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누구를 위한 낙원인가 (2)
“음?”
삼선의 눈이 빛났다.
그가 집무실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벽면에는 중간까지 길게 뻗은 투명한 관이 삽입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은 젖빛의 연기로 꽉 차 있어서, 평소에는 벽에 그어진 문양처럼 보였다.
그 길고 두꺼운 관 안을 꽉 채운 연기가 출렁이고 있었다.
꾸르륵.
연기는 무게가 없다. 하나, 저 관이 열릴 때는 복잡하게 얽힌 기관 속의 수력(水力)이 강하게 작용하여 일 층 별관 전체에 연기를 뿜는다.
그리고 그 연기의 정체는 극락향이었다.
파아아악!
삼선이 재빨리 외부로 향하는 통로 쪽으로 움직였다.
바닥은 본래대로 내려와 있었다. 오선이 나가자 다시 닫힌 것이다.
삼선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 통로 앞에 선 그가 벽면 끝의 동그란 관을 열어 귀를 대었다.
“……?!”
발소리가 들렸다.
이 관은 땅 위로 통하는 감청기관으로, 위에서 나는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다.
발소리가 무척이나 가볍고 조용했다. 그런 기척이 적어도 네다섯은 되는 듯했다.
삼선의 눈이 흔들렸다.
‘고수?!’
이 정도로 발소리를 죽일 줄 아는 이들이라면 거의 무조건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여야 했다.
내공만 대단하다고 이런 발소리가 날 수는 없었다. 육체 자체가 깨달음의 벽을 부순 직후 재조립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이런 은밀함이 나온다.
‘왜 다른 소리는 안 들리지? 오선은 어디로 간 거야? 경비들의 목소리는 어찌하여……?’
그때였다.
“호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목소리.
“이것들 봐라? 이 질 좋은 땅에다가 별의별 짓을 다 해 놨구만?”
누구지? 누구의 목소리지?
순간 삼선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살기!!’
삼선은 본능적으로 관에서 귀를 떼고 물러났다.
콰아아아아앙!
두꺼운 통로 바닥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송곳처럼 침투한 발경은 통로 바닥은 물론, 그에 이어진 계단 일부까지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미친!’
삼선의 눈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먼지 자욱한 통로 위, 뻥 뚫려 버린 구멍으로 쨍쨍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그리고 그 빛과 함께 불쑥 나타난 팔은 은은한 백광(白光)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야수의 광기가 느껴지는 백색의 진기.
팔의 주인으로 유추되는 목소리가 구멍 위에서 들려왔다.
“감각 좋은데.”
파아아악!
삼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침입자다!’
그것도 그냥 침입자가 아니다.
그 두꺼운 비밀 통로의 바닥을 주먹질 한 방으로 부숴 버린 것도 모자라, 그 충격파로 계단까지 박살 낸 무시무시한 고수였다.
통로 바닥은 그 두께도 두께지만, 흙과 돌로 이루어진 층 사이에 백련정강의 합판이 끼워져 있었다.
저 고수는 일권(一拳)으로 그 두꺼운 지층과 강철판까지 박살 내 버린 것이다.
하라고 한다면 삼선도 못 할 건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공 출력을 최대로 끌어모으기 위한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자는 그런 게 없었다. 살기가 이는 순간 주먹으로 부숴 버렸다면, 찰나지간에 휘두르는 무공 일격이 자신의 최대 공격력과 맞먹을 정도로 위력적이라는 뜻이었다.
고수다. 자신보다 강한.
어쩌면 일선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진짜 초고수가 낙원소에 침투한 것이다.
단 일격만으로 상대와 자신의 무공 격차를 깨닫는 능력. 삼선 역시 보통 대단한 고수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기다란 지하 복도를 한순간에 통과한 삼선이 중앙 벽 천장에 걸린 쇠사슬을 힘껏 잡아당겼다.
위이이이이이잉!
지독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소름 끼치는 소리가 지하 전체를 가로질렀다.
“헉!”
“뭐, 뭐야?!”
“이것들이…… 시끄럽게 왜 이래?”
깜짝 놀란 목소리부터 나른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까지.
오십 개의 방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낙원소의 고객들이었다.
삼선이 외쳤다.
“비상사태입니다! 각 방에 계신 분들은 지금 즉시 대피 통로로 이동해 주십시오!”
우우우우우웅!!
삼선의 목소리가 지하 공간 전체로 파고들었다. 심후한 내공을 지녔음을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이런!”
“뭐야? 정말이야?”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이년아! 어딜 도망가!”
“으아앙! 엄마!”
“뭔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군. 야, 거기 앵속이나 좀 챙겨 봐.”
“꺄아아악!”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의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는 화를 냈고, 누구는 느긋했으며, 누구는 공포에 질렸고, 누구는 짜증을 부렸다.
삼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놈들이……!’
콰아아아앙!
그때,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지하실 전체를 덮쳤다.
이번 충격은 조금 전보다 더 크고 강력했다. 지하실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은 무시무시한 충격이었다. 실제로 이곳 전체를 무너트리려는 것이 아닌지 착각이 일 정도였다.
‘미친! 정말 여길 다 묻어 버릴 작정인가? 그냥 파괴가 목적이었단 말이야?!’
파바바바박!
삼선의 눈이 커졌다.
부서진 비밀 통로 위에서 서너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아아아아악!
저 먼 거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실로 엄청났다.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이곳 지하실 전체가 저 고수들의 영역이 된 것처럼 일대에 살벌한 예기가 가득해졌다.
‘이!’
삼선이 복도 대각선으로 몸을 날렸다.
‘……어쩔 수 없지.’
쾅!
철문을 뚫고 들어간 그의 눈에, 벽면 좌우로 이어진 거대한 철관이 보였다.
언뜻 보면 평범한 장식 같기도 하지만, 저 두 개의 철관은 낙원소 지부에서 가장 위험한 장치였다.
바로 기폭 장치였다. 기관의 폭발력 자체는 엄청나다고 할 순 없지만, 저 기관이 폭발하는 순간 이곳 일대에 둘러쳐진 온갖 화약이 터지며 지반이 통째로 가라앉을 것이다.
지반만 가라앉는 것이 아니다. 지하실 방 아래쪽까지 이어진 화약 주위엔, 한번 불이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 당가의 백염분(白炎焚)이 깔려 있었다.
아래에서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는 지옥의 화염이 치솟고, 위에서는 무게를 추측할 수 없는 흙과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릴 것이다.
거기에 각 방에 설치된 환기구는 끝까지 공기를 공급할 것이다. 불이 꺼질 일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낙원소 전 지부에 깔려 있는 당가 기관의 총화였다.
훗날 이곳을 뒤진다 해도, 불에 타고 으깨진 시체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미 오선은 당했을 것이다.’
확실하다.
설령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저들은 분명한 적의를 갖고 있었다.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절대 이곳을 멀쩡히 둬선 안 된다.
삼선이 오른쪽 기둥에 달린 붉은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방 곳곳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풀고 있는 회원들이 떠올랐다.
‘그대들이 자초한 일이다.’
몇몇 이들은 방마다 연결된 대피 통로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곳에 들어가 오십여 장을 기어가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를 들어 봤을 때, 저들 대다수가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멍청한 것들.’
낙원소의 회원이 되면 비상사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대피 요령을 교육받는다. 나아가 그대로 행하지 않고 사고를 당할 시, 모든 책임은 본인이 진다는 서명까지 해야 했다.
즉, 대피하지 않고 죽는 놈들은 전부 본인들 잘못인 것이다.
삼선이 힘차게 손잡이를 끌어 올렸다.
끼이이이이익! 쿠르릉!
거대한 기관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로는 안 된다. 두 개의 철관 모두를 조작해야 기폭 장치가 발동한다.
그리고 기폭 장치는 발동된 순간부터 서른을 세기 전에 폭발할 것이다.
‘좋아.’
그때였다.
화아악!
아직 기폭 장치가 가동되지 않았는데도 화약이 터진 걸까?
삼선은 순간 등 쪽으로 휘몰아치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느꼈다. 그 살기가 너무 강렬해서, 화염의 폭풍이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삼선의 눈이 흔들렸다.
‘이!’
그놈이다.
비밀 통로를 주먹질 한 방으로 박살 낸 그 괴인이 틀림없었다.
‘미친! 벌써 왔다고?!’
삼선이 재빨리 남은 하나의 기폭 장치 기관으로 손을 뻗었다.
훅!
“……?!”
삼선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뻗은 손이, 나아가려는 발이, 전방으로 기울어진 몸이 덜컥 멎는 듯했다.
온몸이 무언가의 제어를 받는 듯, 한순간에 속도가 느려졌다. 물, 아니 진흙보다도 훨씬 밀도가 높은 투명한 무언가가 몸 전체를 옭아매는 듯했다.
‘이건…….’
이 잠깐 새에 몇 번이나 놀라는지 모르겠다.
‘허공섭물?!’
그렇다. 이건 허공섭물의 기예였다.
하지만 삼선은, 세상천지에 이토록 말도 안 되는 범위의 허공섭물을 구사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익!’
우우우우웅!
삼선이 극한까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거의 멈춰 버렸던 몸이 제법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한 줄기 날카로운 섬광이 번뜩였다.
퍼어어억!
“크악!”
삼선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뻗어 나온 섬광이 그의 어깻죽지를 통째로 꿰뚫어 버린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어깨. 뼈와 관절, 근육 일부가 온통 부서지고 끊어졌다. 뭉개진 살가죽에 간신히 붙어 있는 어깨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했다.
“선배.”
“걱정하지 마라.”
파아아악!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는 삼 척 길이의 단창과 짧고 두툼한 기검(奇劍)을 든 중년 사내였다.
놀랍게도 이 사내의 무력은 자신에 비해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사내, 패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퍼어억!
삼선의 눈이 충혈되었다. 어느새 단창이 그의 복부에 박혀 버린 것이다.
치이이이이익!
삼선의 몸에서 희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온몸에 꽉 차 있던 진기가 무서운 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다. 단창에 파괴된 기해혈이 전신의 진기를 감당하지 못해, 팔만 사천 모공으로 몽땅 날려 버리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주르륵.
삼선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렀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낙원소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지만, 낙원소 때문에 이리 허무하게 죽을 거라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푸스스스.
삼선의 머리카락이 점차 하얗게 세어 갔다. 팽팽하던 피부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고, 맑고 깊던 두 눈은 썩은 생선 눈알처럼 생기가 없어졌다.
‘이렇게 죽는가.’
퍼억!
“컥!”
삼선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어느새 한 청년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삼선은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
힘도, 정신도 없는 와중에 그는 극단적인 공포를 느꼈다.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가 아니었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청년, 아니 악신(惡神)의 존재감으로 인한 근원적인 공포였다.
죽음의 공포조차 한순간 잊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아내는 남자.
“억울하냐?”
악신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건조했다.
마치 가뭄으로 갈라진 논바닥처럼.
“너희들이 억울해하면 안 되지.”
화르르륵!
악신의 왼손에 선혈처럼 시뻘건 불꽃이 타올랐다.
실제 불꽃이 아니었다. 응축된 화기(火氣)로 인한 착시였다.
물론 그 화기는 실제 불꽃과 다르지 않은 위력을 자아낼 테지만.
화기를 두른 손이 삼선의 복부를 툭 하고 쳤다.
순간 삼선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으아아아아악!”
치이이이익!
삼선의 칠공에서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부로 침투한 화기가 그의 오장육부를 생으로 익히고 있었다.
악신, 연호정이 삼선의 목을 놓았다.
바닥에 쓰러진 삼선은 몇 차례 몸을 꿈틀대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그리 쉽게 죽었다는 사실에 감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