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88화 (587/963)

588화. 독지(毒地), 그리고 혈지(血地) (3)

“흐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날뛰는 모양이군. 급박함이 여기까지 느껴져.”

모용군의 말대로였다.

크고 튼튼한 당가의 외벽이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 그 뒤로 당가의 호위대로 추정되는 무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소리가 전부가 아니었다. 바람결에 묻어 나오는 이 급박한 분위기는, 분명 당가인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기인했다.

“한데…….”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꽤 깊게 들어가는 듯한데.”

그렇다. 패율의 불꽃 같은 기파는 이미 당가의 외벽을 넘어가 버렸다.

침입이었다. 대문은 아니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라 불리는 사천당가의 외벽에서 난장을 치다 못해 그 벽을 부수고 당당히 들어간 것이다.

그야말로 당가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세상 어떤 고수도 감히 단신으로 당가에 침입할 생각은 못 할 것이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야 놈들의 시선을 완전히 붙들어 놓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강량의 얼굴에 은근한 걱정이 일었다.

“괜찮을까요? 아무리 선배라도 그 많은 수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패율 장로를 보낸 것 아니겠나. 치고 빠지는 데에 능하니까.”

“아무리 치고 빠지는 데에 능하다 한들 포위망에 갇히면 그걸로 끝입니다.”

“뭐, 그 또한 맞는 말이지.”

모용군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듯하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가 품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가주께서는 이 지도를 외우셨소?”

모용군이 씨익 웃었다.

“물론이지.”

이 지도는 당관이 직접 그린 당가의 내부 지도였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가문을 되찾기 위해 함께하는 동지들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히 외인들이 아닌가.

그런 외인들에게 유구한 당가의 역사가 깃든 가문의 배치를 고스란히 알려 주었다.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시도였다.

“이번 임무가 끝나도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는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군. 아니면 당가주를 바보로 알거나.”

당관이 이 지도를 준 행위에는, 만에 하나 자신이 죽어도 작전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내부 건물 배치도를 보며 최대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를 바란 것이다.

반대로 이번 작전이 성공하면?

당관은 가문 내부를 몽땅 뒤집어엎을 생각이었다. 사람은 물론 건물과 진법까지도.

살아서 작전에 성공하면 바꿀 배치도요, 죽어서 작전에 실패하면 후일을 위한 안배다.

당관이 자신 있게 지도를 건네준 것에는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

“그럼 작전 지시를 하겠소.”

연호정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현재 우리 중 독에 가장 강한 내성을 지닌 사람이 이곳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야 하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군.”

“그렇소.”

그는 뇌정공(雷霆功)이라는 상고의 절학을 익혔다. 뇌정공은 그 이름과 같이 뇌기(雷氣)를 기반으로 한 무공이었다.

그토록 파괴적인 진기를 어찌 몸에 담아 둘 수 있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모용군이 그 기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고, 뇌기는 그 존재만으로도 어지간한 극독까지 몽땅 태워 버릴 수 있는 극상승의 파괴력을 지녔다.

거기에 오랜 세월 쌓은 연륜과 지식까지, 첫 번째 작전에 모용군만 한 인사는 없었다.

“내원이니만큼 조심해야 할 것이오.”

“아무래도 어렵기야 하겠지만, 당가주의 계략이 먹혀든다면 분명 틈이 생길 걸세. 그리고 그 계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해.”

“그렇소.”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지금 출발하시오. 패율 선배와 제대로 연계해야 하오.”

“좋네.”

“그리고 이것을 가져가시오.”

연호정이 모용군에게 흑색 주머니를 건넸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이걸 쓰라고?”

“그만큼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해 주시오. 설령 임무에 실패할지언정 당신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되오.”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말이로군.”

“스스로의 무공을 과신하지 말고, 써야 할 때는 과감하게 쓰시길 바라오.”

“좋네. 작전장(作戰長)의 조언대로 하지.”

“가시오.”

번쩍!

한 줄기 광채가 튀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모용군이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무시무시한 신법이었다. 강량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자.”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나와 함께 이동해야 할 걸세. 섬멸전에 특화된 무공이라 하나, 자네의 창술은 방어에도 용이해. 만에 하나의 사태에서 나를 지켜 줘야 하네.”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기단은 적지를 쓸어 버리기만 하는 전투 부대가 아니야. 때에 따라서는 수성의 임무도 맡아야 하지.”

그리고 그러한 부대의 대장이 바로 황석태였다. 공수 양면의 균형에 있어서만큼은 연호정에 필적, 아니 그 이상인 사람이 그였다.

“마지막으로 강량.”

“예, 형님.”

가만히 강량을 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임무에 사감을 섞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만, 솔직히 걱정스럽긴 하다.”

강량이 씨익 웃었다.

한숨을 쉬며 투덜거리듯 말하는 연호정이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걱정되었다면, 말없이 함께하거나 절대 죽지 않을 거라며 자신감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대놓고 걱정을 표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자신을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저도 제가 걱정스럽습니다. 솔직히 좀 떨려요.”

“당연히 떨려야지. 긴장 안 하면 손도 못 쓰고 죽는다.”

“알고 있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너의 검은 이미 경지에 올랐어. 사실상 완성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하나의 무공을 완성했다 하여 끝이 아니야. 무공의 완성은 지난한 일이지만, 그 너머의 세상에서는 완성한 무공을 자신만의 무도로 가꾸어 나가는 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예.”

“너 역시 그러한 반열에 올랐다. 이번 전투가 너의 무공에 큰 밑거름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말 계속 들으면 더 긴장합니다.”

“더 긴장하라고 하는 말이다. 말만 긴장했지, 눈빛이 아주 흥미진진 그 자체다.”

“하하하.”

연호정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너는 이곳에서 대기한다.”

강량의 눈이 빛났다.

“그러면 됩니까?”

“그러면 된다. 문제는 예비 병력으로서 움직일지, 그 자리에서 끝까지 전선을 사수할지 판단하는 건 전부 네 몫이라는 것이다.”

“역시 그렇군요.”

“긴말 안 하겠다.”

연호정이 강량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를 믿는다.”

강량은 젊은 나이에 많은 경험을 쌓은 고수였다.

경험이 많아도 젊은이의 혈기는 가끔씩 눈을 가리는 법.

하지만 강량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항상 경박한 말투와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여 주지만, 실제로는 몹시 냉정하고 판단이 빠른 사람이 그였다.

젊음이 주는 직관적인 추진력. 거기에 전투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경험과 천재적인 무공까지.

어찌 보면 가장 쉬울 수도, 또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울 수도 있는 임무가 강량에게 떨어졌다.

“그간 형님 옆에서 오만 미친 상황을 다 겪어 보지 않았습니까.”

강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판단을 믿으십시오.”

“물론 그럴 것이다.”

“먼저 갑니다.”

파악!

강량이 귀신처럼 은밀하게 사라졌다.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우리도 움직일까?”

“좋네. 한데, 지금 움직여도 되겠나?”

“음?”

“서벽을 뚫고 들어간 패율, 서북벽을 통해 내원으로 향하는 모용가주, 남벽 대기 장소에 강량. 거기에 자네는 동벽으로 향한다고 하지 않았나.”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동벽으로 향해 봤자 괜한 이목만 끌 뿐인데, 굳이 지금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동벽으로 가지 않네.”

“뭐?”

“우리가 갈 곳은.”

연호정이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유독 먹의 두께감이 짙은 곳이었다.

“이곳이야.”

“……!!”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이곳으로 향할 생각인가?”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네.”

“당가주가 싫어할 텐데.”

“증오는 임무를 성공시킨 연후에 받아도 돼.”

“……자네, 애초에 그쪽을 공략할 생각이었군.”

“맞네.”

“아군을 속이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나?”

“적을 속이기 전에 아군부터 속여야지.”

“…….”

연호정이 우측방을 바라보았다.

골목길 너머 멀리에 우뚝 솟은 주루가 보였다. 녹수주루였다.

“당관이라는 사람은 당가의 주인이야. 당가의 주인은 아무나 될 수 없지. 홀로 당가 혈족 모두를 상대할 수 있을 만한 지혜와 힘을 갖추지 않고서는 결코 가주위에 오를 수 없어.”

“…….”

“그런데도 우리는 당가주님을 녹수주루에 박아 놓고 사령탑을 만들었네. 차라리 패율 선배의 임무를 당가주님께 맡긴다면 더더욱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네.”

“이유는 간단해.”

녹수주루를 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 눈빛에는, 과거 흑암제 시절 만독제 당관에게 단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강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당가 내 주요 인물은 물론 당가타의 모든 인물이 당가주님을 주시할 것이기 때문일세. 존재 자체만으로도 당가의 움직임이 절반은 마비될 거야. 그건 직접 손을 쓰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만들어 내지.”

“으음.”

“나아가, 당가주님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셨네. 가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할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깝지.”

“그건 그렇지.”

“그래서는 안 돼. 끝까지 위엄 있게, 고고한 절대자로서 남아야 하지. 그래야 당가의 재건도 빨라질 거야.”

그 하나를 위해, 남은 사람은 목숨을 건다.

아마 다른 가문의 일이어도 당관 역시 연호정과 함께 목숨을 걸어 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관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쉽지 않다.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한데, 그러한 절대자로 남게 하려면 ‘그’를 만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아니지. 그건 경우가 달라.”

“음…… 하기야, 자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어쨌든 우리도 이만 일어나지.”

“좋지.”

연호정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일었다.

“과연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 * *

주르르륵.

두 사람의 칠공에서 조금씩,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온몸을 기괴하게 뒤틀며 바르르 떠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지독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도대체 어떤 독을 어떻게 사용한 건지, 두 사람의 사지 중 두 군데의 관절이 역으로 꺾여 있었다.

피와 땀은 물론 소변까지 지렸다. 고약한 악취가 났다.

하지만 당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에 쓰러진 여인의 시체는 어느새 두 사람의 옆에 처박혀 있었다.

“후우.”

가득 차 있던 술잔이 다시 비워졌다.

당관은 습관처럼 잔을 채웠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그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

당관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당가의 전각 몇 개가 보였다.

“……역시 그랬군.”

사장로의 심장에 박아 둔 영사독(靈砂毒)의 실이 툭 끊겼다.

죽은 것이다. 아마 당호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동생아.”

당관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눈썹은 일그러지고 눈빛은 살벌했다. 그런데도 미소를 짓는다.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너는 그리도 쉬운 놈이라는 걸, 알고 있느냐?”

잠시 후.

쿠르르릉.

당가의 대문에서 삼백이 넘는 기척이 느껴졌다. 녹수주루 근처에 대기한 정예병 백 명에, 삼백의 병력을 더 보낸 것이다.

당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힘겨루기는 취미가 아니거늘.”

그 무거워진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려면, 몇 번 난장을 부려야 할 것 같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