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화. 반역의 향기 (3)
일행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고요한 이동이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놀라운 고수들이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했소이다.”
모용군이 선두의 당관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오.”
감정을 추스른 모용군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뒤에서 그를 보던 패율은 생각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 지독한 정쟁을 겪으며 완전히 갈라서 버린 사이건만 용케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구나, 싶었다.
놀라운 것은 당관의 대처였다.
“오랜만이오.”
생각보다 훨씬 차분한 대답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아는 일행 몇몇은 내심 깜짝 놀랐다. 모용군조차 묘한 눈으로 당관을 바라볼 정도였다.
일행 사이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잠시 후.
“타고난 천품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바뀌는 것이 사람이라고 믿고 있소이다.”
모용군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당가주께서도 예전보다 많이 유해지신 것 같소.”
“그렇소?”
“그렇게 보이는구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나는 여전히 당신이 싫소이다.”
“허허허.”
“본가를 도우러 온 사람을 굳이 박정하게 대하고 싶진 않은 것뿐이니 오해는 마시오.”
놀라운 발언이었다.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많이 바뀌셨구려?”
그렇게 많이 바뀌었나?
‘그럴지도 모르지.’
당관은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변했다고.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성품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대응하는 태도가 달라졌을 뿐이었다.
이전의 당관이었다면 언제까지나 날 선 대화를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아니었다. 그만큼의 여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모용군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이런 자에게 감정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이왕 도와주러 온 것, 제대로 움직여 보시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당가가 무너지면 사천이 무너질 것이오. 내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소?”
“…….”
“당가주께서 나를 믿지 않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할 때요.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진심일 것이다. 절반은.
당관은 모용군의 나머지 절반을 믿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믿지만, 그의 성품은 믿지 않는 것이다.
모용군은 제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을 자다.
물론 당가에서까지 난장을 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회만 보이면 이쪽이 상상도 못 한 꾀를 내어 제 살을 불리려 할 것이다.
‘상관없다.’
그렇다.
당관은 모용군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리 대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번 실패했다. 망가진 가문의 분위기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모용군이 아니라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당관은 몰랐다. 사도에 빠져 버린 자식을 목도한 아비의 심정이 이리도 비참하다는 것을.
당양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날카롭지만 잘생긴 그 얼굴에, 사특하기 그지없는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그저 바라보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운 괴인이 되어 버린 아들의 모습이.
당관이 눈을 감았다.
‘양선.’
아들을 잘못 키웠다. 부모로서 죄가 크다.
아들조차도 챙기지 못한 가주다. 가주로서 실격이었다.
더불어 가문의 힘은 강해졌지만, 그 안에선 광기에 미쳐 날뛰는 혈육들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관은 깊은 좌절과 통렬한 패배감을 느꼈다.
지금껏 잘해 왔다고 생각한, 적어도 남들 못지않게 잘 키웠다고 생각한 가문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자존심 하나만으론 엇나가 버린 가문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모용군에게 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당관이 눈을 떴다.
심경이 복잡했지만, 여전히 그의 눈빛은 깊고 깊었다.
“가문의 영역에 진입하자마자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소.”
“다들 알고 있을 것이오.”
“어떤 식으로 대비해야 할지는 모를 거요. 당가의 싸움은 당신들의 생각과 전혀 달라.”
모용군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당가의 싸움은 자신들의 싸움과 전혀 다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독과 암기를 다루는 가문이 아닌가. 여느 문파를 공략하는 것과는 위험도에서 차원이 다를 것이다.
하나, 그런 사실을 말하면서도 목소리에서 조금의 자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나 그가 아는 당관과는 달랐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목숨조차도.
당관은 이번 일에서, 제 목숨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문을 뿌리부터 뜯어고칠 생각이었다.
모용군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로 당관은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보는 것인가.
‘하긴.’
가문이 모르는 사이에 개판이 났다고 하면, 자신 역시 정상적인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자신의 동생 중 하나가 반역을 일으킨다면?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 지금껏 스스로를 숨기고 또 숨겼다면?
그리고 그것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면, 과연 자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럴 리는 없지만……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면, 아마 나는 당관보다도 더하겠지.’
대신 대응은 다를 것이다.
당관은 넋 놓고 당했지만, 자신은 그럴 리 없다. 자신에겐 망가진 가문을 한순간에 돌려놓을 힘이 있었다.
이처럼 타인에게 기대지 않을 것이다.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용군은 진정 그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곳이오.”
각자의 상념으로 가득한 일행.
새벽이 지나 동녘이 밝아 올 때, 일행은 연호정과의 접선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쉬시오. 싸가지한테 연락이 오기 전까지.”
당관이 뒷짐을 졌다.
“그리고 운공들 하시오. 진입하자마자 죽지 않으려거든.”
* * *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화진천이 말을 이었다.
“그래, 결국은 개방이었네.”
“…….”
“개방의 장로라는 놈들이, 명예를 저 멀리 던져두고 자유와 소박함에 젖어 살아야 할 십만개방의 장로라는 놈들이 고관대작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욕심을 알게 되었다네.”
“그 말이 사실이더라도…… 사천에는 개방의 지부가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많지. 실제로 그간 제법 많은 아해들이 이런저런 정보를 올렸다고 하네.”
화진천이 눈을 감았다.
“조사해 보니, 낙원소와 연관된 정보를 올린 아해들 대부분이 사고를 당했더군.”
“……!”
“물론 그 사고는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일어날 법한 것들이었네. 애초에 그 아해들은 낙원소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어. 자신들이 물어 온 정보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도 몰랐을 게야.”
“지부장들은 어떻소?”
“중원 전체에 깔린 본방의 아해들이 하루에 물어 오는 정보만 수십만 건이 넘을 걸세. 그 수십만 건의 정보를 추리고 추려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내게 전한다네.”
“…….”
“안타까운 일이지만, 납치나 살인, 강도 등의 범죄는 천하 각지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난다네. 지부장들에게 있어 그러한 정보들은, 어느새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은 정보가 되었다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정적으론 이해할 수 없지만, 생각해 보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낙원소는 자체적으로 사천의 정보를 통제하는 조직까지 만들었다.
개방의 사천 장로들을 포섭하고, 거기에 정보를 통제하는 조직까지 만들어 냈다.
천하의 개방이라 한들 낙원소의 존재를 알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존재를 알아내고 은밀히 조사하고 있던 기충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시게.”
연호정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졌다.
“고관대작들이 돈이 많은 건 알겠소. 사천삼강 출신들 역시 문파의 공금을 족족 빼돌릴 순 없더라도, 그 능력만으로 대단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을 것이오.”
“…….”
“하지만 그와 같은 조직을, 무려 십 년이 넘도록 키우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 필요하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들의 자금력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소이다.”
“그래, 이미 거기까지 도달했군. 하긴, 제대로 살펴보면 가장 의아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겠지.”
“그렇소.”
화진천이 탁자에 놓인 문서의 가장 마지막 장을 집어 들었다.
“이걸 보게.”
연호정이 문서를 읽었다.
잠시 후,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놈들의 자금줄을 역추적해 봤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네. 그럴 수밖에. 이미 놈들은 자신들의 사업체를 공고히 만들었어. 자체적으로 자금을 불릴 만한 체계를 구축했다는 말일세.”
“…….”
“여전히 조사 중일세. 아직 확실한 건 드러나지 않았어. 하나…….”
“서장(西藏)으로 가는군.”
“그렇다네.”
화진천의 눈빛도 어느새 날카로워졌다. 연호정조차 놀랄 만큼의 현기를 쌓았지만, 여전히 그는 용두방주였다.
“놈들이 벌어들인 금액 일부분이 서장으로 향하고 있네. 조사한 것만으로도 그 정도라면, 실상은 대부분이 새외로 새고 있을 가능성이 커.”
“…….”
“낙원소는 존재만으로 천문학적인 자금을 벌어들이고 있네. 그리고 그곳의 간부들은 조직 운영에 필요한 비용과 일정량의 공금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을 새외로 보낼 거라 추측하고 있지.”
“……삼교.”
“아직은 모르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네.”
찌익.
연호정의 오른손이 문서의 귀퉁이를 찢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버린 것이다.
화진천이 말을 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말해 줄까?”
“…….”
“우리는 아직 삼교를 잘 모르네만, 그들의 자금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건 정도를 벗어났다네. 황궁이나 관부 측에서도 자금을 뽑아내고 있겠지만, 그랬다면 뒤틀린 시장의 흐름을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
“…….”
“서장 무림까지도 삼교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처음 가득상과 연을 쌓았을 적, 그는 가득상에게 서장 무림의 동태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서장 무림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더랬다. 가득상은 그렇게 말했고,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알고 보니 서장 무림의 절대강자 소뢰음사와 포달랍궁이 삼교와 함께하고 있다면?
아니, 그들 외의 문파들도 삼교와 함께 중원 정벌을 노리고 있다면?
“핵심은 당가라네.”
연호정이 눈을 떴다.
화진천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청성과 아미는 구대문파로서 놀라운 전력을 보유하고 있네. 하지만 그들만으론 힘들어. 타락하지 않은 산중 고수들은, 경험은 풍부할지언정 수행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다네. 실제로 그래서도 안 되고.”
“…….”
“당가가 되살아나야 하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가를 본래대로 되돌려 놔야 해. 당가의 독과 암기, 화약과 기관은 사천 무림을 철통처럼 보호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이네.”
“…….”
“낙원소의 그 기관과 독, 암기들은 모두 당가에서 나왔네. 우리가 낙원소를 제어하는 동안 자네들이 당가를 되돌려 놓으면, 그때는 사천 무림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네.”
“…….”
“사천 무림이 튼튼해지면 놈들은 사천에 진입하기 힘들어져. 사천이 막히면 우회하여 들어올 것이요, 우회하여 들어오는 길은 매우 한정적이라네.”
화진천이 눈을 빛냈다.
“즉, 사천을 먹는 자가 세력전의 우위를 점할 수 있네. 당가를 되돌리면, 불리해진 전국의 판세를 단번에 뒤엎을 수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