걸음질을 치는 대주라니? 당가뿐 아니라 어떤 무림세가에서도 상상을 못 할 일이었다.

당사번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이 개 같은 놈이!”

“당가의 가주가 누구인지를, 진실이라는 이름 아래 가리려는 자리다.”

연호정이 버럭 소리쳤다.

“뭣도 아닌 놈은 얌전히 처박혀 있으란 말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강렬한 분노가 묻어 나왔다.

당사번이 외쳤다.

“흑혈대! 전원 흑혈오진(黑血五陣)을 펼쳐라! 놈을 반드시 죽여!”

흑혈대의 눈빛이 흔들렸다.

흑혈오진이란 곧 흑혈대 최후의 저항 진법이요, 최강의 살상진을 말한다. 수성에 특화된 부대인 그들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적과 무차별 섬멸전을 벌여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연호정은 흑혈오진에 대해 몰랐지만, 당사번의 표정과 대원들의 눈빛만 보고도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진법인지를 깨달았다.

“너희도 불쌍하구나.”

치리리링!

소매 속에서 흘러나온 교룡쇄가 흑과 백, 쌍룡의 도끼 끝 걸쇠에 묶였다.

“이래서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다. 아무 죄 없는 가주를 역도로 몬 진짜 반역자의 달콤한 혀에 굴복하여 권력의 노예가 되어 버린 주인이라.”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불쌍하지만, 더 이상은 동정하지 않겠다. 어차피 칼날 위를 걷는 인생들이니.”

“닥치지 못해! 흑혈대는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흑혈오진을 펼치지 않고!”

흑혈대는 여전히 주춤했다. 본능적으로 진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다소 산만한 움직임과 흔들리는 눈빛이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당관과 부딪쳤을 때부터, 당관과 당호의 대화를 들었을 때부터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저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런 와중에, 정작 당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름 모를 청년 고수의 말은 안 그래도 흔들리던 그들의 마음에 송곳을 꽂아 넣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연호정이 강하게 한 발을 내디뎠다.

콰앙!

백호군림보의 강인한 진각이 흑혈대원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싸우고자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물러나고 싶은 자들은 지금 물러나라.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싸우는 적들과는 칼날을 섞고 싶은 생각이 없어.”

당사번이 버럭버럭 외쳤다.

“이 새끼들이 대주 명령을 뭘로 아는 거야! 당장 저놈을 죽여라! 죽이라고!!”

그때, 흑혈대의 일 조장이 입을 열었다.

“대주님.”

일 조장은 흑혈대원 중 가장 강하고 철두철미하다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흔들리는 눈빛으로.

“잠시 대기를 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뭐라고?”

당사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이 빠진 얼굴로 일 조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너, 내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상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일 조장은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을, 어쩔 수 없이 꺼내고야 말았다.

“흑혈대의 존재 이유는 당가를 지키는 것입니다. 본대는 당가 최후의 방벽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싸워야 하는 부대입니다.”

“말 한번 잘했구나, 이 병신 같은 놈! 그걸 아는 놈이 내 말을 거역해?!”

“정말로 우리가 당가를 지키는 부대입니까?”

“……?!”

“이 년 전 새로운 가주님께서 등극하신 후, 흑혈대는 한 번 본 적도 없는 암기와 폭약을 다뤄야 했고 수비진이 아닌 섬멸진을 익혀야 했습니다.”

연혈비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혈비갑 자체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천하의 어떤 기계 장치보다 섬세하면서도 강철보다 단단하여 웬만한 고수의 검기에도 상하지 않는 물건이 연혈비갑이었다.

그런 비갑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화약을 집어넣은 것을 흑혈대원들에게 지급해 주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폭사하더라도 적을 막아야 하니까.

하지만 당사번은 당관을 죽이라고 연혈비갑을 꺼내 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가문의 마지막을 지키는 부대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적으로 맞이하는 당관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의 괴물이었지만, 애초에 그가 들고 온 기치는 진실을 가리자는 것이었다.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는 모른다. 흑혈대가 동원되어야 마땅할 일이긴 했다.

그러나 당사번의 명령은, 그리고 후방으로 도주한 당호의 모습은 흑혈대 전원에게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어쩌면, 혹시.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역도들의 손에 놀아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지만, 역도의 손에 놀아난 비겁한 부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일 조장이 모두를 대신하여 나선 이유였다.

“진실을 밝히자는 미명 아래 모두가 뜻을 맞추었다면, 역도로 추정되는 전대 가주 역시도 순순히 포박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병신 같은! 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의도인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내원에 발을 들이게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너, 도대체 지금껏 뭘 배운 것이야!”

일 조장은 지금껏 한 번도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를, 본인은 물론 흑혈대 전원이 의아하게 생각해 왔던 바를 말했다.

“정식적인 가주위가 없었습니다.”

“뭐라?!”

“당대 가주님께서는 정식으로 가주위를 넘겨받지 않으셨습니다. 시국이 뒤숭숭하다는 이유 아래, 모든 장로님을 뇌옥으로 보내고 누구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가주위에 올랐단 말입니다.”

“미친놈아! 그것은 기존의 장로들 역시 역도 놈과 똑같은……!”

그때,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당사번의 눈이 번뜩였다.

퍼어어엉!

허공을 격하고 쏘아진 권풍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속도부터 위력까지, 뭐 하나 흠잡을 것이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펑!

귀찮은 듯 대충 휘두르는 도끼질 한 방에 그 막강한 권풍은 그대로 소멸되었다. 권풍에 실린 독기 역시 주작화기로 인해 몽땅 불에 타 날아가 버렸다.

당사번의 얼굴이 벌게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저리 쉽게 막다니, 무공의 격차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지. 당가주께서 진정 가문과 사천을 팔아먹을 생각이었다면, 장로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이 그에 반발했어야 정상이다.”

“외인은 닥쳐라!”

“당관이라는 가주가 치세하던 중, 장로원의 장로들이 이유 없이 탄핵당하거나 은퇴한 경우가 있었던가?”

“……!”

순간 당사번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설마하니 당가주께서 가주위에 오르기도 전부터 가문과 사천을 외세에 팔아먹으려 마음먹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 생각에, 장로들 모두가 동의했다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닥치라고 했다! 그런 것은 알 바가 아니야! 그저 정황이 포착되었고 증거가 명백하다면, 마땅히 그에 따른 처벌을……!”

“전대 가주, 암왕 당형이라는 거물의 안목은 그 정도로 형편없는 것이었더냐? 제 자식이 가문을 팔아먹을 정도로 막 나가는 인사인 줄도 모르고 가주위를 넘겨주었다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도대체 이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

당사번의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아닌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당장 당관과 마주했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관이 날뛰기 시작했을 때 당사번은 좋아했다. 놈이 미쳐 날뛸수록 정당성은 떨어질 테니까.

한데 지금은 왜?

“이상하지? 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이 현실이?”

연호정이 흑룡부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럼 어디 저 사람들에게도 말해 봐라.”

콰아아아앙!

한 줄기 벼락과도 같은 검기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창격으로 거대한 벽이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져 내렸다.

지잉! 지잉!

무너진 벽 안쪽에서 시퍼런 전광과 불그스름한 신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사번의 눈이 커졌다. 흑혈대원들도 깜짝 놀랐다.

“역시 여기 있었구만.”

모용군과 황석태의 등장.

그리고 그들 뒤에, 비틀거리면서도 기어이 허리를 펴고 걸어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치리링! 치리리링!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양손과 양발을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은 잘라 버렸지만, 수갑과 족쇄는 여전히 차고 있었다. 왜 아직까지도 그것을 벗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네. 정말 엄청나더군. 당가주가 미리 몽혼약을 주지 않았다면 혼자서 최하층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을 거야.”

자존심 강한 모용군이 앓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만큼 귀옥 돌파는 어려웠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어려운 일을 성공시켰으니, 이제 귀옥에서 나온 분들 덕분에 진실로 포장된 거짓도 힘을 잃게 될 것이오.”

“여전히 달변이구만.”

“칭찬 감사하오.”

연호정이 당사번을 돌아보았다.

당사번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퍼렇게 질려 있었다.

“저분들에게도 말해 보거라. 네 말이 진짜라고, 모두가 반역을 저지른 역도들이라고 어디 한번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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