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어둠에 가라앉은 자 (3)
“참으로 답답하군.”
육장로 당효강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장로 셋이 당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적갈단과 호성조까지 무너져 버렸소이다.”
녹수주루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 지붕.
그 아래엔 사백여 명이 넘는 무사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었다.
피를 흘리거나 몸의 일부가 날아가는 등의 끔찍한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하게 쓰러져 있다. 멀리 떨어져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실제 수면에 든 사람처럼 호흡이 바르고 깊은 듯 보인다.
이장로 당효박의 눈이 차가워졌다.
“무면심공파(舞眠心空波).”
“음?”
“무면심공파일세. 저들이 당한 수법의 이름이야.”
당효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엇이오? 처음 듣는 무공인데.”
“제왕독경(帝王毒經) 상의 비술이지. 무공이라기보다는 독술의 일종이지만, 그 독술을 펼칠 수 있도록 내력을 고조시켜 환경을 만드는 것 역시 시전자의 깨달음이 필요하니, 무공이라 해도 무방하지.”
“제왕독경? 그건 또 무엇이오?”
“전대 가주님께서 당관에게 가주위를 넘기기 전에 완성하신 비급일세. 천하 모든 독공의 완성형이자 천하 모든 독학(毒學)을 망라했다는 전설의 무공이지.”
“……그런 것이 있었소?”
“자네가 모를 만도 하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까. 자네는 그때 대외 임무로 바빴지.”
“…….”
“전대 가주님은 독과 암기, 두 공부를 총망라하는 절대의 무공을 만들고 싶어 하셨지. 그중 먼저 완성하신 것이 제왕독경일세.”
“그랬군.”
“내, 그 비급의 글자 하나 읽어 본 적 없지만 감히 자부하네. 제왕독경을 극성까지 연마한다면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을 거라고.”
당효강의 얼굴에 은근한 탐욕이 일었다.
“그런 대단한 무공을 만드셨단 말인가.”
“그러나, 그리 대단한 만큼 난이도 또한 엄청나다더군. 어지간한 지식과 실력 없이는 입문조차 못 한다고 하네. 제왕독경을 익히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실력과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흐음.”
“아마 전대 가주님이시라면, 지금쯤 제왕독경에 비견될 만한 암기술도 창안하시지 않았을까 싶네.”
당효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알 수도 없고, 한가롭게 지금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무면심공파라는 것, 그게 어떤 독술인지나 설명해 주시오. 무려 사백에 달하는 고수들이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쓰러졌소이다. 저런 비술을 수도 없이 갖고 있다면, 우리 중 누가 있어 당관을 막겠소.”
당효박의 눈이 깊어졌다.
“무면심공파는 독술이지만, 여느 독술과는 달라. 독공을 극에 이르도록 익힌 독인에게는 본가의 극독도 통하지 않지. 바로 그런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라 들었네.”
“……?”
“재워 버리는 거야.”
“재운다…….”
“독인(毒人)에게는 몽혼약이나 수면제도 거의 통하지 않지. 하나, 절대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몽혼약과 같은 효능을 극대화한 것이 무면심공파라는 것이군.”
“맞네. 어떤 원리인지는 나도 몰라. 다만…….”
치리링.
당효박의 소매 끝에서 쇠 비늘이 붙은 채찍 끝이 슬쩍 빠져나왔다.
“한번 펼치면 반나절 동안은 다시 펼칠 수 없는 비기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네.”
당효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것만큼은 묻고 싶군. 대체 그런 걸 누구한테 들으신 것이오?”
“전대 가주님.”
“허어?”
“사석이었네. 제왕독경을 만들기도 전이었지. 다만 그런 수법에 관해 가내 고수들과 논의했다는 얘기를 운 좋게 들었을 뿐이야.”
“그렇구만.”
치링!
당효강의 손가락에 어느새 강철로 주조된 철 장갑이 끼워졌다. 손가락 끝이 날카롭게 만들어진 철 장갑은 혈응철조(血鷹鐵爪)라는 물건으로, 수공(手功)과 조법(爪法)을 극대화하기 위한 당효강만의 무기였다.
“여하간, 지금 당관은 그와 같은 비기를 다시 쓸 순 없다는 뜻이로구먼.”
“맞네.”
“우리 둘로 충분하겠소?”
당효박이 고개를 저었다.
“비무라면 충분하겠지. 하지만 생사결이라면 충분하지는 않겠지.”
“그래서 이걸 받아 오지 않았소?”
당효강이 품에서 꺼낸 것은 성인 남성 팔뚝 길이보다 짧은 원뿔형의 몽둥이였다.
당효박의 눈이 빛났다.
“그렇지.”
“받으시오.”
당효박에게 물건을 건넨 당효강이 숨을 들이쉬었다.
“터지는 즉시 파고들겠소. 만약 당관이 죽지 않았다면 후방 지원을 부탁하오.”
“걱정하지 마시게.”
“그럼.”
펄럭!
두 사람이 동시에 시커먼 장포를 뒤집어썼다.
독에 대한 내성만큼은 충분한 그들이었다. 거기에 쇄혼막까지 둘렀으니, 발경이나 화골산과 같은 부식류 독공에도 안전할 것이다.
“가십시다.”
파아아아앙!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신법을 펼쳤다.
굉장한 신법이었다. 지붕을 박찬다 싶은 순간 녹수주루 꼭대기에 서 있는데, 작은 기척이나 소리도 없었다.
놀라운 경신술, 압도적인 이동 능력이었다. 장로원은 물론 전대 노고수들을 뒤져 봐도 이 두 사람처럼 신법에 능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대 이가주, 당향민의 자식들인 두 사람이 파견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독에 예민하고 경신술이 날래서, 혹시 모를 사태에도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스르륵.
당효박이 원뿔형 물건을 꺼내 들었다.
당효강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당효박이 뾰족한 원뿔의 끝 부분을 천천히 세 번 돌렸다.
딸칵!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났다 싶은 순간, 당효박이 물건을 최상층부 창가 안쪽으로 던졌다.
파아악!
두 사람이 하늘 높이 떠올라 쇄혼막 안으로 몸을 말았다.
잠시 후.
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녹수주루 오 층과 사 층, 삼 층이 차례대로 무너져 내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폭발하여 비산하는 건물 잔해 속,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우모침들이 팔방으로 쏘아졌다.
파바바바박!
두 사람의 쇄혼막에도 우모침이 수십 개씩 박혔다.
정확한 시기, 정확한 방위, 강력한 내공으로 보호했기에 겨우 막은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두 사람 역시 벌집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개량된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의 위력이었다. 대외에 알려진 폭우이화침보다 훨씬 막강한 위력, 그래서 수뇌부들은 이것을 따로 광폭혈침(狂爆血針)이라고도 불렀다.
파아아아앙!
쇄혼막에서 빠져나와 단숨에 무너진 녹수주루 안으로 내려선 당효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크아아악!”
“아아악!”
“피, 피해라!”
“사람이 깔렸다! 구해!”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폭우이화침에서 발사된 우모침은 그 사거리가 엄청났다. 녹수주루에서 한참 떨어진 민간인 몇 명도 우모침을 맞았고, 침을 맞은 즉시 피부가 파랗게 변하더니 쓰러져 버렸다.
뿐인가. 박살 난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도 많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적갈단과 호성조의 무사 수십 명은 아무 저항도 못 하고 깔려 죽었을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위력.
천하 어떤 고수도 이와 같은 기습을 겪으면 멀쩡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효강은 당관이 죽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어디 있지?’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피 흘리는 사람과 무너진 건물 잔해뿐이었다.
‘숨었나? 기척이 없는데.’
당효강은 다른 사람들처럼 당관의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당가 역사상 최고수라 불리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당관은, 치명상을 입었을지언정 이 정도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뭐야? 설마 정말 죽어 버린 건가?”
파라라라락!
여전히 쇄혼막을 뒤집어쓴 당효박은 주루 옆 건물 꼭대기에 내려서며 녹수주루를 살폈다.
그의 눈에 동생이자 같은 장로인 당효강의 모습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건가?’
이쪽에서도 당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독인 특유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방심했다거나…….’
그때였다.
오싹!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기감에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파아아앙!
단숨에 몸을 돌려 쇠 비늘 채찍을 휘두르는 당효박.
카아아앙!
당효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어느새 그의 뒤에 사내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내의 양 팔뚝엔 자신이 휘두른 채찍이 둘둘 말려 있었다.
사내의 팔뚝에선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쇠 비늘 채찍, 혈룡편의 편신(鞭身)은 지극히 날카로웠다. 사람 피부는 물론 돌기둥마저 갈아 버릴 정도로 흉흉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피는커녕 상처 하나가 없다니?
화아아악!
사내가 팔을 들어 채찍을 당겼다. 그러자 당효박의 신형이 사내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헉!’
엄청난 힘이었다.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채찍을 쥔 팔의 관절이 모조리 뽑혀 나가는 듯했다.
그때, 사내의 두 주먹이 불을 뿜었다.
퍼버벅! 콰득! 콰득! 콰득!
본능적으로 독낭을 터트렸지만, 그조차 무용지물이었다. 독낭을 뚫고 번개처럼 치고 들어온 연타에 당효박의 갈비뼈와 턱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요란하지 않지만 강했다.
‘누구……?’
당효박의 눈이 흐려졌다.
흐려지는 그의 눈앞에, 시커먼 주먹이 확대되듯 빠르게 날아들었다.
빠각!
끔찍한 소리와 함께 당효박의 머리통이 부서졌다.
“음?!”
당효강이 놀라서 당효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이한 타격음이 들린다 싶은 순간, 형의 기도가 완전히 죽어 버렸던 것이다.
훅!
시커먼 쇄혼막이 넓게 펼쳐졌다.
“이장로님?!”
넓게 펼쳐진 쇄혼막 때문에 당효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파아아악!
당효강이 재빨리 접근하여 허공에 펄럭이는 쇄혼막을 걷어 냈다.
“헉! 형님!”
건물 지붕 위, 상반신이 통째로 뭉개져 피떡이 된 당효박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였다. 당효강 역시 초절정고수임이 분명하거늘, 주변이 부산스러웠다고는 해도 이상을 감지한 그 잠깐 사이에 이장로를 때려죽인 것이다.
당효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당관이?!’
그때, 한 줄기 은밀한 기도가 느껴졌다.
독이 묻은 기도였다. 그래서인지 흘러나오는 기파 자체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효강이 빠르게 뒤로 돌아 혈응조를 휘둘렀다.
콱!
벌어진 철조를 깍지 끼듯 잡은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당효강의 눈이 흔들렸다.
“뭐, 뭐야? 넌 누구냐!”
“……나는.”
사내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그리고 무표정했다.
“언자방이다.”
철조와 깍지를 낀 그의 손에 일순 무서운 내공력이 몰렸다.
콰드득!
철조가 그대로 으스러졌다.
* * *
“헉!”
사방에서 난리가 났지만, 그럼에도 대문을 지키는 수문위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철저하게 고수했다.
그런 그들은, 최초로 자신들의 임무를 후회하게 되었다.
저벅저벅.
산책이라도 하듯 한가로이 걸어오는 위엄 넘치는 사내가 있었다.
“역시나 위아래가 없는 놈이로다. 손윗사람이 그리 불렀거늘, 발 벗고 달려오지는 못할망정 아랫것들을 보내? 하기야…….”
펄럭!
장포 자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펄럭이는 옷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제왕의 품격.
“그러니 반역 같은 짓거리로 가문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게지.”
사내, 당관이 무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생각지 않느냐?”
“가, 가주님!”
“그래, 너희는 나를 가주라 불러 주는구나.”
“……!!”
“한데 뭣들 하느냐? 집주인이 왔으니,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당관이 턱을 치켜들었다.
“문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