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93화 (592/963)

593화. 어둠에 가라앉은 자 (4)

책임을 져라.

전대 가주로서가 아닌, 사천 제일의 고수로서가 아닌, 당가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절대 군주로서가 아닌.

자식을 둔 아비로서 책임을 져라.

스르륵.

가지런히 묶인 머리카락이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내공을 발산하지 않았는데도 머리카락이 저절로 움직인다.

신체를 구성하는 지극히 미세한 조직 하나하나에 생명이 가득 차 있다. 평범한 사람은 평생 의식하지 못하는 체조직까지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은 진짜 고수의 모습이었다.

“책임을 지라는 것이냐? 나더러?”

“그렇습니다.”

“자식을 둔 부모로서, 자식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책임을 지라는 뜻이냐.”

“제대로 이해하셨습니다.”

“하면.”

당형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러나 이전과는 판이한 안광을 띄운 채 말했다.

“잘못을 인정하라는 말이구나. 이 내가, 준비도 되지 않은 후예들에게 가문을 물려주었다는 것을.”

“틀렸습니다.”

“뭐라?”

긴장으로 굳어졌던 연호정의 얼굴이 어느새 본래의 무심함을 되찾았다.

“준비되지 않은 후예들에게 가문을 물려준 것 이전에, 노선배님께서는 당씨 문중을 잘못 이끄신 겁니다.”

“……!”

“그것을 아셨기에 당대 가주에게 너만은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것 아닙니까?”

“…….”

당형의 볼이 살짝 떨려 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복장 뒤집는 게 제 특기이긴 합니다만, 이 상황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운운하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드리지요.”

“…….”

“잘못이고 뭐고를 떠나, 일단은 ‘지금’부터라도 지켜 내십시오. 지난날의 과오는 모든 일이 끝난 연후에 돌아봐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당형이 눈을 감았다.

“가거라.”

“…….”

“네가 본가의 상황을 그리 소상히 아는 이유는 묻지 않겠다. 그러나 그 이상은 곤란해. 본가의 일은 본가의 사람이 해결한다. 그리고 난 이미 은퇴한 몸이야.”

“그럼 당장 목숨을 끊으십시오.”

“뭐라?”

“죽었다면 모를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는 은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

“심지어 돌아가신 선조를 모시고 공경하며,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을 잊지 않으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죽어서도 천륜이 무너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

“또한 자식이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법이라 하였지요. 한데 왜 노선배님은 자식을 잊으려 하십니까?”

“더 이상의 주제넘은 발언은…….”

“관계를 끊으시려거든 스스로 죽든지, 지금 당장 나가서 자식들을 죽이십시오.”

“이놈!”

“문풍과 가법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를 변명 삼아 현실을 외면하지 말란 말입니다!”

느닷없이 폭발한 연호정의 언어는 천하의 당형조차 입을 닫게 만들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까? 아니면 자식에게 섭섭한 겁니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것이 자식을 위하지 못하겠다는 변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네 이놈!”

“핏줄이 있어야 가문도 있는 법입니다! 정작 핏줄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그깟 문풍과 가법이 무슨 소용입니까!”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는 말 속에 연호정의 진심과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그것은 가문을 잃어 본 사람의 진심이었다. 연호정 역시 입장과 상황이 달랐을 뿐, 동생을 증오하고 아버지를 멀리하였다. 그래서 대화가 없었고, 가족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든, 연호정은 분명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가문을 무너트리는 악적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연호정은 사무치는 후회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런 최후를 맞이할 줄 알았다면 끝까지 싸울 것을. 그런 최후를 막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면 가족들과 하루라도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낼 것을.

알 수 없는 천운 덕에 과거로 돌아와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잡았지만, 그런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이해했다. 당형의 진심이야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필연코 겪게 될 상상을 초월하는 후회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이번 사태는 적, 무림, 관계, 민생 모든 것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직무 유기 사유를 허상에 불과한 법도 따위에 돌리지 마십시오! 책임에서 눈을 돌리지 말란 말입니다!”

“시끄럽다! 은퇴란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짐을 뜻한다! 다음 세대의 일은 다음 세대가 책임져야 마땅한 법이야! 너희가 만든 문제를 이전 세대에게 떠넘기지 말란 말이다!”

“문제를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라는 그럴듯한 말로 날 설득하려 들지 마라! 사는 곳이 다르면 문화와 풍습도 다른 법! 너의 말은 네가 사는 곳에서나 통용되는 일리(一理)에 불과할 뿐이다!”

연호정의 마음이 그러했다면, 당형 역시 타오르는 분노와 상해 버린 자존심을 다독일 수 없는 상태였다.

당형이 치세하기 전의 당가도 고압적이고 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독과 암기를 건드렸을 때부터 그것은 필연이었다. 전수는 조심스러웠고, 비전이라는 것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핏줄에 대한 집착. 외인에 대한 배척.

그래서 은퇴한 전 세대 인물들은 당대의 자식들에게 관여를 많이 했다. 모두가 당씨 문중의 가법을 제대로 가르쳤음에도, 극단적인 조심스러움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레 정치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악습 아닌 악습을 정면으로 깨부순 사람이 당관이었다.

당관이 얼마나 능력 있는 가주인지를 떠나, 은퇴한 전 세대의 인물들이 당대의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막은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당형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언제나 부작용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느리더라도 안전한 정책으로 차근차근 바꾸어 가라고 충고했다.

당관은 당형의 말을 거부했다. 오히려 당대 가업에 지나치게 관여하여 가주의 품격을 무너트리는 당형의 동생, 당향문을 뇌옥에 가둬 버리기까지 했다.

그때 당형은 깨달았다. 당관은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버린 존재임을.

자식이지만 동시에 가주다. 그리고 당관은, 자신의 독선적인 면과 드높은 자부심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 모든 것을 본 당형은, 그 즉시 스스로를 유폐하였다.

힘으로 동생을 꺼낼 수 있었다. 힘으로 아들의 과격한 정치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한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되면 오히려 가문의 법도가 무너지리란 것을 알았기에.

아들에게 넘지 말라 했던 선을 자신이 넘게 되면, 영영 자식을 잃을 것 같았기에.

그래서 당형은 은퇴를 선언했다. 누구도 이곳에 찾아오는 것을 금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싶었지만, 그러한 책임이 가문의 법도를 흔들고 자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을 알았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천하를 뒤흔드는 무공을 갖고도 유폐 이후론 일절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런 당형에게, 연호정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 뿐 알맹이라곤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진리가 아닌 일리라 한들, 노선배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바! 속히 떠나지 않으면 너의 목숨을 취할 것이다!”

“내 목숨이 날아가도 노선배의 고집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결과가 말해 줄 것입니다!”

“이놈!”

“대체 왜 이곳에 스스로를 유폐하신 겁니까? 왜 당가를 나가지 않았습니까?!”

“……!!”

불의의 일격과도 같은 말이었다. 적어도 당형에게는 그러했다.

연호정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정녕 은퇴를 바랐다면 가문을 떠났어야지, 왜 이곳에 눌러앉아 은퇴니 유폐니 하는 말로 사람들이 신경 쓰게끔 만들었냔 말입니다!”

“……내 은퇴 장소를 어디로 정하든, 그것은 나의 자유다.”

“헛소리 그만하십시오! 노선배는 그저 바라고 있었을 뿐입니다!”

“…….”

“자식이 다시 자신을 불러 줄 날이 오기를, 피붙이와 웃으며 대화할 날이 오기를 바란 것이 아닙니까!”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엄청난 일격이었다. 천하의 연호정조차 일순간 정신이 날아갔다가 돌아왔을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않았다.

이 일격에 담긴 상심과 애달픔을 고스란히 느꼈기에, 그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치이익!

연기가 피어오르는 당형의 손이 천천히 쥐어지며 강인한 주먹을 만들었다.

연호정이 숨을 몰아쉬었다.

“나가십시오. 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십시오.”

“……경고는 한 번으로 족할 것이다.”

“이 사태를 해결하시란 말이 아닙니다. 그저 가서 얘기하십시오. 너의 방법은 잘못되었다고,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는 머지않아 당가도 끝이 날 거라고.”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사천의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권력자들의 노리개로 만드는 등의 행위는 절대 올바르지 않은 것이라고, 가서 얘기하시란 말입니다!”

당형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사천당가. 당씨 문중.

사천성 최강의 세력이자, 사천 민심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위대한 가문.

그러한 가문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자식이 민간인들을 그리 다루고 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눈곱만큼도 없는 대죄다.

연호정은 사람의 도리를 말했다. 당형은 이 건방진 청년이 말하는 도리가 당가에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다르다. 중원을 침공했던 외세의 세력도 민간인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부도덕한 일인지를 떠나, 그 영역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될 성역을 제 자식이 까뒤집고 있었다. 당형은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끝끝내 나서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

“좋습니다. 하면 이 당가가 끝장이 날 때까지, 이곳에 틀어박혀서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나는 지금 즉시 노선배의 자식을 죽이러 갈 것입니다.”

순간 당형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

“노선배가 나선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지만, 노선배가 나서지 않으면 사태가 어려워집니다. 그리고 저는 무의미한 피가 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불꽃 같은 기파가 타올랐다.

일순간 터져 나오는 기파도 대단했지만, 그 기파 속에 드리워진 살기의 그림자는 당형조차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지독했다.

“무도하기 그지없는 한 명의 악인을 죽여 개죽음당할 수많은 목숨을 살릴 것입니다. 노선배는 내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노선배가 이고 가야 할 책임을 대신 져 주겠다는 거니까.”

연호정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앙!

홍염육살권에 직격당한 동굴 입구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안으로 뭉쳐져야 할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며 큼직한 입구를 그대로 드러냈다.

번쩍!

어느새 연호정이 사라졌다.

“…….”

떨리는 눈으로 무너진 동굴 입구를 보던 당형이 눈을 감았다.

연호정이 남기고 간 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가슴이 미어졌고, 손발이 절로 움찔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

번쩍 눈을 뜬 당형이 당가의 외원 대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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