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격돌 (2)
“뒤로! 뒤로 물러나라!”
당관과 흑혈대의 충돌에 사방으로 독과 암기가 비산했다.
무사들만 있다면 모르되, 이곳에는 내공 한 줌 없는 하인과 일꾼들도 많았다. 호철각주 당숙헌은 서둘러 그들을 후방으로 이끌었다.
콰르릉!
폭음과 함께 싯누런 구름이 흩어지고, 산산이 조각난 살점들이 대지를 수놓았다.
당숙헌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나다!’
충돌의 여파만으로도 숨을 쉬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쪽으로 번지는 독기와 암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를 위해 사람들을 뒤로 물렸을 뿐, 당관과 흑혈대가 부딪치면서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에 휘말린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막아 주셨기 때문이다.’
퍼퍼퍼펑!
흑혈대가 형성한 진 곳곳에서 폭음이 터졌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흑혈대를 상대하는 당관이었다. 그의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의 발이 대지를 박찰 때마다 흑혈대가 형성한 진이 무너져 내렸다.
‘저 와중에 모두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다.’
당숙헌의 얼굴에 참담한 기색이 떠올랐다.
당관과 당호, 둘 중 누가 진실을 거머쥐고 있는지는 그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전투의 대처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는 당관이었다. 흑혈대는 이쪽에 사람이 있건 말건 모조리 쓸어 버리려 하고 있지만, 당관은 그 막강한 부대와 싸우면서도 전투와 관련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독과 암기, 충격파를 모조리 감당해 내고 있었다.
능력 이전에 마음의 문제였다. 저런 것은 보여 주기식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
당숙헌이 이를 악물었다.
질풍처럼 움직이며 흑혈대를 농락하는 당관. 그러나 제아무리 대단한 가주라도 당가 최정예라는 흑혈대를 상대로 멀쩡할 수는 없다.
퍼억!
당관의 신형이 덜컥거렸다. 흑혈대원의 장력이 어깨를 후려친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였다. 당관은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타격이 있든 없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주의 명령을 거부한 놈들에게 철저한 징계를 내리는 것이었다.
당관의 양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퍼어어어엉!
둔중한 폭음과 함께 흑혈대원 십여 명의 몸이 파괴되었다. 파괴된 그들의 신체는 어느새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헉!’
당숙헌은 당관의 저 무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천독수!’
당가천독수(唐家千毒手).
당가의 독공을 배우는 자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기본공이다. 그러나 수사포접공처럼, 대성에 이르기는 지극히 어려운 무공이었다.
당관은 그 천독수라는 무공으로 극한의 위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독공이란 발경의 파괴력보다 독기(毒氣) 그 자체로 상대를 살상하는 무공이다.
한데 당관의 천독수는 달랐다. 독기도 엄청났지만, 독기 못지않게 위력도 절륜했다. 손의 움직임과 독기의 확산력이 아니었다면 전혀 다른 무공이라 착각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다르다.’
피피피피핑! 퍼엉!
부딪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흑혈대의 절반이 쓰러져 버렸다.
독과 암기의 싸움이라서 그렇다. 순수 무력의 격돌이었다면 성천의 강자가 아닌 이상 저런 결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당숙헌이 침을 삼켰다.
‘무공의 구사 방법이 달라!’
수사포접공, 당가천독수, 적련장(赤蓮掌), 사공권(蛇孔拳), 독갈추수(毒蠍椎手).
하나같이 당가 무공의 근본을 이루는 기본공이었다. 포접공과 천독수를 제외하면, 그 어떤 무공도 대성하기 어렵지 않은 무공들이었다.
당관은 그런 무공들을 구사하며 당가 최정예 호위 부대라는 흑혈대를 철저하게 무너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위(神威)다.’
저 정도면 당가 무공의 화신(化神)이라 할 만하다. 공공대사가 소림의 동자승도 배우는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로 무림맹의 정예 부대를 박살 내도 이처럼 놀랍진 않을 것이다.
놀란 것은 당숙헌만이 아니었다.
‘미친!’
혼신의 힘을 다해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눈빛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당호는 당관이 보여 주는 엄청난 무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당관은 강하다. 그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기껏해야 자신보다 두세 수 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당관이 보여 주는 무공은 아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신법 아래, 당가의 기본공만으로 흑혈대를 박살 내는 당관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더 빠르고 강한 기본공을 적재적소에 써서 최정예 부대를 무너트리고 있다.
순간순간의 발경은 엄청났지만, 정작 내공 소모는 심하지 않은 듯했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만큼의 힘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였다고? 저놈이 이리도 강했단 말인가?!’
차이도 정도껏 나야 질투를 하는 법이었다.
당관은 당가 무공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독과 암기는 철저히 살법에 치중될 수밖에 없다는 상식을 송두리째 무너트리고 있었다.
당가의 무공을 무도(武道)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문득 당호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해 주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독과 암기는 치명적이다. 손에 쥐여 주기만 하면 어린애라도 고수 집단을 와해시킬 수 있지. 하지만 그것은 극의(極意)라고 볼 수 없다. 독과 암기 역시 무공이라면, 능히 도(道)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대가(大家)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야.’
당호의 눈이 점점 충혈되었다.
‘네깟 놈이 감히……!’
살법을 무예로, 무공을 무도로.
지금 당관이 보여 주는 모습은 실로 대가라는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호는 이루지 못한, 이룰 생각조차 못 한 극한의 경지였다. 무종지벽이니 무극지경이니 하는 것을 떠나, 독과 암기를 배운 자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대종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죽여야 한다.’
당호는 흑혈대주 당사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호철각주 당숙헌의 얼굴도.
당사번은 적을 상대하는 중임에도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당관이 보여 주는 예술적인 무공에 혼이 달아난 것이다.
당숙헌은 더하다. 당관을 보는 그의 눈은 감동과 감격으로 가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해!’
당숙헌이야 그럴 수 있어도, 당사번은 저래선 안 된다. 애초에 저런 사람도 아니었다.
적조차도 넋을 잃을 만큼 완성도 있는 당가의 무공을 구사하는 자.
생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나중 일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기회가 될 때 바로 죽여 버려야 할 것이다.
당호가 당사번에게 전음을 날렸다.
[뭣 하고 있는가!]
깜짝 놀란 당사번이 당호를 돌아보았다.
당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흑혈대가 무너져 가고 있잖은가! 죽일 기세로 싸워라!]
당사번의 눈이 흔들렸다.
죽일 기세로 싸워라?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다. 내가 죽게 생겼는데 상대를 배려할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당호가 전한 죽일 기세라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뜻을, 당사번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당사번이 외쳤다.
“전원 삼진(三陣)으로!”
파바바박!
제각기 당관을 노리며 독암을 뿌려 대던 흑혈대가 후방으로 쭉 물러났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뭔가 있군.’
벌써 흑혈대의 절반에 가까운 전력이 날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혈대원들의 눈빛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놀라움은 있을지언정 투지가 사그라들진 않은 것이다.
오직 명령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적을 상대하는 것.
그런 흑혈대가, 후방으로 물러나 삼각첨진(三角尖陣)을 형성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평생 그것만 배운 것처럼 신속하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뭐지?’
이 진형은 당관이 모르는 형태였다. 그가 가주로 있을 당시에는 저런 진법을 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위험!’
파아아앙!
당관이 측면으로 돌아가 흑혈대를 공략했다.
육감이 말하고 있었다. 놈들이 뭔가 위험한 수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라도 정면으로 감당키 힘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당사번이 재차 외쳤다.
“사계(四計) 폭진(爆陣)으로!”
퍼어어엉!
당사번이 쏘아 낸 무언가가 당관을 향해 날아갔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위력은 강하지 않지만, 범위가 넓고 빨랐다.
‘탈혼화망(奪魂火網).’
너비가 오 장에 달하는 반투명한 그물이 당관의 전면을 가득 채웠다.
거미줄처럼 얇아 범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물이다. 사금을 먹이고 화독과 분진을 묻힌 화망은 몸에 휘감기는 순간 살과 뼈를 파고들어 간다.
거기에 작은 불이라도 붙는 순간 초절정고수라도 분사하고 만다.
스륵!
당관의 손에 비수가 잡혔다.
‘탈혼화망까지 꺼내 들었단 말이지.’
흑혈대주에게 지급되지 않는 암기였다. 당호가 직접 건넨 모양이었다.
번쩍! 번쩍!
당관의 비수가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그었다.
촤아악!
탈혼화망이 찢어지며 당관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당관은 가만히 서서 화망이 자신을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
당관의 눈에 흑혈대 전원이 푸른 단약을 입에 넣고 붉은 철제 비갑을 손에 두르는 게 보였다.
손가락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장착되는 철제 비갑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으로, 비갑 곳곳이 튀어나와 있어 기괴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당관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혈비갑(鍊血臂鉀)?!”
당가 수백 년 역사가 집약된 극한의 사출 장치. 어지간한 감각으로는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지만, 애초에 미완성이었던 당가 기관 장치의 정점이다.
당사번이 몸을 뒤로 빼며 외쳤다.
“포격!”
콰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콰르릉! 쾅! 콰쾅!
흑혈대의 전방과 측방 쪽 대지가 모조리 박살 나며 일대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가의 비전 암기를 장착할 뿐이었던 연혈비갑에서 소형 화탄이 쏘아졌다. 비갑에 화탄을 장착한다는 발상도 대단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쏘아 낼 수 있는 물건을 만들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투두두둑!
전방과 양 측방에서 화탄을 쏘아 냈던 흑혈대원들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밀려났다.
뒤로 밀려난 이들을, 진의 안쪽에 있던 대원들이 온몸으로 받아 냈다. 고수인 흑혈대원들조차 폭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날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심지어 화탄을 쏜 흑혈대원들은 하나같이 팔이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뼈가 부러진 이들도 있었고, 아예 형태조차 온전치 못한 이들도 있었다.
당사번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졌다.
‘피하지 못했다.’
후방을 제외한 모든 방위로 쏘아진 화탄이다. 일대가 초토화되었고, 당관이 물러나지 못하는 것도 보았다.
화르르르륵!
당관을 덮치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진 화망에서 시퍼런 불꽃이 치솟았다. 탈혼화망에 불이 붙어 꺼지지 않는 겁화가 깨어난 것이다.
당사번이 외쳤다.
“교대!”
팔이 부러진 대원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안에서 받쳐 주던 대원들이 외부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치리리링! 퍼어엉!
불꽃과 연기를 헤집고 휘둘러진 거대한 쇠사슬이 전방의 흑혈대원 십여 명의 몸을 횡으로 찢어발겼다.
당사번은 경악했다.
“뭐, 뭐야?!”
촤르르르르륵!
쇠 비늘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흑회색 철쇄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후욱!
사방으로 번지던 불꽃이 철쇄가 쏘아진 곳으로 모여들었다.
화아아아악!
불꽃을 흡수해 화기의 농도를 키운다.
일순 엄청난 살기가 사위를 에워쌌다. 뿜어져 나오는 붉은 화기가 성문처럼 거대한 주작의 형상을 일으켰다.
“막 나가는군.”
치리링!
교룡쇄를 수거한 청년이 흑과 백, 두 자루의 도끼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화탄의 파괴력 앞에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몹시도 강렬했다.
“싸가지.”
후우우우웅!
당숙헌 일행의 앞에서 화탄의 충격파를 막아 낸 당관이 저 멀리 선 당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선수 교체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걱정 말고 여우나 잡으러 가십시오.”
파앙!
당관이 흑혈대를 우회하여 당호를 향해 짓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