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87화 (586/963)

587화. 독지(毒地), 그리고 혈지(血地) (2)

“미친!”

수문장 당죽산은 미칠 것만 같았다.

“저 무도한 놈을 잡아라!”

훅!

당가의 외원과 대문을 수호하는 부대, 천양단(闡揚團)의 무사들이 담벼락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빠르고 절도 있었다. 탄력 있게 나아가는 신법엔 한 치의 낭비가 없었고, 두 눈은 목표물을 향해 완벽히 고정되어 있었다.

명문의 호위 부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수문장을 비롯해 그 문파의 힘을 보여 주는 이들인 만큼, 선별된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방계 혈족이 대다수라지만 그들의 무공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닌바.

피유우우우웅!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양단의 무사들은 습격자를 잡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습격자의 무공이 천양단의 무사 중 누구보다도 강하고 빨랐던 것이다.

콰르르릉!

내치는 창격에 무시무시한 발경이 함께했다.

길고 무거운 장창도 아니요, 장검 정도의 길이에 불과한 단창 일격으로 높고 두터운 당가의 서벽(西壁) 한쪽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익!”

당죽산의 얼굴이 붉어졌다.

“계속 암기만 쓰지 말고 독을 풀어라!”

펑! 퍼퍼퍼펑!

그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습격자의 코앞에서 허연 독무가 터졌다.

굉장한 용독술이었다. 독주머니를 던지거나 독장을 뿌린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독무가 폭발했다.

합성독의 폭발이었다. 제각기 성질이 다른 독 가루는 진즉에 뿌렸고, 상승 작용으로 더 강한 독력을 끌어내 폭발시키는 당가의 대표 절기, 폭상독진(爆傷毒陣)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퍽! 퍼버벅! 퍼억!

허연 독무 속에서 살벌한 타격음이 들렸다.

당가의 무사들은 독과 암기 외에 권각술을 필수로 배운다. 접근전이라 하여 그냥 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가 무공 중엔 뛰어난 검술과 창술, 편술 등 병기술도 많았다.

그러나 당죽산은 확신했다. 지금 저 소리는 천양단의 무사들이 습격자에게 가하는 권각의 타격음이 아니라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퍼어어억!

무자비한 소리와 함께 무사 둘의 몸뚱이가 당죽산의 머리 위를 지나쳐 날아가 내원 외벽에 부딪혔다.

“……!”

당죽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후우우우웅.

바람에 흩어진 독무, 그 속에 드러난 습격자의 모습은 홀로 오롯했다. 반면 주변에 쓰러진 무사들의 수는 무려 열다섯이 넘었다.

‘이……!’

그 짧은 시간에 열다섯 무사를 쓰러트리고 둘을 날려 버렸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무력이었다. 치고 빠지는 움직임도 대단했지만, 저 독무 속에서 일류의 무사들을 단숨에 쓰러트린 무공은 정녕 대단한 것이었다.

‘절정고수?!’

모르겠다. 상대의 무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압도적인 기파를 발산해 내거나 끔찍한 살기를 피우지도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때였다.

느닷없이 번뜩이는 살의에, 당죽산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날렸다.

쉬이이익! 가가가가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외벽에 거대한 검상이 새겨졌다.

수직으로 새겨진 검상, 먼 거리를 뚫고 쏘아진 검풍(劍風)이었다.

당죽산의 이마에 식은땀이 어렸다.

‘이런 미친!’

절정고수? 웃기는 소리다.

찰나지간 이만한 참격을 날리고도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서벽 뒤쪽으로 몸을 날리는 자.

‘초절정고수구나!’

무종지벽을 돌파한 진짜배기 고수였다.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진짜들의 세상, 그것이 무종지벽 너머의 경지다.

실제 무림의 대문파를 뒤져 보면 그와 같은 경지에 오른 고수는 은근히 많았지만, 문제는 습격자의 연배였다.

언뜻 보아도 불혹이나 되었을까 싶은 얼굴이었다. 문내 고위급 장로들보다도 훨씬 젊은 나이인데, 그 무력은 장로들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째서 독이 통하질 않는 거지?!”

그렇다.

암기야 어떻게든 피하거나 쳐 낼 수 있다. 그러나 습격자는 폭상독진의 독무에 장기간 노출되었다.

그런데도 움직임에 전혀 제약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을 받는 듯, 움직임 하나하나에 생동감이 넘쳤다.

퍼어엉!

더 이상 외벽을 날려 버리는 데에 흥미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창검을 고쳐 쥐던 습격자가 단숨에 뚫린 외벽 안으로 들어갔다.

앞에서 무사들이 막고 있는데도, 너무나도 쉽게 내부로 파고들었다. 근본적인 실력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당죽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럴 때가 아니구나.’

당죽산이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단주님을 모시고 와라! 비상이다! 상대는 폭상독진이 통하지 않는 초절정고수다!”

당죽산의 외침은 빠르게 전파되어 외원에서 활동 중이던 천양단의 무사 대부분을 움직였다.

‘좋군.’

날카롭게 곤두선 기감에 수많은 인기척이 잡혔다.

외부에서 상대했던 이들보다 한층 더 막강한 무력이 느껴졌다. 게다가 숫자도 훨씬 많았다.

패율이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그놈 말이 맞았어.”

당가 놈들과 싸우는 건 영 재미가 없다. 그저 위험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오싹함만큼은 어떤 전장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사나움으로 다가왔다. 만약 당가주가 제조해 준 약을 먹지 않았다면, 벌써 중독되어 내력의 흐름이 느려졌을 것이다.

게다가.

“홀로 당가의 외벽을 깨부수고 침입한 최초의 무림인이라…….”

패율이 씨익 웃었다.

“그래도 그만한 영광 하나는 건져서 가는군.”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저놈이다!”

“침입자다! 죽여라!”

“죽이지 마! 생포해서 놈의 정체를 밝혀야 해!”

그야말로 난리였다.

잘 훈련된 움직임이지만, 당가는 침입자를 상대로 제대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위험한 가문이지만, 명령 체계에 혼동이 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무사들은 당장 패율을 죽일지 살릴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패율에게 있어 상당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제대로 날뛰어 주지.’

우우우웅!

단창에 시퍼런 광채가 모여들었다. 관일공의 공력이 모이고 있는 것이다.

파아악!

전방으로 몸을 날린 패율이 검을 뻗었다.

찌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뒤로 젖힌 단창이 나아갈 길, 그 곧은 길을 만들기 위한 가늠의 역할이었다.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콰앙!

힘찬 진각으로 힘을 받은 그가 빛살처럼 단창을 휘둘렀다.

퍼어어어어엉!

* * *

“이가주님!”

당호가 집무실로 뛰어 들어온 무사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무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실언을 하였습니다.”

“……괜찮네.”

당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직 입에 붙지 않았을 테니 그럴 수 있지.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가주위에 오른 것도 아니니까. 이해하네.”

“송구하옵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관의 존재가 버젓한데, 당당히 가주라 부르라고 한다.

이미 당가 전체를 휘어잡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당씨 문중의 가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것인지, 그 귀계와 능력만큼은 알아줄 만했다.

“그래, 어인 일인가?”

“문중 서벽 인근에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순간 당호의 눈이 은은한 적록색 광채를 뿜었다.

“침입자라 함은?”

“굉장한 고수로 추정됩니다. 보고받은 무력으로 볼 때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로 유추됩니다.”

당가는 넓다.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거대한 성과 같은 영역을 감싸고 있다. 제아무리 당호가 뛰어난 고수라 한들, 내원 집무실에서 외벽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훤히 느낄 수는 없었다.

다만, 위화감 정도는 느꼈다.

“어쩐지 서쪽에 괴이한 위화감이 느껴지더니만, 그것이 침입자 때문이었나.”

무사의 얼굴에 경이가 어렸다.

이곳에서 외벽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곳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연성해야 그와 같은 직감을 갖게 되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데.”

당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 명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당가 안에도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는 꽤 있었으며, 당장 당호만 해도 당관보다 한 수 아래일 뿐 천하 어디에서도 먹힐 만한 고수가 아닌가.

하물며 외인이었다. 어지간한 독에 내성을 가졌다 한들, 당가지독(唐家之毒)에 걸리는 순간 경지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폭상독진에도 멀쩡했다고 합니다.”

“폭상독진을 버텼다고?”

“그렇습니다.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입니다.”

당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봤자 폭상독진이었을 뿐이다. 그 이상은 버틸 수 없을 테지.”

그런 건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당가의 극독을 버틸 수 있는 고수는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내원 음혼단주(陰魂團主)에게 전하라. 속히 가서 놈을 사로잡으라고.”

“생포입니까?”

“놈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알아봐야지.”

“그렇지만…… 침입자의 기세가 상당히…….”

“이보게.”

당호가 미소를 지었다.

노려보는 것보다도 훨씬 섬뜩하게 느껴지는 뱀의 미소였다.

“가주인 내가, 그리하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순간 무사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허허.”

당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당가는 용서와 화합으로 새로 태어날 것일세. 다만, 윗사람의 권위가 죽어서도 아니 되는 법. 자네도 잘 이해했으면 좋겠군.”

“죽여 주십시오!”

“괜찮네. 용서할 테니, 어서 음혼단주에게 내 말을 전하도록 하게나.”

“예!”

무사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무사가 나가자 당호의 얼굴이 북해의 바닷바람처럼 싸늘해졌다.

“건방진 놈 같으니.”

당호가 가내 가인들을 사로잡은 가장 큰 무기 중 하나가 바로 가풍의 급진적인 변화였다.

그것을 위해서 당호 역시 성질에도 맞지 않는 인내심을 보여 줘야 했다. 적어도 가문이 안정될 때까지는 마음씨 좋은 주인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범이 사슴 흉내를 내려니 좀이 안 쑤실 수가 없다. 당호는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서서히 억눌렀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당관이 왔다.

가문의 정보력을 어떻게 뚫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극도로 당황했고, 조금 전까지 수뇌부들과 회의를 하다 돌아온 참이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당황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당관은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다소 엉성하나마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생각하면 그뿐이었다. 그래서 장로들과 정예병들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 정도 병력이라면, 당관을 잡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큰 피해는 줄 수 있으리라.

‘다만.’

당호의 눈이 서쪽으로 향했다.

‘이 시기에 느닷없이 침입자라…… 당관이 부리는 놈인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놈들, 아니 당관은 뭔가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침입자를 보내 이곳의 분위기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겠지만, 너는 절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실 불안했다. 침입자가 누구인지, 놈의 목적이 무엇인지 당장 달려가서 직접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당호는 참았다.

수장이 흔들리면 가문이 흔들린다. 그는 이곳,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가, 가주님!”

“무슨 일인가.”

“사장로가, 사장로가 가주님을 뵙길 청합니다!”

“뭐?!”

당호가 벌떡 일어났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