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명명백백 (5)
“가주님!”
“안다.”
당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장로원주는 어디 있느냐?”
“현재…… 위치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욕이 울컥 쏟아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당호는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흑풍과 녹의는?”
“외원에서 다시 내원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목표물이 외원의 호위대를 뚫고 내원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
“그 외 가용 병력의 위치와 현황은 현재 파악 중…….”
콰앙!
집무실 바닥이 쫙 갈라졌다. 당호의 신경질적인 진각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가.”
분노를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
“이 가문에 얼마나 많은 고수와 부대가 있는데, 그들의 위치와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는가!”
“죄, 죄송합니다!”
실제로 현재 당가에는 모든 병력이 주둔해 있지도 않았다.
사천 전역에 그 영향력을 흩뿌리는 세력이다. 보유 전력의 삼 할, 혹은 오 할 이상은 항상 지역을 돌며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말하자면 만전의 상태는 아니다. 어지간한 성보다도 넓은 가문의 곳곳에는 휑하니 빈 곳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절반 이하의 병력이라면 그 이동로와 숫자를 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어야만 했다.
말이 절반이지, 어지간한 중소 문파 네다섯 개쯤은 거뜬히 상대할 만한 전력이었다. 부대만 해도 그러하며, 실질적인 고수진까지 투입하면 진정 구대문파급 전력과도 비벼 볼 수 있다. 독과 암기의 특성 덕분이다.
그 모든 전력이, 정보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다.
당호는 분노했고, 동시에 당황했다.
백면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간 당관을 보면서도 느끼는 게 없었나 보군. 자네는 이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휘하 사람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줄 줄 알았나?’
당관, 당관.
도대체 당관은 뭘 어떻게 했기에? 당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당호 역시 이가주로서 가문의 운영에 제법 능숙했다. 십오 년 전부터는 외부에 신경을 쓰느라 가내 업무에 온전히 집중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가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 차이가 이렇게 크다고?’
말도 안 된다. 인정할 수 없었다.
당관을 증오했지만, 그의 능력은 인정했다. 그리고 옆에서 몰래 독니를 갈면서도, 그의 행정 능력과 통치력을 지켜봐 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십 년을 넘게 봐 온 사람이라면 상대의 능력 중 십분지 일은 터득할 수 있다. 실제로 당호는 자신이 당관보다 더 낫다고는 못할지언정 크게 뒤떨어진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당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자괴감에 휩싸여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헤쳐 나가야만 했다.
“당관은 어디쯤 왔느냐?”
“현재 가주실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렇군.”
어쩔 수 없지.
놈이 신성한 가주실 앞까지 도달케 할 수는 없다.
당호는 벽에 걸린 장포를 내려 소매에 팔을 넣었다.
“기어이 얼굴을 보고 싶다는데, 그 정도 소원은 들어줘야겠지.”
후우웅.
바람이 불었다.
습하디습하던 사천의 바람이 상당히 건조해졌다. 대신 뜨거웠다.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화기가 일대의 습기를 날렸으되, 온도는 상승시킨 것이다.
저벅저벅.
바뀐 공기를 민감하게 느끼며, 당관은 가주실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그의 뒤에는 삼백을 넘어 사백에 가까운 인원이 따라붙고 있었다.
‘대체.’
무심한 얼굴로 걸어 나가면서도, 당관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문이 왜 이리 비어 있지?’
부대 병력이 빠져서 비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당관이 의아한 것은, 방계 출신의 고수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직계와 방계를 나누는 구분은 지역마다, 가문마다 다른 법이다.
하지만 어느 지역이나 직계보다 방계의 수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가의 무력 절반을 방계의 고수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남은 절반 중 삼 할이 당가주의 힘이다.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가주 외 직계의 힘은 이 할 남짓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대체 어디로 보내 버린 것이냐?’
스륵.
당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당숙헌.”
“……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외원의 병기 물자를 담당하는 호철각(狐鐵閣)의 각주 당숙헌이었다.
당관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계들이 어찌 이리 보이지 않는 것인가?”
“내원의 방계는…….”
당숙헌이 한숨을 쉬었다.
“일 년 전 대대적으로 쫓겨났습니다.”
“……뭐라?”
방계가 쫓겨나다니? 대체 왜?
“새 가주……께서는 이곳이 당씨본가(唐氏本家)이니만큼, 오직 직계만이 지내야 할 공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력을 제외한 방계 출신이 사천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중 대부분이 서쪽과 북쪽의 지부로 가거나, 새 장원을 만들어 살림을 꾸려 가고 있다 들었습니다.”
당관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당숙헌이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제 일을 후임에게 물려주면 조만간 나가야 합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당관은 당호의 상식을 벗어난 정책에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독과 암기, 두 비전은 절대 대외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나아가 방계들은 그 자체로 당가의 전력이며, 결과적으로 직계를 보호해 주는 이들이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생각이 없으면 그런 이들을 모조리 쫓아냈단 말인가? 당호의 눈에는 직계만 보이고 방계는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어쩌면.’
당관이 눈을 감았다.
‘그래, 진즉 알았어야 했다.’
당호는 무려 십여 년 전부터 가문 밖에서 정예 무사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에게, 절대 유출되어서는 안 될 당가의 무공까지 가르쳤다.
이미 당호는 당씨 문중의 가법이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다. 생판 모르는 놈들에게도 가문의 비기를 가르친 놈이거늘 방계를 쫓아낸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일까.
‘설마.’
그 행위 자체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다.
불안한 것은, 당호가 정녕 이곳을 직계의 터전으로만 만들 생각이었냐는 것이다.
‘네놈, 외세의 병력을 이곳에 주둔시키려는 속셈은 아니었겠지.’
순간 당관은 외원에서 만났던 무사의 말을 떠올렸다.
‘삿된 말로 우리를 혼란케 하지 마시오! 당신이 본가를 배신하고 외세에 빌붙어 사천을 넘기려 함을 알고 있소!’
외세에 빌붙어 사천을 넘긴다.
그것은 곧 당호가 한 짓이었다. 실제로 사천까지 넘기려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외세를 끌어들여 낙원소를 만들고 당가의 실권을 쥐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음은 분명했다.
“……가자.”
무심했던 당관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더 이상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이다.
진실을 가리러 가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당씨 문중이 수백 년간 지켜 온 혼(魂)이었다.
우우우우웅.
나아가는 발걸음은 여전했으되, 당관의 체내를 휘도는 제왕독공(帝王毒功)은 시시각각 날이 서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이빨을 드러내는 진기다. 당관의 심경이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당관은 억눌렀다. 자신의 진기를, 그리고 마음을.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마침내, 가주실로 향하는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뚜벅뚜벅 걸어간 당관이 문에 손을 대었다.
콰앙!
폭음과 함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멈추시오!”
동시에 문 너머에 있던 중년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중년 사내 좌우로 이백여 명이나 되는 고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적갈단보다도, 호성조보다도 삼엄한 기세였다. 실제로 그들만큼, 아니 그들 이상으로 강하고 까다로운 부대의 등장이었다.
흑혈대(黑血隊)였다.
내원 호위 본부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타격대가 아닌 호위대이니만큼 흑풍대나 녹의대와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다.
그러나 적어도 호위와 수성전에 있어서만큼은 당가를 넘어 청성과 아미의 고수들보다도 뛰어난 이들이 흑혈대였다.
그리고 그 흑혈대의 선두, 위풍당당하게 서서 당관을 바라보는 중년 사내가 바로 흑혈대주였다.
“당사번.”
흑혈대주 당사번.
스르르르.
당관의 몸에서, 억누르고 또 억눌렀던 살기가 기어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놈마저 당호에게 넘어간 것이냐?”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실어 뱉은 목소리에 감당키 힘든 분노가 서려 있다.
“닥치시오.”
당사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했다.
“외인을 끌어들여 본가의 위엄을 훼손한 것만으로도 백번 죽어 마땅할 대죄인 바. 외세와 손을 잡고 본가와 사천을 팔아먹으려던 역도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어조였다.
“당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어떤 감언이설을 늘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오. 그나마 전대 가주였던 자의 명예를 생각해 존대라도 해 주는 줄 아시오!”
꾸짖는 듯한 말투였다.
그에 당관은 직감했다. 당사번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함께했느냐?”
“…….”
“네놈은 당호와 시작부터 함께한 놈이로구나.”
당사번이 턱을 치켜들었다.
“대죄인을 몰아내는 반정(反正)의 시기를 말하는 거라면, 물론 함께하였소.”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가만히 당사번을 보던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내, 휘하 사람들에게 믿음은 주지 못했을망정 능력에 따른 인선 배치만큼은 자신이 있었거늘, 이렇게 또 오점을 남기고야 마는구나.”
“당신의 인선은 훌륭했소.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본가를 팔아먹으려는 당신의 무도한 짓거리에…….”
“닥치지 못할까!”
쩌어어어어어엉!
느닷없이 폭발하는 당관의 목소리는 내원을 넘어 외원 전체를 진동시킬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화아아아아악!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살기도 더 이상 억누르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분노, 폭발하는 살기가 당사번을 위시한 흑혈대를 그대로 집어삼킬 듯했다.
당사번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르르르르르!
당관의 몸에서 진녹색 기파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구쳤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수일, 아니 수십 일을 참고 참았던 감정을 고스란히 터트리니, 그간 성장한 내력과 맞물려 가히 절대적인 기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주르륵.
당사번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거리가 이렇게나 떨어졌는데도 흔들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기파가 폭포수와 같다. 기파만으로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차라리 실권을 잡고 싶었다고, 네 욕심을 이기지 못해 반역을 저질렀다고 당당하게 외쳐라! 당씨 문중의 사람이 언제부터 그따위 모략질을 배워 진실을 거짓으로 포장하였더냐! 네놈이 정녕 당가 사람이 맞단 말이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당사번과 흑혈대원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소리 자체가 음공과 같다. 내력으로 귀를 보호했지만, 시야가 흔들리고 속이 거북해질 지경이었다.
엄청난 내공이었다. 이곳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막강한 내력이었다.
빠르게 시야를 바로잡은 당사번이 외쳤다.
“그 무공! 가문을 외세에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놈들의 무공까지 배웠단 말인가! 본가에 그처럼 기괴한 무공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가관이었다. 분노에 정신이 다 아찔해지는 와중에도 당관은 아연실색했다.
당사번이 악을 질렀다.
“당신은 위대한 당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다! 널 따라온 멍청한 놈들은 네 감언이설에 속았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렇지 않아! 당장 무릎을 꿇고 오라를 받……!”
그때였다.
“진정하게.”
저 멀리 가주실 쪽에서, 화려한 장포를 두른 사내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진정하게나, 흑혈대주. 희대의 죄인이라도 본가의 가주였던 사람일세. 좋게 끝낼 수 있다면, 최대한 좋게 마무리 짓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겠는가?”
번쩍!
당관의 눈이 파멸의 안광을 뿜었다.
“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