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독지(毒地), 그리고 혈지(血地) (4)
“잡아라! 잡…… 큭!”
퍼엉!
강력한 각법 일격에 천양단의 조장이 튕겨 나갔다.
죽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울컥 토해 내는 피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죽을 정도의 타격은 아니었는데도 피가 꺼멓다. 독공을 익힌 자, 내력이 흔들리며 혈도를 뒤흔들었다. 당분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그 정도가 적당하지.’
쉬리리릭! 쩌저저정!
수십 발의 암기를 모조리 쳐 내는 패율의 창검술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전투 불능 상태, 딱 그 정도가 좋아.’
감당키 힘든 고수의 출현은 곧 반역에 동참한 당가의 수뇌부라는 뜻이다.
그만한 인사가 아니면 함부로 목숨을 취해선 안 된다. 누군가 입 밖으로 낸 말은 아니었지만, 일행 모두가 암묵적으로 수용한 규칙이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독과 암기를 폭풍처럼 난사하는 이들 속에서, 적을 무력화시키기만 하고 죽여서는 안 된다. 패율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작전이라는 연호정의 말을 새삼 실감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쩌저정!
원형을 그리는 검 속으로 암기들이 빨려 들어갔다.
검풍이 만들어 낸 강렬한 인력이 암기들을 끌어당긴 것이다. 빨려 들어간 암기들은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깨지고 힘을 잃어 갔다.
기가 막힌 한 수. 점창의 회풍무류(回風舞柳)가 적재적소에 펼쳐지니, 주인을 지켜 주는 절대적인 방벽이 되었다.
‘아직 멀었나? 더 치고 들어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때였다.
후우웅!
패율의 눈이 번쩍였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 줄기 살기. 그 살기가 향하는 곳은 자신의 목이었다.
그가 급하게 창을 올려 쳤다.
쩌어어엉!
충격이 크다.
일순간 허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였다. 극한의 단련으로 강철처럼 단단해진 하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뒤로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의 충격량이었다.
“대단하군.”
스르륵.
바람처럼 달려와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던 남자가 자세를 바로 세웠다.
“놀라운 반응 속도야. 초절정고수라더니, 과연 허언은 아니었나.”
패율이 눈을 빛냈다.
아무 말 없이 상대를 노려본다. 그것이 전부였다. 굳이 대화까지 나눌 사이는 아닌 것이다.
기습자, 음혼단주 당목진이 단봉(短棒)을 들어 올렸다.
“나는 위대한 당가의 음혼단주 직을 맡은 당목진이다. 정체를 밝혀라.”
강인한 위엄이 묻어 나온다.
지금껏 상대했던 무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무종지벽을 돌파하지는 못했지만, 순수 무공으로는 강량과 붙어도 뒤지지 않을 막강한 무력을 쌓았다.
‘중량이 대단하군.’
무종지벽을 넘었느냐, 아직 넘지 못했느냐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제아무리 차이가 있다 한들 이 정도 기습을 받으면 누구라도 몸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살수 뺨치는 은신술에 극속의 신법, 거기에 묵직한 체구를 이용한 힘의 무공까지 합쳐져 강력한 위력을 선사했다.
패율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마치 저잣거리 삼류 파락호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목진은 그를 얕보지 않았다.
‘굉장해.’
화아아아악!
습격자의 몸 주위로 검붉은 불꽃이 미친 듯이 넘실거리는 듯하다.
거칠기 짝이 없는 기도였다. 마치 폭발 직전의 화산을 눈앞에 둔 것 같다.
게다가 그 무공은 어떤가.
단창과 기형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자루의 병기를 쥐고 있음에도 전개하는 무공은 조화롭고 도도하기만 했다. 위력과 살기를 떠나, 두 가지의 무공을 완벽하게 제어할 줄 안다.
저런 것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초절정고수라 한들, 그 나름의 무리(武理)를 깨닫지 못했다면 저처럼 조화로운 무공을 구사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우우웅.
당목진의 단봉에서 불그스름한 연기가 넘실거렸다.
독룡신공의 진기였다. 당문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정의 독공이 최대로 개방되고 있었다.
‘더더욱 살려 둘 수 없다.’
가주께서는 습격자를 생포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당목진은 확신했다. 저놈은 생포할 만한 놈이 아니라고.
무공의 경지를 떠나 기질이 그러했다. 사로잡히는 즉시 혀를 깨물 놈이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점혈을 허용할 만한 놈도 아닌 것 같았다.
‘기회가 보이면 시도 정도는 해 보겠지만…… 그 전까지는 안 된다.’
당목진이 말했다.
“전원 음혼살진을…….”
순간 패율의 눈빛이 바뀌었다.
“……펼쳐라!”
콰아앙!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다.
대지를 뒤흔드는 진각과 동시에 폭음이 터졌다. 힘을 끌어 올리는 진각과 폭발하는 발경 사이의 시간이 무(無)에 가까웠다.
‘이익!’
무려 오 장 밖으로 밀려 나간 당목진이 이를 악물었다.
‘미친!’
괴력의 무공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미리 몸을 날려 충격을 해소하지 않았으면 몸에 구멍 하나는 반드시 뚫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없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패율 주변을 에워싼 흑색 무복의 무사들이 단봉을 들어 올리며 붉은 기운을 피워 냈다.
음혼단의 음혼살진이었다. 독룡기는 그 위력 자체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차근차근 체력을 깎아 먹는 지속성에 있어서는 당가 최고였다.
독룡공을 익힌 무사들의 진법은 그래서 무섭다. 일격에 죽일 힘은 부족하지만 한번 걸리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진다.
패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 좋군.’
당가독에 대한 면역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그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상승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제길.’
이 진법을 와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할 것이다.
패율의 단창이 불을 뿜었다.
쾅! 쾅! 쾅!
빛살처럼 쏘아진 삼연격 관일창에 일곱 명의 무사들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빈틈!’
파아악!
진의 빈틈을 파고들어 벗어나려 했던 패율은, 어느새 천양단의 무사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쩌저저정! 퍼억! 퍼억!
창검으로 그들을 튕겨 냈다. 제아무리 대단한 진법이라도 패율의 괴력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또다시 귀신처럼 다가온 당목진이 패율의 정수리를 향해 단봉을 내리쳤다.
쩌어어어어엉!
여전히 무겁다.
이전만큼의 무게감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주춤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사아아악!
다시금 발동하는 음혼살진.
패율의 창검이 팔방으로 휘둘러졌다.
퍼퍼퍼펑! 쩌저저정!
날카롭고 강하다. 빠르고 변칙적이었다.
두 자루 창검이 자아내는 무공은 가히 예술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음혼단은 무너지지 않았다. 음혼살진의 진력(陣力)은 보이지 않는 안개처럼 패율의 사지를 조금씩, 조금씩 결박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패율이 땅을 박찼다.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진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훅!
힘으로 찢고 나아가려던 순간, 패율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륵.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역시나.”
당목진이 손목을 어루만졌다. 패율의 기형검과 부딪친 단봉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무공도 대단하지만 감각도 뛰어나구나.”
음혼살진을 힘으로 벗어나는 순간 진법 인원 모두의 독룡기가 진의 구멍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더라도, 한순간 대량의 독룡기를 흡입하면 누구라도 몸이 축날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을 노린 당목진의 공격은 패율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벗어나는 순간 죽는다.
벗어나지 않아도 언젠가는 죽는다.
대(對) 고수전(高手戰)에 있어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큰 효용성을 지닌 죽음의 진법. 당호가 음혼단을 보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방법이 없나?’
패율은 갈등했다.
찰나지간 위기감을 느껴 다시 돌아왔지만, 당관이 제조해 준 해독약을 복용한 상태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부에 집중된 진법이다. 외부에서의 공격엔 지극히 취약해. 그렇다면 일단 벗어난 후에…… 아니야.’
패율이 창검을 고쳐 쥐었다.
‘버틸 순 있어도 연환으로 이어지는 후속타를 막기는 힘들 것이다.’
연호정이나 강량만큼은 아니지만, 패율 역시 싸움의 공기를 맡는 데에 있어서 천부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읽을 줄 아는 그였다. 지금으로선 음혼살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버텨야겠지. 어차피 나는 미끼다. 내 역할에 충실하면 돼.’
이왕이면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가슴 뛰는 전장에서 적과 화려하게 싸우다 죽는 것. 그것이 바로 패율의 소원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꿈을 이루진 못한다. 노력만으로 꿈을 쟁취할 수 있다면, 세상이 이리도 팍팍하진 않았을 것이다.
‘설령 죽는다 해도.’
쿵!
힘차게 진각을 밟은 패율의 눈빛이 또다시 변했다.
‘내 역할은 완수한다.’
당목진의 눈이 빛났다.
‘바뀌었다?!’
상대의 눈빛과 기질이 바뀌었다.
사방을 주시하던 눈은 전투를 위한 몰입으로 물들었고, 한없이 거칠던 기세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마음을 먹었군.’
쿠르르릉!
전신의 힘을 몽땅 끌어내는 듯했다.
울컥!
순간 음혼살진의 진력이 태풍이 불어닥치는 수면처럼 마구 일렁였다. 일순간 폭발한 패율의 기파에 진력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다.
당목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사냥감이 목숨을 걸었다. 독룡공의 한계를 열 준비를 하라.”
사아아아악!
패율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 음혼살진을 이루는 단원들의 진기도 서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패율이 씨익 웃었다.
음혼단이 출격한 이후,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독(毒) 따위와 싸우며 최후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만…… 이 또한 내 천명이라면 별수 없지 않겠는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당목진과 음혼단 전원의 눈빛은 한순간 극도로 살벌해졌다. 독을 무시하는 듯한 패율의 말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당목진이 버럭 소리쳤다.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려라!”
쾅!
또 한 번 진각을 밟은 패율이 힘차게 창을 내질렀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패율의 손에서 관일창이 폭발했다.
바로 그때였다.
파직.
느려지는 시공.
떠다니는 먼지 하나하나가 전부 시야에 잡히는 세계에서.
샛노란 벼락을 휘두른 뇌신(雷神)의 힘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콰콰콰쾅! 파지지지지직!
마른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콰쾅! 콰르르릉! 퍼어어어엉!
온갖 굉음과 폭음이 난무했다.
대지가 무너지고, 주변 건물 하나가 폭삭 내려앉았다. 빛살처럼 뻗어 나가는 번개 줄기가 나무를 태우고 건물 벽을 때려 부수며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
패율의 눈이 커졌다.
관일창을 내지른 그 자세 그대로, 그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번쩍!
그곳에 번개 줄기 하나를 흩뿌리며 나아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포착한 순간 이미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허어.”
패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쿨럭!”
“크으윽!”
괴상한 신음과 함께, 음혼살진을 이루었던 삼십여 명의 무사 대부분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중 절반은 피범벅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상처가 없는데도 뻣뻣해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기(雷氣)에 당한 것이다.
“우웨에에엑!”
용케 죽지 않은 당목진이 한 사발의 피를 토하곤 떨리는 눈으로 패율을 바라보았다.
“이…… 이 괴물이?!”
멍하니 당목진을 보던 패율이 일순 어깨를 으쓱거렸다.
“봐준 줄 알아. 내가 원래 좀 치거든.”
“우웨에에에엑!”
“고생이 많네. 그럼 이만.”
퍼억!
냅다 달려가 당목진의 머리통을 갈겨 기절시킨 패율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늦게 침투한 모용군, 뇌정의 힘을 간직한 초고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