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화. 반역의 향기 (2)
“자네를 처음 봤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이리도 흘렀구먼.”
“…….”
“그때의 자네는 참으로 위험해 보였더랬지. 사자니 호랑이니 말은 많았지만, 내가 본 자네는 짐승보다는 마귀에 가까웠다네. 내, 자네에게 따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지만 말이야.”
“…….”
“한데 지금은, 그 위험천만한 마귀의 성품은 어디로 갔는지 진정 산중 대왕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구먼. 그때와는 눈빛부터가 달라. 위압감은 커졌으되, 맑고 깊은 그 눈빛에 협(俠)과 정의(正義)가 자리 잡고 있구먼. 벽산의 호장이라는 별호가 실로 어울리는 남자가 되었어.”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좋은 일이야. 스스로 수양을 잘 쌓은 것인지 자네 부친께서 잘 다독여 준 것인지는 모르겠네만, 이제야 자네를 마음 깊이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네.”
묘한 말이었다.
용두방주는 협의의 상징과도 같다. 그리고 그 협의를 실천하기 위해 숱하게 많은 정보의 허실을 가린다.
직감보다는 논리를,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한다. 철저하게 이모저모를 따져 본 연후, 진정 협의지도(俠義之道)에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 확신이 들면 움직인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고, 그래서 강단 있는 성격이 필요하다.
그렇게 개방의 용두방주라는 자리는 대를 이어 지금까지 확고한 협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사람이 눈빛을 말하고 직감을 논한다. 연호정이 그때의 연호정이 아니었다면, 화진천 역시 그때의 화진천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끄러미 화진천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수척해지셨습니다.”
“음?”
“후개에게 어느 정도 내공을 전수해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수척해지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화진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예끼, 이 사람아.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는가? 노화는 내공의 유무와 상관없는 문제일세. 한평생 중원 천하를 누비며 안 가 본 데가 없으니, 이제는 황혼에 접어든 거지의 인생도 이승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만 갈 수밖에.”
묘하다.
연호정은 화진천의 모습에서, 그의 목소리에서 기이한 현기(玄機)를 느꼈다.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은 없었다. 허리는 구부정했고 살이 빠져서 말랐다. 누더기 차림과 갈기처럼 뻗은 회백색 머리카락은 그대로였지만, 전체적으로 사람이 왜소해졌다.
그러나, 연호정은 화진천의 외양 너머의 모습을 보았다.
체구는 왜소해졌을지 몰라도, 풍겨 나오는 존재감은 예전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무공의 경지나 내공의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화진천이라는 사람 자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달라진 분위기가 왜소한 노인을 거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도(道)를 깨달은 사람처럼. 왜소하고 추레한 거지의 외양 위, 무당파 장문진인인 승현진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초대는 했네만, 우리 서로 바쁜 처지이니 차는 나중에 마시도록 함세.”
“좋습니다.”
“일단 앉지.”
연호정이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화진천이 물었다.
“그게 그 유명한 흑백쌍룡부인가?”
“제 병기를 아십니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천하에 모르는 게 없다는 용두방주일세. 하물며 당금 천하에 풍운을 일으킨 천하제일 기린아의 독문병기라면 모를 수가 없지.”
참으로 거창한 표현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렇게 모르는 게 없으신 분께서, 사천에 이 난리가 나고 있었다는 건 모르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허허, 그러게 말일세.”
보는 사람도 기분 좋아질 것 같던 그의 미소가 어느새 고소로 변했다.
“진정 알아야 할 문제는 모르고 있었으면서, 남들이 궁금해하는 것만 뒤쫓고 있었으니 나도 다 되었지.”
“…….”
“분명한 내 잘못일세. 나는 내 제자에게 방주의 임무 대부분을 이양했네. 믿음직한 제자에게 그간의 업무를 건네었으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어.”
“…….”
“통탄할 노릇이지. 그래도 개방의 용두방주라는 직책을 거머쥐고 있다면 그래선 안 되었어. 더 세심하게 천하를 살펴보고, 더 깊게 녹아들었어야 했네.”
화진천이 한숨을 쉬었다.
“망할 도사 놈과 세상의 이치니, 미래니 지껄이다가 정작 내 할 일을 놓쳤네. 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변명할 말이 없네.”
담담하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개방의 용두방주라도 이러한 일을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할 수는 있을지언정 남에게 잘못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확실히 화진천은 된 사람이었다. 연호정이 말했던 힘을 가진 자로서의 도리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늙으면 죽어야지. 하나 죽기 전에, 그간의 실수를 바로잡아야지. 나의 실수는, 이 일을 끝맺고 난 다음에 문제 삼아도 늦지 않을 걸세.”
“동감합니다. 그리고…….”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저라고 용두방주님에게 질책할 만한 상황이 못됩니다.”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정말 많이 바뀌었군.”
“…….”
글쎄, 내가 그리도 많이 바뀌었을까?
연호정은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뀌었다면 바뀌었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화진천이 손뼉을 쳤다.
“사내놈들 둘이서 궁상맞게 축 처져 있지 말자고. 지금 중요한 것은 앞날을 논하는 것이 아니던가.”
연호정이 주변을 힐끔거렸다.
“셈법에 약하신 모양입니다. 둘이 아니라 마흔둘입니다.”
주루 전체에 은신한 고수들을 말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은신한 고수들의 무공은 연호정조차 그 기척이 희미하게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최고급 은신술을 전문적으로 배웠다고 해도 연호정의 기감을 이렇게까지 속일 수 있다는 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었다.
화진천이 피식 웃었다.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는 도량은 아직 함양하지 못했구먼.”
“저나 방주님이나, 아직 신뢰로 쌓인 관계는 아니잖습니까?”
“신뢰로 쌓인 관계가 아니다…… 그래, 맞는 말일세.”
“십만개방의 주인을 호위하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줄 몰랐습니다. 성천의 강자라도 감히 얼씬을 못 하겠어요.”
“그럴 리가 있겠나. 성천의 강자가 작심하고 덤비면 그 어떤 고수 집단도 막을 수 없어. 뭐, 시간 벌이 정도는 되겠지.”
“시간 벌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겁니다.”
“부인하지 않겠네.”
가만히 화진천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모르겠군요.”
“음?”
“보통 이 정도 대화를 나누면 그 사람의 속내를 일부라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한데 용두방주님의 속내는 도통 알 수가 없군요.”
실제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화진천이 낙원소의 간부들과 손을 잡았다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연호정은 그 무(無)에 가까운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만큼 거물이었고, 무엇보다 중원 정보 단체의 최고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거물이 낙원소와 함께하고 있었다면, 십수 년간 세상의 눈을 피해 조직의 크기를 그만큼이나 불렸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정확히는, 용두방주가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사태를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용두방주가 놈들과 손을 잡았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짐과 동시에 극도로 쉬워진다.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되니까.
그래서 대화를 끌었고, 그래서 화진천을 더 자세히 보려고 했다. 목소리의 고저, 눈빛, 표정, 손짓 등등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하지만 알아챌 수 있는 게 없었다. 목소리와 눈빛을 보면 스스로 뱉은 말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조차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를 의심하시는가?”
화진천의 안목은 역시나 대단했다.
연호정은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래, 이해하네. 놈들이 사천에서 오랫동안 조직의 크기를 불릴 수 있었던 방법을 찾으라 하면, 용두방주가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것만큼 쉬운 해석이 없겠지.”
“잘 아시는군요.”
“하면, 자네는 어찌 홀로 왔는가? 만에 하나 정말로 내가 낙원소의 망종들과 손을 잡았다면 이 자리에서 자네를 죽일 수도 있거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실력이 제법입니다.”
“성천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니 그만한 자신감도 충분히 이해하네. 하나, 자네가 말했듯 내게는 날 지켜 주는 호위들이 있다네. 자네의 힘만으론 감당할 수 없을 것이야.”
연호정이 손으로 품을 툭툭 건드렸다.
“제가 당씨 문중의 주인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이곳에 있는 고수 대다수가 정신을 잃을 겁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미 해독약을 먹었습니다.”
화진천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오진 않았다?”
“추진력이 좋다는 말은 종종 들었어도, 멍청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만.”
“허허허!”
화진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고약한 청년이로다. 위엄 넘치는 산중 대왕으로 자랐다고 생각했더니, 송곳니와 발톱에 극독을 묻히고 있었군.”
“대왕 자리를 지키려면 추하게라도 이겨야 하거든요.”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화진천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 가슴에 사무치는 실수를 저질렀을지언정 그런 망종들과 손을 잡을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네.”
“알겠습니다.”
“날 믿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한없이 무(無)에 가까운 가능성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뼈아프구먼. 뭐, 어쩔 수 없지. 게으름 부린 내 잘못이니.”
화진천이 품에서 문서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명단일세.”
“명단이라면……?”
“사천성의 도지휘사사, 제형안찰사사, 승선포정사사의 고위급 간부들과 친분이 있는 본방 장로들의 명단이야.”
“……?!”
화진천이 깍지를 꼈다.
“내가 사천성의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안 것은 불과 석 달 전일세. 용두방주는 일 년에 한 번씩 각 지역의 장로들과 회동을 가지지. 석 달 전이 바로 사천성 장로들과의 회동이었네.”
개방의 문도 수는 중원 어떤 문파들보다도 많다.
장로만 해도 그 수가 수십 명이다. 무림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개방이 괜히 천하제일방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한곳에 모든 병력을 집중시킨다면, 인해 전술로는 구대문파 전체를 모아도 압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개방이었다.
“그때 나는, 사천의 정보를 관리하는 장로들의 눈빛에서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네.”
“보이지 말아야 할 것?”
“속세의 욕망.”
화진천의 눈이 깊어졌다.
“거지는 자유롭네. 입을 것은 누더기 한 벌이면 족하고, 배가 고프면 동냥질을 하면 그만이야. 때에 따라서 다르지만, 본방의 방도들은 그러한 자유 속에서 민심을 살필 수 있었다네. 욕을 먹고 멸시받으면서도, 민초들의 삶에 아무 이상이 없는지 매일 확인하지.”
“…….”
“알겠나? 개방도가 되려면 물욕이 없어야 하네.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철전 몇 닢이면 족해. 그것이 개방도야.”
“…….”
“한데, 그런 개방도의 모범이 되어야 할 장로들의 눈빛에 오만 욕심이 득실거리더구먼. 강렬한 물욕, 독한 탐심은 물론이요, 심지어 색욕까지 엿보였지.”
“…….”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는 모르겠네. 하기야, 그네들도 강호에 잔뼈가 굵기로는 누구 못지않으니.”
“지금 그 말씀은……?”
“그렇다네.”
화진천이 눈을 감았다.
“낙원소가 클 수 있었던 것은 본방 사천 지부들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네. 사천 지역을 관리하는 장로들이, 무려 십수 년 전부터 관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이야.”
“……!”
“그리고 그 고관대작들의 허가하에, 낙원소의 뼈대가 세워졌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