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명명백백 (4)
후우우웅.
한 줄기 바람이 강량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스르륵.
동시에 복부가 뚫린 강량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파아아악!
매서운 검기가 황면인의 몸을 노리며 사선으로 짓쳐 들었다.
황면인이 부드럽게 몸을 날렸다.
파악!
지상에 길쭉한 검흔이 났다.
찰나지간 뿜어낸 검력이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피하지 않았다면 황면인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검기를 피한 황면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후욱!”
그곳에 숨을 몰아쉬는 강량이 있었다.
놀랍게도 강량의 복부는 멀쩡했다. 황면인의 칼날을 기어이 피해 낸 것이었다.
‘위험했다.’
칼날은 피했으나, 강량의 안색은 창백했다.
귀영신보, 분광귀영(分光鬼影)의 수법이었다. 대량의 내공을 소모하여 순간적으로 이형환위에 가까운 움직임을 선보이게 해 주는 극상승의 초식이었다.
이전에 양천에게 받은 영단을 녹인 연호정은, 자신이 소화해 봤자 별 의미가 없는 내력을 강량에게 넘겨주었다.
즉 강량의 내공은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많은 내공을 갖고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내공은 많지만, 순간의 출력을 퍼붓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진짜 죽을 뻔했어.’
강량의 눈이 황면인의 오른팔로 향했다.
피풍의에 가려진 팔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등 위에 세 줄기 시퍼런 칼날이 삐죽 솟아 있었다.
갈고리처럼 뻗은 칼날이지만, 안으로 굽지 않고 빳빳하게 날이 서 있었다. 세 자루 칼날을 짐승의 발톱처럼 형상화하여 만든 삼인철조(三刃鐵爪)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흑도 무림에는 별의별 특이한 무기를 독문병기로 쓰는 자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저런 갈고리 손톱을 쓰는 놈들도 꽤 있었다.
문제는, 강량이 봐 온 이들 중 황면인처럼 대단한 고수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강량이 검을 세우며 말했다.
“치사한 거야, 그거.”
“…….”
“강한 놈이 암습까지 하다니,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냐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그거야 강량도 잘 알았다.
단지 어처구니없어하는 반응이라도 돌아올 줄 알았는데, 여전히 황면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초승달처럼 휘어진 한 쌍의 구멍을 통해 강량을 주시할 뿐이었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가면의 눈 구멍을 통해 보이는 황면인의 눈은, 그야말로 무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렵겠어.’
파아아아악!
황면인이 움직였다.
강량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으로 빤히 보고 있는데도 대체 어떻게 움직인 건지 파악이 안 될 정도로 기괴한 신법이었다.
파앙!
강량의 다리가 탄력적으로 움직이며 그의 육신을 사선 앞으로 이동시켰다.
철검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졌다.
쩌저저저저정!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지만,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병기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훌륭한 난격술(亂擊術)이었다.
그러나 강량의 검술은 황면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한 손의 삼인철조를 기쾌하게 휘둘러 모든 난격술을 쳐 내는데, 그 움직임이 신법만큼이나 현란하고 기괴했다.
파아아악!
강량이 황면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낫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번쩍!
사선으로 올려 치는 귀살검에 황면인이 뒤로 물러났다.
충돌을 피했다.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파바박!
기괴한 움직임에 놀랐지만, 경신술의 수준을 논하자면 귀영신보는 가히 천하제일을 넘보기에 부족함이 없는바.
절묘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힌 강량이 귀살검, 귀마신참(鬼魔迅斬)의 초식을 연거푸 풀어 냈다.
번쩍! 번쩍! 번쩍!
뿜어져 나온 참격은 세 개지만, 허공을 밝히는 검광은 하나처럼 보인다. 놀랍도록 빠른 검격이었다.
쉬익!
황면인의 피풍의 끝자락이 잘려 나갔다.
피육이 베이진 않았지만, 드디어 상대의 영역 안으로 참격을 비집어 넣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강량의 두 다리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파파파파팡!
황면인의 움직임이 안개와 같다면, 강량의 움직임은 귀신과 같았다.
황면인의 무공이 부드럽고 음험하다면, 강량의 무공은 빠르고 막강했다.
콰아앙!
팔방을 찍어 가며 좌측방 사각을 읽은 강량이 귀영검(鬼影劍)을 펼쳤다.
적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버리는 귀살검에서 기본공인 귀영검으로 전환한다.
위력이 더 낮은 검결인데, 방위와 시간 차가 절묘하여 귀살검 이상의 위협이 되었다. 황면인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다급해졌다.
파아앙! 서걱! 쩌어어엉!
공기를 찢고 나아가는 소리, 무언가가 베이는 소리, 병기와 병기가 부딪치며 나는 충돌음이 거의 동시에 들렸다.
무섭도록 빠른 공방이었다. 황면인은 연신 뒤로 물러났고, 강량은 그런 황면인을 집요하게 쫓으며 검을 휘둘렀다.
이것이 바로 귀검(鬼劍)이었다.
한번 흐름을 잡으면 끊어질 때까지 몰아붙여 기어이 적을 죽여 놓는 살검(殺劍)이었다. 시전자의 깨달음이나 무도 이전에, 귀검식 자체의 특성 중 하나였다.
‘됐어.’
강량의 형형한 안광은 끝까지 황면인의 눈을 쫓았다.
‘흐름이 나쁘지 않…….’
쩌어어어어엉!!
빌어먹을!
욕설을 뱉으려 했지만, 정작 욕이 아니라 핏물이 튀어나왔다. 기세를 더하며 황면인을 몰아붙였던 강량의 몸이 순식간에 오 장 밖으로 튕겨 나갔다.
치이이이익.
황면인의 삼인철조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서운 위력이었다.
더 이상 물러나는 건 자존심이 상한 걸까. 한순간의 빈틈을 읽고 후려치는 일격에, 지금껏 보지 못한 막강한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위험한 놈이구나.”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황면인의 가면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젊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배가 무척이나 젊었다. 못해도 패율 정도의 나이는 될 줄 알았는데!
“빈틈을 노리려고 받아 주고 있었는데, 더 받아 냈다가는 낭패를 겪었겠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강량의 귀검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위력을 더해 가는 살검이었다. 경지의 차이는 분명했지만, 귀영검과 귀살검을 넘어 귀신검까지 뽑혀 나왔다면 황면인도 멀쩡할 순 없었을 것이다.
강량이 허리를 세웠다.
“말 못하는 벙어리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제법 주절거릴 줄 알잖아?”
“…….”
“말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대체 너희는 뭐냐?”
파아악!
문답무용이랄까.
대답 없이 돌진하는 황면인의 신법은 이전보다 한층 더 빨랐다.
강량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다.
쩌저저정! 찌이이익!
사격(四擊)까지는 막았지만, 오격은 막지 못했다. 강량의 가슴팍에 세 줄기 상처가 깊게 새겨졌다.
퍼어어억!
순간 황면인은 주춤했다. 단숨에 목을 날리려 했는데, 하단에서 올라온 각법이 팔목을 쳐서 궤도를 바꿔 버린 것이다.
이번만큼은 황면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세나 예기를 보면 순수 검사가 분명한데, 순간적으로 대응한 각법에서 경지에 이른 실전 박투술의 향기가 났던 것이다.
“시벌, 쪽도 못 쓰고 죽을 뻔했네. 그게 네 진짜 실력이라 이거지?”
강량이 자세를 낮추었다.
긴장한 얼굴,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강자를 눈앞에 둔 열혈 투사의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내 오늘 너 하나는 잡고 형님한테 갈란다!”
* * *
퍼어어억!
포탄처럼 날아와 꽂힌 각법에 당종헌의 입이 떡 벌어졌다.
파악!
당종헌의 멱살을 잡아 올린 연호정이 그의 가슴팍에 일장(一掌)을 날렸다.
펑!
비명도 없었다. 코와 입으로 피를 쏟아 낸 당종헌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의식을 잃었는지 몸뚱이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죽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시진 내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다.
‘자, 이제.’
연호정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당종헌을 상대했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이런저런 암기와 화기를 갖고 공격해 왔지만, 연호정의 주작화기에 독과 화기는 통하지 않았고 암기는 아예 맞추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짧은 전투를 치르는 새 꽤 많은 고수가 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법이군.’
놀라운 대응 능력이었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도, 알아서들 사태에 대처한다. 분명한 명령이 떨어졌다면 모를까, 내원에 침투하여 사방에 불길을 일으키는 괴한을 용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아니, 입을 열려 했다.
“……?!”
그제야 연호정은 깨달았다.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잘 갈무리된 기운 하나가 내원 안쪽으로 들어왔음을.
‘가주님.’
제아무리 흥분했다 한들, 난장을 치며 싸웠다면 진즉 당관의 진입을 눈치챘을 것이다.
당관은 싸우지 않고 내원까지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본인만이 아는 길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 자체가 내원과 대문을 잇는 길목 사이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기어이 들어오셨군.’
당관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리는 없다. 즉, 당관은 충분한 병력을 뽑아냈고 이 정도면 되었다 싶어 여기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병력의 분산, 무혈입성에 가까운 등장.
거기에 가지각색의 인기척들이 당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양반 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사신기 전체를 활성화해 주변을 읽었다.
연호정은 확신했다.
“참 많이도 바뀌셨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잡아 죽일 줄 알았더니, 누가 진짜인지 당당하게 논해 보자 이건가.”
이곳으로 오면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던 당관이다.
그런 당관이, 눈이 뒤집혀 분노를 토해 내지 않고 온건하고도 올바른 방법으로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제기랄, 반역자부터 사로잡고 죄상을 낱낱이 밝히려 했더니.’
당관이 저렇게 나온 이상, 연호정 역시 지금까지의 화려한 난장을 계속 이어 갈 필요가 없다.
파아악!
어느새 다가온 패율이 연호정의 옆에 섰다.
“뭐냐? 당가 전체를 불태워 버릴 것처럼 모닥불을 활활 피워 놓고는.”
심지어 화기에 살기까지 묻어 나왔더랬다. 패율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여기로 날아온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어서요. 그나저나…….”
연호정이 패율을 힐끔거렸다.
“괜찮으십니까?”
패율이 몸을 툭툭 털었다.
치리링.
몸 여기저기 암기가 박혀 있었다. 위험한 암기들은 전부 쳐 낸 모양이지만, 그래도 살갗을 찢고 박힌 암기에 출혈량이 상당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별거 맞는 것 같은데요.”
“침 바르면 나아. 그나저나 철기단장은?”
“쫓아오고 있습니다. 길은 시원하게 닦아 놨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그렇구만.”
“남 걱정 말고 선배 몸이나 챙기십시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푸르딩딩합니다. 중독되셨어요.”
패율이 이를 갈았다.
“이번 일 끝나고 당가주한테 한소리 좀 하련다. 반 시진? 웃기고 있네. 약효가 다 되기 전에 뚫고 온다고 무리했더니, 온몸의 관절이 다 삐걱거릴 지경이다.”
“여하간,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까?”
“주둥이 나불대는 거 보면 모르겠냐? 이 정도로 쓰러질 몸뚱이였으면 이십 년 전에 뒈졌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나가 보도록 하지요.”
“뭐?”
연호정의 두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차아아앙!
시원하게 뽑혀 나온 흑백쌍룡부가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영롱한 자태를 드러냈다.
연호정이 외쳤다.
“모두 길을 비켜라! 나는 무림맹 유군 부대의 대수이자, 묵룡부의 특임 부관으로 임명된 벽산연가의 연호정이다!”
당가인들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당대 무림, 연호정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어도 칼밥 먹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 벽산호장의 명성은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별호였다.
“당가의 반역자가 사천을 신음케 한다는 보고를 듣고 왔다! 나는 무림맹과 묵룡부, 맹부 연합의 공식적인 책임자로서 이번 사태를 묵과할 수 없는바, 너희의 저항은 곧 맹부 양측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연호정의 두 눈에 매서운 위엄이 어렸다.
“사천의 당씨들이 하나도 남지 않기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덤벼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