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반역의 향기 (6)
훅!
도시의 입구라고 해야 할까.
당가타의 거대한 영역이 시작되는 곳, 그 입구에서부터 은은하게 퍼져 나가는 위엄이 있었다.
무공을 연성한 이들은 물론, 기감에 둔감한 양민들까지 모두가 쳐다보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
바로 그곳에서, 한 명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스르륵.
자연스레 걸어오는 그 걸음에 묵직한 기파가 연기처럼 치솟다가 잠잠해진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과 집중을 빼앗는다. 그 정도로 막강했고, 그 정도로 깊은 기도를 갖고 있었다.
사라락. 사라락.
걸음에 따라 자연스레 흔들리는 양팔.
허리춤에 스치는 소맷자락, 정강이를 스치는 장포 자락의 소리가 묘한 공포심을 자아냈다.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했다.
옷의 자태가 실로 대단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색이 어두운데도 화려한 느낌을 주는 의복은 사내의 기도를 두 배, 세 배 확장시킬 것처럼 오연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완벽하게 정리된 의관. 조금은 창백한 피부에 날카로운 인상.
그 어떤 병기를 쥐지 않았음에도, 존재 자체가 천하에 산재한 신검마도(神劍魔刀)보다도 위험해 보이는 자.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헉!”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비유일 뿐이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그 비유를 담백한 현실로 만들 만큼의 살벌한 마력을 갖고 있었다.
“실로.”
남자의 음성은, 그 존재감만큼이나 낮고 탁했다.
“오랜만이로군.”
울림통이 썩 크지 않은 듯한데, 퍼져 나가는 음성이 거대한 범종 소리에 필적한다.
저물어 가는 해, 석양빛 아름다운 세상 아래에 보다 빠른 어둠을 가져온 자가 여기에 있었다.
“당가주님?”
“가주님!”
“허억! 다, 당가주님이시다!”
거리를 활발하게 오가던 사람들이 저마다 무릎을 꿇었다.
“당가주님!”
“당가주님을 뵙습니다!”
남자,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광경이었다.
당관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고관대작처럼, 아니 고관대작 이상의 존재가 온 것처럼 그를 본 모든 사람이 절을 올렸다.
이것이 바로 사천의 주인, 당관의 존재감이다.
사천 지역 안에서만큼은 가히 황제나 다름없는 경애를 받는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고, 모두가 그를 신뢰했으며, 모두가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였다.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당관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애초에 이런 것을 바란 적도 없었다. 오히려 직계 혈통들이 은연중 거만을 떤다는 보고를 받으면, 하나하나 잡아서 주리를 틀라고 시키던 것이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그들에게 일어서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한 노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
“…….”
“이, 이것을…….”
노인이 품에서 댓잎에 쌓인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이것이 무엇인가?”
“저, 저희 가게에서 새로 만든 먹거리입니다. 물론 가주님 입맛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세상 풍파를 겪을수록 눈치가 느는 법이다.
노인은 당관의 모습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드러움을 보았다. 남들은 그 기세에 압도당하여 옴짝달싹도 못 했지만, 노인만큼은 당관의 내면 일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관은 댓잎에 쌓인 무언가를 보았다.
뜨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밥이며 고기며 갖은 재료가 잔뜩 들어 있을 것이다. 냄새가 그러했다.
눈치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진심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필 지금 나서서 이 요리를 준다는 것은, 노인이 언제고 자신에게 요리를 대접하고 싶어 했다는 뜻일는지 모른다.
당관이 노인이 건넨 요리를 받았다.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참이었네.”
“아!”
노인이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
“영광일 따름입니다.”
노인의 뒤통수를 보던 당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음식을 받았을 뿐이다. 감사의 표현은 오히려 자신이 해야 했다.
한데 정작 음식을 준 사람이 황송해한다. 애초에 받아 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이었군.’
분타를 들렀을 때도 느꼈던 바였다.
‘바로 여기서부터, 나의 통치가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가내의 대소사를 처리하고 믿음직한 인선을 배치해 사천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한 지역의 패자를 자처한다면, 이 거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민심은 어떠한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보고를 듣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껴야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고작 삼십여 장도 걷지 않았는데 느끼는 바가 컸다.
당관은 댓잎 요리를 품에 안고 당가타를 가로질렀다.
“억?!”
“가, 가주님!”
“가주님을 뵙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두가 당관에게 인사를 올렸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나아가던 당관의 눈에, 마침내 오 층짜리 주루가 보였다.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든 오 층짜리 주루는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녹수주루(綠水酒樓)였다.
당관은 그곳을 향해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이미 소문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일 층에 나와 있던 루주가 당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당관이 물었다.
“최상층에 자리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한 자리 깔아 주게.”
“예!”
당관은 루주의 안내를 받으며 오 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그를 본 모두가 잔이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자리로 안내한 루주가 당관에게 물었다.
“술은 항상 드시던 것으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래 주게.”
“예. 안주는 금방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괜찮네.”
당관이 댓잎 요리를 탁자에 놓았다.
“안주는 이것으로 충분해.”
“아, 예!”
루주가 고개를 숙이며 총총걸음으로 물러났다.
잠시 후,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술과 잔을 갖고 들어왔다.
당관이 손을 들었다.
“따를 필요 없다. 이만 나가 보아라.”
“예, 대인.”
여인이 나가자 당관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양빛이 유독 빨갛게 보였다. 근래 사천의 하늘이 유독 맑았는데, 저 석양 너머의 구름을 보니 내일은 또 일조량이 적을 것 같았다.
‘왔군.’
창가에서 시선을 돌린 당관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채운 잔을 들던 당관은 순간 멈칫했다.
‘위인가.’
당가타로 들어온 순간부터 당관의 기감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그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이 녹수주루 꼭대기에 올라선 누군가의 인기척을 잡아냈다. 석양빛이 쬐는 반대편, 건물 지붕으로 은밀하게 이동한 그의 은신술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누구인지, 당관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재주가 많군.’
언자방이다.
처음 그의 이름을 들은 순간 당관이 떠올린 것은 진주언가였다.
진주언가는 과거 하북성에 위치했던 명문으로, 팽가와 함께 하북성을 양분했던 이름 높은 무림세가였다.
타고난 체격과 천생대력(天生大力)을 바탕으로 몸뚱이만 한 칼을 휘두르는 팽가와 달리, 진주언가는 팽가 못지않은 체격으로 온몸을 강철처럼 만드는 체술에 능했다.
나중에는 강함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 비인외도의 술이라 불리는 강시술에까지 손을 대 만인의 지탄을 받고 멸망해 버린 비운의 무림세가이기도 했다.
‘쓸 만하군.’
은신술만 보자면 당가의 어떤 무사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다. 당가가 운용하고 있는 정보대인 녹안대(綠眼隊)보다도 뛰어난 은신술이었다.
무종지벽을 돌파하여 완숙에 이른 경지, 거기에 이 정도 은신술까지 가능하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마음먹고 죽이려 들면 대문파의 장로급 고수라도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탄 속에서, 당관은 착잡함을 느꼈다.
‘몰락한 가문의 후예라…….’
한때는 팽가와 함께 하북의 패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희대의 권법 가문의 후예가, 지금은 살수들이 익히는 은신술까지 연성했다.
거친 강호에서 쓸 줄 아는 무공이 많으면 좋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 고수가, 은신술을 쓸 줄 아는 놈을 부리진 못할망정 스스로 그 영역에 뛰어들었다.
가문을 잃은 자의 비애다. 실력을 보니 사라진 언가의 무공을 어느 정도 완성한 것 같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모용군의 수하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다 그렇지.’
당관이 잔을 비웠다.
‘인정받지 못한 명예 속에서 썩어 가는 가문의 망령은, 후손들을 저리 만드는 법이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품에서 작은 약포를 꺼내 들었다.
그가 약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퍼석!
약포가 터지며 미세한 분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걸로 끝이었다. 순간적으로 텁텁해진 공기는 금세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관의 진기는 달랐다.
약포가 터지고 분말이 방을 가득 채운 순간, 그의 무형지기(無形之氣)는 분말을 낚아챔과 동시에 녹수주루 전체로 퍼트렸다.
화르륵!
장심(掌心)에서 뿜어져 나온 염화분(炎火焚)이 터진 약포를 그대로 태워 버렸다.
당관이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마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번쩍!
재차 술잔을 들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역시.’
천천히 잔을 비운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석양은 무겁고 어두운 흑청빛 어둠에 밀려 나고 있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군.’
왔다.
꽤 익숙한 기도들이었다. 얼추 백 명이 넘는 이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중 선두에 선 세 명의 기도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셋 모두 무종지벽을 돌파했다.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제대로 다듬어진 기도는 지극히 안정적이고 음험했다. 독공을 연성하며 깨달음을 얻어, 어느새 일가(一家)를 이룬 자들이었다.
당관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장로원.’
그는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당가 내부는 적지입니다. 가주님께 익숙한 지형이라도, 지금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됩니다. 말하자면, 지금 당가는 가주님께도 적지(敵地)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냐? 잠자코 기다리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들이 먼저 나올 때까지.’
‘……?!’
‘용두방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당가는 가주님이 등장하는 순간 초비상사태에 돌입할 겁니다. 며칠에 걸쳐 준비하려던 게 망가졌으니, 일대 혼란이 일어나겠지요.’
‘……음.’
‘만약 당가에서 가주님을 맞이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면, 그때는 용두방주의 말을 믿지 않기로 합니다. 하나 가주님을 막기 위한 병력이 온다면, 그때는 용두방주의 말을 사실로 생각한 연후에 작전에 임할 겁니다.’
연호정의 말이 맞았다.
저들은 장로들이다. 그것도 저만큼이나 완숙한 기도라면, 최소 오 위 이상의 서열을 지닌 이들이리라.
‘기어이 네놈들이, 같잖은 욕심 때문에 가문의 법도를 쥐어뜯었단 말이지.’
우우우우웅.
당관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불편한 심경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분노가 폭발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당관은 이내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마음 같아서는 즉시 창밖으로 뛰쳐나가 저놈들을 몽땅 갈아 마시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다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모집할 수 있는 전 병력을 끌어와 쓸어 버렸을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아예 가문을 완전히 밀어 버리고 새로운 주춧돌을 세웠을 것이다.
그럴 순 없었다.
반역자 몇 놈 잡자고 전쟁까지 벌일 수는 없었다.
또한, 그것은 당관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지금, 바로 이 순간.
모든 것을 바로잡는, 짧지만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가주님. 가문에서 사람이…….”
“들라 하라.”
“예.”
드르륵.
문이 열리고 세 명의 장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일견 환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미소 앞에, 마지막 비명을 지르던 석양빛이 완전히 죽어 버렸다.
“오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