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격돌 (1)
파지지직! 퍽! 퍽!
젖은 벽면을 타고 흘러간 뇌기는 삽시간에 무사들을 쓰러트렸다.
개중에는 즉사한 무사도 있었다. 하지만 모용군은 상관하지 않았다.
“후우.”
치이익!
모용군의 몸 곳곳에서 퍼런 연기가 치솟았다.
놀랍게도 꽤 많은 상처를 입은 그였다. 이곳 귀옥을 돌파하며 무수히 많은 진법을 깨부쉈고, 무수히 많은 무사의 공격을 받아 냈다.
그 와중에 얻은 부상이 상당했다. 심지어 독 따위의 이물감에 있어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뇌기까지 뚫고 중독 증상을 겪었을 정도였다.
‘과연 대단해.’
당가 최악의 뇌옥이라 해도 이 정도 상처를 입을 줄은 몰랐다.
무공이나 독암의 지독함도 대단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건 허를 찌르는 능력이었다.
이곳의 지형을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는 고수들은 침입자의 인지 능력을 뒤흔드는 법을 알았다. 그러지 않고 하나하나 보이는 족족 때려잡았다면 이만한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기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 대응 능력이라…… 제대로 된 군사가 당가의 병력을 지형지물의 이점을 살려 지휘한다면, 잘하면 성천도 잡겠군.’
모용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여기인가?’
지하 최하층으로 내려온 그였다. 층마다 뇌옥을 깨부쉈지만, 생각보다 죄수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위층까지의 죄수들은 이미 목숨이 간당간당했다. 말 그대로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정도다. 중원의 신의(神醫)들이 대거 투입된다 해도 한둘이나 살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반면 이곳은?
‘생기(生氣)가 느껴지는군.’
모용군이 철제문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쾅! 지이이잉!
손날이 그대로 철문을 뚫었다.
손톱이 깨질 듯 아파 왔다. 뇌정공의 힘을 둘렀는데도 고통이 느껴졌다. 두께는 물론 만듦새 자체가 대단했다.
모용군이 뚫어 낸 철문을 단단히 쥐곤 그대로 힘을 주었다.
콰드득!
철문이 통째로 뽑혀 나오며 내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누구냐.”
독방 안에는 한 초로인이 앉아 있었다.
양팔과 양발이 쇠사슬에 묶였다. 어지간한 거지들도 양반으로 보일 만큼 추레한 몰골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파로군. 귀옥이 뚫린 겐가?”
“…….”
“어처구니가 없구먼. 당호, 그 개자식이 얼마나 귀옥 관리에 소홀했길래 적이 여기까지 침투하는 걸 보고만 있는 것인가.”
당가의 전력이 증발한 게 아닌 이상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말투였다.
모용군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오?”
초로인이 답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당숙총.”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에 체념의 감정이 묻어 나온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비천독선(飛天毒仙).’
당숙총은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당대 당가에서도 독공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강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유명한 것은, 당숙총이라는 인물이 방계 출신임에도 제일장로의 직을 맡았다는 사실이었다.
제일장로는 장로원주 바로 밑의 서열로, 당가 최고 수뇌부 중 하나였다. 아니, 애초에 장로원 자체가 당가 내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였다.
지금껏 방계 출신이 장로직에 오른 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주를 제외한 책임장로의 자리에 오른 자는 당숙총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당관의 인선에 차별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갈이를 했다고는 하나 이런 사람까지…….’
언뜻 보아도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전을 봉쇄한 것인지 부순 것인지 모호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생기가 대단했다. 저 연배에도 이만한 생명력이라면, 이 지경이 되기 전에는 대단했을 것이다.
당숙총이 말했다.
“당호, 그놈이 가주 자리를 강탈한 이상 머지않아 본가도 끝장이 날 거라고는 생각했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으로 무너진 가문을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
“구하러 왔소.”
“……뭐라?”
“나, 모용가주요.”
깜짝 놀란 당숙총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파지직!
상처와 핏자국이 가득해 제법 험한 몰골이지만, 제멋대로 튀는 뇌기를 두른 모용군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당숙총의 눈이 흔들렸다.
“모용가주가 여기는 어찌……?”
“급조하기는 했지만, 무림맹 특작 부대와 함께 당가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왔소.”
“……?!”
“특작 부대에는 당관, 당가주도 포함되어 있소.”
당숙총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가주님, 가주님께서 직접 오셨다고?”
모용군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그렇소.”
“하늘이 본가를 버리지 않았구나! 그래, 가주님께서 오셨단 말이지?!”
당숙총의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당관을 향한 장로들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문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당관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두 눈에 희망이 어린다.
‘의외로군.’
지금은 달라졌다지만, 처음 무림맹에서 만난 당관은 사천에 공포를 드리운 군주라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어쨌건, 실제 가문에서의 당관은 누구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기야, 전대 가주가 암왕이니.’
암왕의 인정을 받고 가주가 된 남자다. 무공만이 아니라 통치 전반에 있어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다.
모용군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오시오. 귀옥의 병력과 진법은 전부 해결했소. 이곳에 갇힌 모두를 풀어 줄 것이오.”
그때였다.
콰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귀옥이 흔들렸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숙총이 말했다.
“귀옥의 진법은 부숴도 재생성되오.”
“뭐라?”
“단순한 진법이 아니외다. 뚫고 내려올 수는 있어도 다시 올라가기는 힘들 것이오.”
“……멋들어지는군.”
부서진 진법이 알아서 저절로 수복되다니, 그런 것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모용군은 설명을 바라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걸 들을 때가 아니었다.
재빨리 다른 철문들을 부수려던 모용군은,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물었다.
“진법이 다시 수복되는데 이런 요란한 굉음이 난단 말이오?”
콰아앙!
또다시 귀옥이 흔들렸다.
당숙총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아마 누가 다시 진법을 부수는 모양…….”
콰콰쾅!
앞선 것들보다 훨씬 요란한 폭음과 함께 누군가가 귀옥 최하층으로 내려섰다.
“후우, 빌어먹을 뇌옥이로군.”
우우우우웅!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붉은색 장창을 들고 있었다.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사내는 바로 황석태였다.
“자네가 어찌?”
황석태가 어깨를 털며 말했다.
“연 부관을 따라가다가 이곳에서 살기가 느껴지길래 와 봤소. 그 양반이야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할 인간이니까.”
중간에 가던 길을 확 틀어 버렸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작전이라는 틀에서 보면, 황석태의 행동은 그냥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인 연호정이 별도의 명을 내리지 않은 이상 상황을 보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은 전투원의 역량이다.
황석태는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이곳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실로 옳았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겠지.”
모용군이 씨익 웃었다.
“올라가면서 다시 부숴야 할 걸세. 잘 왔어. 따로 명령을 주고받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구만.”
* * *
당사번이 외쳤다.
“독성(毒城)!”
촤아아아아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혈대 전원이 암기를 흩뿌렸다.
한 명당 열 발의 암기, 총 이천 발의 암기가 허공을 수놓았다. 열댓 명의 포위라면 모를까, 이백 명이 동시에 위치를 선점하여 흩뿌리는 암기의 망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호에게 달려들던 당관이 그 자리에 멈춰서 진각을 밟았다.
콰아앙!
달리던 속도를 생각하면 약간의 반동도 없이 멈춘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대단한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치리리리리리링!
암기의 망이 당관의 주위를 성벽처럼 에워싼 와중, 열 명은 넉넉히 들어갈 공간이 확보되었다.
쏟아지는 암기 중 일 할이 그의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다. 그 많은 암기를 수거했는데도 장포 안은 처음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당호의 눈이 번뜩였다.
‘수사포접공(收死捕蝶功)?!’
죽음을 수거하고 나비를 포박한다.
거창한 이름이지만, 당문의 암기술을 배우는 자들은 기본으로 익히는 무공이었다. 허공에서 암기를 회수하기 위한 무공으로, 입문은 쉽지만 대성은 어려웠다.
그 무공이 숨 쉬듯 자연스레 펼쳐지고 있었다. 하물며 손 한 번 휘두른 게 전부였다. 본 적도 없는 경지였다.
후우욱!
하지만 흑혈독성(黑血毒城)의 진짜 힘은 암기가 아니었다.
쿠르릉.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먹구름이 깔린 듯했다.
암기로 진입을 차단하고, 대원들의 독기를 진법으로 결집시켜 거대한 극독의 성벽을 만든다. 그것이 바로 흑혈독성진이었다.
치이이이익!
진녹색으로 물든 당관의 눈에서 반투명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야말로 악마나 다를 바 없는 외양이었다. 제왕독공이 극한까지 개방되고 있었다.
당관의 가슴이 삽시간에 부풀었다.
“갈(喝)!!”
화아아아아악!
무시무시한 일갈에 암녹색 먹구름 곳곳이 뻥뻥 뚫렸다.
당사번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말도 안 돼!’
흑혈독성진을 이루는 극독은 그 종류만 일곱 가지다. 그리고 그 일곱 극독의 종류는 진법을 펼칠 때마다 바뀐다.
독인의 경지에서도 극한에 다다른 고수라 할지라도, 일곱 가지의 극독을 순식간에 해독하여 무산시킬 수는 없다. 받아들이는 것? 당연히 안 된다. 독인이라도 목숨이 위험하다.
한데 당관은 더 말이 안 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작 소리 한 번 질러서 흑혈독성 곳곳에 구멍을 내다니,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었다.
“감히 내 앞에서!”
화아아아악!
양손으로 원을 그리는 당관, 어느새 그의 명치 앞에 일렁이는 녹색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따위 엉성한 독술을 들이대느냐!!”
퍼어어어엉!
녹색 구슬이 폭발하며 싯누런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가 방어가 뚫린 흑혈독성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퍽! 퍼버버벅! 퍽!
곳곳에 구멍이 뚫린 흑혈독성의 먹구름이 빠르게 흩어졌다.
당사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진법의 파훼다. 저 녹색 구슬이 무엇이기에 터트려 주입하는 것만으로 이 거대한 독기의 구름이 와해된단 말인가?
번쩍!
당관의 신형이 사라졌다.
훅!
사라졌다 싶은 순간 그는 다시 흑혈대의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흩어지지 않은 먹구름을 뚫고 움직였다. 당관조차 침투하는 독을 다 막진 못했는지, 의복 곳곳에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는 없었다. 흑혈대를 내려다보는 당관의 얼굴에, 지금껏 보여 주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 분명 말했을 것이다. 개입하는 자는 모조리 죽일 것이라고!”
우우웅!
당관의 오른손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당사번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피해라!”
당관의 오른손이 벼락과도 같은 섬광을 뿜었다.
콰르릉!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며 흑혈대가 형성한 진이 뿌리부터 뒤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