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독지(毒地), 그리고 혈지(血地) (1)
당묵은 당황했다.
‘어떻게?!’
갈행전음은 사천당가 비전의 전음술로, 여느 강호인들이 쓰는 전음술과는 근본 원리부터가 달랐다.
그러한 전음술을 따로 만든 이유는 당가의 지독한 폐쇄성에 근거했다.
독과 암기의 조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당가 이후, 그 어떤 문파도 이처럼 체계적이고 신비로운 무공을 만들지 못했다.
일말의 파훼법조차 구상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은밀함. 갈행전음은 성천의 고수가 아닌 이상 누구도 엿듣지 못하는 당가의 비술이었다.
그런 비술을, 아무리 당씨 문중의 주인이라고는 해도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말도 안 돼!’
갈행전음 자체가 가주의 허가 없이는 익힐 수 없는 공부다. 그래서 비전 독술과 암기술을 가르치는 데 제한을 두었고, 실제로 갈행전음을 연성한 당가인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 많지 않았다.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낙원소가 만들어진 이후, 음지에서 훈련된 무사들은 갈행전음은 물론 당가의 독공과 암기술도 철저히 배웠다.
녹수주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 대다수가 당가인이었고, 그들 모두가 당호에게 포섭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갈행전음만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어지간한 당가의 직계 혈족보다도 성취가 높았다.
중요한 것은, 갈행전음의 은밀함이 외인과 당가인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종지벽을 뚫은 초절정고수라도 오 성(五成) 이상의 갈행전음을 엿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당관이 무극지경을 돌파한 게 아닌 이상 팔 성의 성취를 이룬 갈행전음을 엿듣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럴 수가 있나! 설마하니 가주가 벌써……?!’
그때, 당관이 말했다.
“왜? 놀라운가?”
“……!”
“설마하니 자네들은, 당씨 문중의 주인이라는 자리가 그저 무공 조금 강하다고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자리인 줄 안 것은 아니겠지?”
장로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당관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당씨 문중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직계 혈족 모두를 삼십삼 초 이내에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갖추어야 한다.”
“……?!”
“너희는 알 리가 없지. 그 증명은 철저히 선대의 시험으로 이뤄지며, 그조차도 문중의 주인이 되기 위한 여러 시험 중 하나일 따름이다.”
“…….”
“무공이 더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씨 문중의 주인은, 당가 내 모든 사람의 생명줄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이다. 그에 걸맞은 실력 없이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무공의 경지가 더 뛰어나다고, 그 많은 직계 혈족들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있을까?
가능할 리가 없다. 설령 성천의 고수라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당씨 문중의 주인 자리는 아무나 맡을 수 없는 것이다.
단 한 번의 변칙적인 독술, 단 한 수의 은밀한 암기술로 대등한 고수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자.
손 한 번 휘둘러 휘하 독인(毒人)들의 내공을 제어하고, 고함 한 번에 쏟아져 내리는 암기의 비를 모조리 튕겨 내는 독암(毒暗)의 화신.
그것이 바로 당가주다.
다른 가문의 수장들과의 싸움에선 손해를 볼지언정, 휘하 가인들이 떼거리로 덤벼도 코웃음 치며 상대할 역량이 되는, 말 그대로 당씨를 대표하는 사천의 제왕인 것이다.
“내가 이 사실을 너희에게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일꼬?”
당관이 다시 빈 잔을 채웠다.
“어차피 너희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 가주님?!”
“배반자를 살려 둘 정도로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 줄 줄 알았다면, 그 또한 오해이니라. 나는 이번 반역에 연루된 사람은 한 명도 살려 둘 생각이 없다. 다만…….”
당관이 잔을 들었다.
코앞에서 살랑거리는 주향이 무척 독했다.
“편히 죽이느냐, 스스로 죽음을 원할 만큼 고통스럽게 죽이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장로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당관이 시원하게 잔을 비우자, 당묵이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가주님.”
“오해.”
“저, 저희는 가주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이런 황망한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
“바로 그 말, 그것만으로도 너희는 이미 내게 무례를 범했다.”
당관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가주가 하는 일에 감히 토를 달아?”
“……!!”
“호아가 그러더냐? 본가의 가풍을 바꿔 보겠다고? 지금처럼 독하고 철저한 가문이 아닌 유연하고 도덕적인 가문을 만들어 보겠다고 꼬드기기라도 했던 것이냐?”
“가주님!”
“쓰레기 같은 것들!”
쾅!
당관의 주먹이 탁자를 후려쳤다.
“여물지 못한 젊은 놈의 정신 나간 야망을 다그치지는 못할망정, 다 늙은 몸뚱이로 그에 휩쓸려 수백 년 본가의 이름에 먹칠한 것도 모자라 가주를 잡으러 병력까지 끌고 와?! 너희가 제정신이란 말이냐!!”
쩌어어어엉!
장로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흥분해서가 아니었다. 당관의 매서운 질책, 그 질책 속에 깃든 무시무시한 내공력이 그들의 단전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당묵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런?!’
당관의 실력은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독술? 암기술? 거기까지는 모른다. 하지만 결단코 맹세컨대, 당관의 내공은 이만큼 대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장로원주보다 두어 단계 더 높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이런 거대한 내공을 언제 쌓았단 말인가!’
마치 독을 품은 영물의 내단이라도 취한 듯, 이전보다 두 배는 더 막강한 내력을 보여 준다.
내공도 내공이지만 무공 자체가 진화했다는 느낌이었다. 독하고 악랄한 내공 속, 제왕의 품격이 느껴지는 새로운 독공(毒功)이었다.
당관이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잔을 비우면서도 그의 눈은 세 장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살벌한 안광에 장로들은 침만 꿀꺽 삼켰다.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초절정고수인 그들 중 누구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선수를 칠 생각도, 눈 하나 깜빡할 생각도 못 했다.
당관이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좋다.”
빈 잔이 탁자에 놓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컸다.
“마음 같아선 사흘 밤낮이고 호통을 치고 싶다만, 고작 너희 따위의 소인배들에게 시간을 쓰는 것도 아까운 일이겠지.”
“…….”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내 너희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
기회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너희 셋 중 하나만 살릴 것이다. 살려서 당호에게 전령으로 보낼 것인즉, 제시간 안에 돌아오면 당씨 성을 박탈함과 동시에 사천에서 쫓아낼 것이다.”
“……!”
“남은 둘의 목숨은 없다. 동이 틀 때까지 온몸에서 땀과 오물을 쏟아 내며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할 것이니.”
당관의 두 눈에서 은은한 녹광이 번뜩였다.
순간 세 사람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츠츠츠츠츠.
당관의 몸에서 반투명한 녹색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잘 통제해 왔던 분노가 살의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다. 그 약간의 독연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숨쉬기 어려울 만큼 답답해졌다.
“먼저 무릎을 꿇고 잘못을 인정하는 자를 전령으로 쓰겠다.”
스르륵.
당관이 자세를 바꿨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 다리를 세웠다. 오른손에 쥔 술병이 기울어지매, 빈 잔이 서서히 채워졌다.
“반 각 안에 잘못을 시인하는 자가 없다면 너희 모두 죽지도 살지도 못할 것이요, 반역자로서 본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관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코앞에 장로들이 있지만, 감히 자신을 공격하진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방비도 이런 무방비가 없었다.
그의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절대적인 자신감의 증명이었다. 세 장로가 동시에 암습을 가한다 한들 털끝만큼도 손해 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했다.
“…….”
묘한 침묵이 어렸다.
그 침묵 속에서, 잔이 채워지는 소리와 다시 비워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우우우웅.
당관의 오른손 끝에서 은은한 진녹색 구체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가주님!”
오른쪽에 있던 장로, 당산이 무릎을 꿇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헛된 욕심에 눈이 멀어 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당묵과 나머지 장로, 당후가 놀라서 당산을 바라보았다.
“사장로!!”
“다 늙어서 노욕을 부렸으니, 이는 천 번 죽어 마땅한 대죄이옵니다! 다만 이 불쌍한 늙은이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차후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당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놈이!”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당산의 목을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우두둑!
‘……?!’
상반신까지 틀어서 날린 수공(手功)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당묵의 손끝은 당산의 목덜미 반 치 앞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당묵의 어깨는 그대로 탈골되어 흉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당묵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관이 잔을 들며 말했다.
“아슬아슬했구나. 하나 기회의 끈을 잡았으니, 네 목숨은 살려 주겠다.”
“이런 젠장!”
벌떡 일어난 당후가 당관을 향해 쌍장을 휘둘렀다.
“죽어!”
훅!
휘몰아치며 쏘아진 독장(毒掌).
하지만.
‘……!!’
응당 당관의 몸에 적중되었어야 할 독장은 발출되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당후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자신의 장력이 뿜어져 나오자마자 흩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당묵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 화공신산(化空神散)?!”
“오호.”
당관이 피식 웃었다.
“서열 하나 더 높다고, 와중에 더 낫기는 낫구나.”
화공신산은 당가의 독 대부분을 와해시키는 파훼독이었다.
문제는 그 독을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정확한 용량과 시간, 흩어짐의 정도를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전대가주를 제외하고는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당후의 독장은 외물의 독이 아닌 내공의 독이었다.
그 독조차도, 무종지벽을 돌파한 독인(毒人)의 독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려면 대체 얼마나 복잡한 용독술식(用毒術式)을 계산해야 하는가?
‘아차!’
그제야 당묵은 깨달았다. 당관이 자신들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주루 전체에 화공신독의 절진을 깔아 두었다는 것을.
거기에 내공까지 묻혀, 이 영역 내에선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자신만의 전장(戰場)을 만들어 두었다는 것을.
‘이, 이것이…….’
당묵이 침을 삼켰다.
‘이것이 가주의 역량……!’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극상승의 약물을 찰나지간 분해하여 완벽하게 제어하는 천상의 용독술.
적이 오기도 전에 이미 승리를 쟁취해 놓고 싸움을 시작하는 사천 최고의 전술가.
한 줌의 독으로도, 한 줌의 암기로도 휘하 가인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당씨 무공 최고의 권위자.
“약속은.”
당관의 동공이 진녹색으로 물들다 못해 점점 시커멓게 변해 갔다.
“지켜야겠지?”
퍼억!
갑자기 머리를 튕긴 당후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부르르르르르.
당후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비명도, 신음도 없었다. 두 눈은 이미 흰자위만 보였고, 코에서는 시커먼 핏물이 흘러내렸다. 입가엔 게거품이 맺혀 있었다.
순식간에 중독되어 극한의 고통에 물들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당묵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쓰러져 벌벌 떠는 그들을 보며, 당산은 침을 삼켰다.
“당호에게 전해라.”
당관이 빈 잔을 들었다.
“이곳에서 형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속히 오지 않으면 평생 뇌옥에 갇혀 무간의 고통 속에 죽어 갈 것이라고.”
“예, 예!”
“네 심장에 드리워진 독은 반 시진 안에 활동을 시작할 것이다.”
당관이 귀찮은 듯 빈 잔을 휘둘렀다.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