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화. 어둠에 가라앉은 자 (2)
노인, 당형이 무심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은 당형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자네는 동굴 밖에서 이곳을 지켜 주게나.”
“그러지.”
황석태는 당형을 향해 포권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강호 정상급 고수를 향한 예우는 필요했다. 성천의 고수라면 사상을 막론하고 존경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그렇게 황석태가 자리를 떴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
“다만, 용서를 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랬다면 굳이 이곳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당형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닫고 연호정을 바라보는데, 천하의 연호정도 당형의 눈빛에서 감정이나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투명하군.’
투명하기가 마치 잡티 하나 없는 초자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 놀라웠고, 그래서 위험하게 느껴진다. 스스로를 완전히 통제할 줄 아는 것인지 정말 감정이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자신이 감당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림맹의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조금은 잠긴 목소리였다.
연호정 입장에서는 다소 뜻밖이라 할 수 있었다. 이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훨씬 더 위엄 가득한 인물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는 달랐다. 눈빛을 제외하면, 당형은 여느 시골의 촌로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외양과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당형이 물었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오셨는가.”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당형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걸어서 들어왔다? 대답 한번 가관이었다. 당형은 자신 앞에서 저따위 말을, 그것도 저리 당당히 내뱉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두 다리가 멀쩡하니, 걸어서야 왔겠지.”
은근한 섬뜩함을 자아내는 말이었다.
말이야 평범했지만, 그 말을 하는 주체가 당형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리를 잘라 버리겠다는 뜻으로도 들리는 아주 묘한 어조였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바라보던 당형이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소란, 자네들의 짓이던가.”
“그렇습니다.”
연호정은 가타부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당형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구먼.”
“…….”
“세상에 관심을 끊은 지 오래지만, 이 의문 하나는 풀고 싶군.”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동안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나? 설마하니 다 쓰러트리고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없었습니다. 독진 몇 개 빼면요.”
연호정과 황석태가 이곳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다.
애초에 당형이 머무는 장소가 당가에서도 북동쪽 끝에 있었다. 가문의 병력이 밀집한 곳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이곳을 지키는 무사도 없었다. 이유인즉, 당형 스스로가 자신을 유폐한 곳인 만큼 무사들을 불러 지키게 하는 것 자체가 무례였기 때문이었다.
일차로 패율이 시선을 끌고, 이차로 모용군이 침투하여 외원에 혼란을 일으켰다.
더하여 당관이 녹수주루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금, 연호정과 황석태는 너무나도 쉽게 이곳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곳곳에 독진(毒陣)이 둘러쳐져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연호정의 힘으로도 충분히 해체할 수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군.”
당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느꼈던 감각 그대로야. 자네가 어떤 길로 왔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돌파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놀라운 능력 앞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당형은 이 넓은 당가 내부를 이곳에 앉아서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대화까지 엿듣거나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함을 듣거나 분위기를 읽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마 당가 너머, 당가타에서 벌어지는 일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작정하고 기감을 확장해야겠지만.
언뜻 무기력해 보이는 지금의 당형이 평소에 일부러 기감을 확장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뭐가 되었든.’
우우우웅.
의념을 집중하지도 않았는데 연가신단이 서서히 회전을 시작했다.
몸이 먼저 긴장한 것이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당형이라는 존재가 자아내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신체가, 나아가 진기가 스스로 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호정의 두 눈에 푸른 기운이 맺혔다.
‘정말 독특한 자다.’
암왕 당형.
사천 최고의 명문가, 당씨 문중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고수이자 당가의 최고 전성기를 만들었던 희대의 무인.
당형 이전까지의 무림은, 당가를 위험하다고는 생각했으나 여타 문파들보다는 한 수 낮은 세력으로 평가하곤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과 암기를 꺼리는 중원 무림인들 특유의 자존심에 기인했다. 독과 암기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지만, 정통의 무공을 상승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수백 년간 사천에서 외세의 침략을 막은 가문인데도 그러한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세상은 박했고, 보수적이었다.
그 보수적인 평가를 완전히 뒤엎어 버린 사람이 바로 당형이었다.
그는 한 줌의 독도 없이 비수 한 자루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고수를 격파했다.
오직 비수 한 자루. 그 짧은 칼로 검도 고수의 검을 잘라 냈고, 힘 좋은 도객의 팔을 날려 버렸으며, 권법 고수와는 부딪침도 없이 이마에 비수를 박아 승부를 끝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독이나 기오막측한 암기를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암왕의 칭호를 받기 전, 그의 별호는 독비사신(獨匕死神)이었다. 한 자루 비수로 사신과 같은 행보를 보여 주었다 하여 붙은 별호였다.
독 없이도, 난잡한 암기 없이도 천하 최강의 반열에 이름을 올린 무적의 고수.
그 일대 거인이 자아내는 허허로운 분위기에 연호정은 내심 놀라고야 말았다.
‘저 영역에 거한 고수 중, 이렇게까지 허허로운 기운을 발산하는 자는 본 적이 없다.’
말이 좋아 허허로운 것이지, 그저 허무함의 극치에 달한 것뿐이다.
허무함이 과도해서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된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주변에 관심을 두는 성격도 아니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이다.
“끝났는가?”
“……?”
“나를 살펴보는 일은 끝났느냐 물었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당형이 손을 저었다.
“나는 이 영역 외의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세. 무림맹의 사람이라 하니, 허가도 없이 들어온 무례는 용서하겠네.”
“…….”
“이만 나가 주게. 피곤하구먼.”
담담한 축객령이었다.
내심 어려울 거라 예상했지만, 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으리란 생각은 못 했다.
가만히 당형을 바라보던 연호정은 이내 실소를 지었다.
“역시 세상은 넓습니다.”
“…….”
“솔직히 이런 식으로 축객령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불행하겠나? 이만 가시게.”
행복하겠느냐도 아니고 불행하겠느냐고 말한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 힘들지만, 그렇기에 또 살맛이 나는 법이다. 모든 것이 예측되고 모든 것을 주무를 수 있다면, 그만큼 재미없는 세상도 없을 것이다.
연호정은 그 말에서 당형의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가문.
그러나, 불행하지는 않다. 세상이 그러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형은 은연중 연호정에게 자신은 불행하지 않다고 알려 준 셈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이왕지사 무례를 범한 김에, 조금만 더 인내심을 발휘해 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가 주게.”
“자식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는 것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 교정해 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사료됩니다만.”
당형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스으으으으.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연호정의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형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의 변화만으로도 머리카락이 곤두서려 한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역시.’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았지만, 이 자는 역시나 당씨다.
‘이 사람은 위험해.’
위험한 무공을 지닌 자다.
사상이나 감정이 아닌, 실력이 위험해서 긴장하게 되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당형이 말했다.
“본가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 모양일세.”
“그렇습니다.”
“본가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또한 알고 있겠지. 본가는 외인의 평가에 좌우되는 가문이 아니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네.”
“…….”
“피 흘리며 싸우든 어쩌든, 나는 이미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온 몸. 후대의 일이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는 아니야.”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거짓말이로군요.”
“…….”
“지금까지는 진심이었는데, 방금의 발언은 분명 거짓입니다.”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아는가?”
“느껴지니까요.”
“헛소리군. 설령 거짓이라 한들 자네 장단에 맞춰 줄 이유가 되지는 않네. 다시 말하지. 이만 나가…….”
“왜 가르치셨습니까?”
“……?”
“왜 아들에게 무공을 가르쳤습니까? 손자들의 무공을 봐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저 가문의 어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르치신 겁니까?”
“…….”
“아니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 자식, 내 후손에게 아낌없는 가르침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를, 멋진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서입니다.”
“…….”
“그리고 지금, 노선배님의 그러한 바람은 깨지고야 말았습니다.”
훅!
연호정의 몸에서 은은한 열기가 새어 나왔다.
심박출량이 올라가며 주작기가 고개를 들었다. 울컥울컥 쏟아 내는 혈류량이 증가하며 연호정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롭고 단단해졌다.
“가문의 규율과 가풍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러나 그 어떤 법도도 내 사람이, 내 가문이,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건방진 청년이로고. 내 설마하니 당씨도 아닌 젊은이에게 가문의 법도에 대해 배울 줄은 몰랐거늘.”
“하물며 무너지는 이유가 단순한 골육지쟁이 아닌, 외부 세력의 농간 때문이라면 더더욱.”
“……!”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당형의 눈빛이 돌변했다.
연호정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좋습니다. 가문의 법도, 가풍, 규율. 다 좋다 이겁니다.”
“…….”
“다만 인간의 도리를 안다면, 가문의 일원이 아닌 괴물을 낳은 사람으로서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괴물? 책임?”
“무능한 괴물이지요. 하지만 그 괴물은 외부 세력에 힘입어 사천 전체에 낙원소라는 괴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민간인을 납치하여 힘 있는 자들의 욕망을 배출하는 장소지요.”
“……!!”
당형의 볼이 살짝 떨렸다.
“혼자서는 그 무엇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무능한 자입니다. 하나 그 무능한 자의 욕망이 실현된 순간, 그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관이가,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를 리 없어.”
“맞습니다. 당가주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당가주의 자리를 원하는 형제가 저지른 짓이지요.”
순간 당형은 당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술과 고기를 가져와, 다시 한번 찾아뵙겠다고 절을 올리던 둘째의 얼굴을.
연호정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모로서 엇나간 자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거기에 아무 죄도 없는 또 다른 자식들의 목숨까지 살리려면,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 겁니다.”
“…….”
“이제 책임을 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