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그림자는 짙었다 (6)
술을 얼마나 비웠을까.
모용군의 얼굴은 불콰했다. 그 와중에도 두 눈은 샛별처럼 반짝이는 걸 보면, 술을 마셨다고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닌 듯싶었다.
“……?”
창밖을 보던 언자방의 눈이 일순 날카롭게 빛났다.
“느꼈소?”
모용군이 잔을 들며 말했다.
“곧 온다고 했잖은가.”
잠시 후,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창가 앞을 지나쳤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나친 사람. 그는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잠깐 새에, 작은 종이쪽지 하나가 두 사람의 탁자 끝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에게 내내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은밀한 동작이었다. 언자방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고작 쪽지 하나 전해 주는 것이 전부인데도 개방의 실력을 알 수 있다.
초절정고수인 언자방조차 두 눈 빤히 뜨고 있었는데도 움직임을 놓칠 뻔했다. 과연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세상 모든 움직임에 능통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언자방이 모용군에게 쪽지를 건넸다.
모용군이 쪽지를 폈다.
“……과연.”
모용군이 창가에 팔을 기댔다.
스르르르.
창가에 기댄 그의 팔, 왼손 장심에서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력으로 주기(酒氣)를 모아 뽑아내 버린 것이다.
어느새 모용군의 얼굴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슬슬 움직이세나.”
“어디요?”
“근처일세. 마침 길이 잘 맞았구먼.”
“곧바로 전투가 벌어질 것 같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네.”
언자방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갑시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의 난전이라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나.”
* * *
“잘도 이런 곳에 만들었군.”
우거진 숲속에 세워진 건물은 상당히 컸다.
삼 층짜리 건물이었고, 그 뒤에는 개울물이 흘렀다. 처음 송하신니를 만났던 건물과 외양은 달랐지만, 크기는 거의 비슷했다.
송하신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은공.”
“신니께서는 여기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될 말입니다. 저도 저들의 행태를 직접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 송하신니는 마음을 정했고, 연호정은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후방에서 따라와 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실질적인 전투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그녀였다. 아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연호정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느껴지십니까?”
“그래.”
“지하입니다.”
꽤 큰 건물이었지만, 진정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지하였다.
인기척들이 굉장히 희미했다. 지하를 파서 따로 방을 만들었으니, 초절정고수들의 기감에도 쉬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공략하는 게 좋겠습니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날 어지간히도 써먹는구나.”
“손쉽게 저놈들을 처리할 수 있는 분이시잖습니까? 전략적으로 봤을 때, 가주님이 나서 주시지 않으면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겁니다.”
“어련하시겠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관 역시 알고 있었다. 초전의 기습으로 자신이 적격이라는 것을.
연호정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삼 층부터 일 층까지, 절대 극독을 쓰시면 안 됩니다. 민간인이 있을 수 있어요.”
“쓸데없는 걱정 말고 몸이나 풀어 둬라.”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관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패율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엄청난 신법이구먼.”
점창의 신법도 실전에 맞게 빠르고 변칙적이다.
하지만 당관의 신법은 차원이 달랐다. 신법이라는 무학 자체의 차이보다는, 신법에 대한 깨달음의 문제일 것이다.
황석태가 물었다.
“당가 측 인사들은 다 신법에 능하겠지?”
연호정이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 그들은 독과 암기를 쓰는 자들이야. 거리를 재는 데에 있어 그들만큼 섬세한 이들을 찾아보긴 힘들겠지.”
“음.”
황석태는 삼현대와 싸울 때부터 당가의 암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곧장 당가로 향하게 될 텐데, 사천당가는 전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전투를 벌이려면, 상대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물며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형이다. 변화무쌍한 신법과 독랄한 암기, 그리고 독까지. 만약 전투가 벌어진다면 우리는 속절없이 당하고야 말 것이다.’
물론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독과 암기, 혹은 신법. 셋 중 둘 이상을 막아 두어야 전투가 편해질 것이다.’
잠시 후.
스르륵.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어느새 삼 층 건물 꼭대기로 올라간 당관이 삼 층, 이 층을 지나 일 층에 도달한 것이 느껴졌다.
“갑시다.”
파아아악!
일행이 순식간에 건물 입구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피이이이이이잉!
섬뜩한 소리와 함께 숲 곳곳에서 온갖 암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호정은 기다렸다는 듯 교룡쇄를 휘둘렀다. 내공을 있는 대로 빨아먹은 교룡쇄는 십오 장이 넘는 길이로 늘어나 있었다.
치리리리리리리링!
그 기다란 교룡쇄를 번개처럼 휘두르니, 어느새 철쇄가 거대한 반구의 형태를 이루어 암기들을 튕겨 냈다.
강량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엄청나신데요.”
치리링!
교룡쇄를 수거한 연호정이 주변을 훑었다.
‘역시.’
당관은 단숨에 나무를 타올라 순식간에 건물 꼭대기로 향했다.
하지만 일행은 당당하게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을 포착한 기관의 암기들이 일행에게 퍼부어진 것이다.
‘절정고수라도 쉽게 피하거나 막아 내기 어려운 기관이다. 이건 당가의 작품이군.’
연호정이 선두에서 걸었다.
사방에서 쏘아진 암기는, 그 이후 다시 쏘아지지 않았다.
끼이이익.
일 층 대문이 열리며 당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연호정이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저거 뭡니까?”
“은형비산폭(隱形飛散爆)이다.”
“은형비산폭?”
“암기 기관 장치 중 하나다. 백 년 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개량되고 있는 기관이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당관의 목소리는 서늘해져만 갔다.
마음을 다스리긴 했지만, 막상 가문의 비기가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정이 대문으로 들어갔다.
“지하에서는 절대 독을 풀어선 안 됩니다.”
“안다.”
낙원소 안으로 들어온 일행.
연호정이 말했다.
“강량.”
파아아악!
이름이 불리기가 무섭게 강량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피슉! 피슉!
일 층 곳곳에서 목이 잘리고 피가 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당관이 재운 이들 중, 무공을 연성한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섬멸전이다. 이곳에 있는 무림인은 개인 사정이 어쨌든 모조리 황천길로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피슉! 피슉!
발 빠르게 일 층을 정리한 강량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행은 일 층 주변을 훑었다. 지하실로 들어가는 길목을 찾기 위함이었다.
“쉽지 않군.”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에 통로를…….”
끽.
순간 패율의 걸음이 멈추었다. 나머지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이 패율 곁으로 다가왔다.
패율은 바닥을 디딘 오른발에 살짝 힘을 주었다.
끼익.
또 한 번 소리가 났다.
“여기군.”
황석태가 적룡신창을 들었다.
“들어가도록 하지.”
“잠깐.”
“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여기가 아니야.”
“왜 그리 생각하시는가?”
그때, 당관이 말했다.
“이곳 지하에선 못해도 백오십이 넘는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한데 여기까지 왔는데도 지극히 미세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리감이 있어.”
“…….”
“지하와 이곳 사이의 지반이 엄청나게 두껍다는 뜻이다. 안에서 화탄 몇 개가 터져도 지반이 당장 무너지진 않을 정도야.”
그제야 황석태와 패율은 깨달았다.
그렇게 두꺼운 지반이 자리 잡고 있는데 바닥을 이렇게 헐렁하게 만들 리가 없다.
“함정이다. 섣불리 여길 열면, 그 즉시 함정이 발동될 것이다.”
“확실합니까?”
“그렇다. 결정적으로.”
당관이 검지로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극락향(極樂香)의 독내가 맡아지고 있어.”
극락향은 당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맹독이었다.
독 자체에는 냄새가 거의 없다. 사실상 독인(毒人)이 아니고서야 초절정고수도 그 향을 맡기가 힘들다.
다만 극락향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의 입에서는 아주 좋은 꽃향기가 난다. 그래서 이름도 극락향이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지가지 하는군.”
일차로 은형비산폭, 이차로 극락향.
얼핏 보기에는 허술한 것 같지만, 허락 없이 들어와 나대다가는 거의 무조건 죽는다. 은형비산폭은 피해도, 극락향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때였다.
“그건 이놈에게 물어보시죠.”
파아악!
삼 층 꼭대기에서 단숨에 내려온 강량은 건장한 무인 셋을 짊어지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죽이지 않았습니다. 남은 놈들은 이놈들 셋뿐이니, 빼먹을 거 빼먹고 죽이십시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가 세 사람의 아혈과 마혈을 짚었다.
이어서 당관이 손을 휘둘렀다.
“……!”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떴다.
그들을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혈을 짚었지만, 목 위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어디냐?”
“……?!”
셋은 말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아혈을 짚였으니 당연히 말을 할 순 없다. 그런데도 연호정이 위치를 물은 것은 세 사람의 눈빛을 보기 위함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말해 주지 않으면 다 죽이고 바닥까지 뚫어 버리면 그만이다. 함정도 어디에 있는지 파악해 뒀으니, 차라리 그게 속 시원한 방법이긴 하다만.”
“…….”
“말해 줄 용의가 있나?”
셋 중 두 사람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연호정은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오른쪽 끝 무사를 바라보았다. 두 눈에 독기가 그득한 것이, 어지간한 고문에는 입도 뻥끗하지 않을 놈이었다.
연호정이 그를 가리켰다.
“죽여라.”
파아아악!
사선으로 내리그어진 강량의 철검이 사내의 상반신을 갈라 버렸다.
푸화아악!
대량의 선혈이 튀며 잘린 내장과 뼛조각이 바닥을 적셨다.
남은 두 무사의 얼굴이 퍼렇게 죽었다.
사람을 죽여도 이렇게 끔찍하게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저리될 거라 생각하니, 모골이 다 송연했다.
“주둥이가 둘씩이나 필요하진 않겠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혈을 풀어 주마. 한 놈만 살려 줄 것이다.”
그가 지풍을 날렸다.
푹! 푹!
“커헉! 허억! 허억!”
“헉헉! 여, 여기가 아닙니다!”
순간 강량의 검이 번뜩였다.
번쩍!
숨만 몰아쉬던 좌측 끝 무사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무사의 얼굴은 지독한 공포로 얼룩져 있었다. 일행의 우악스럽고 살벌한 살인에 기가 질려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무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디냐?”
“이, 이 건물을 나가야 합니다! 개울가 쪽에 통로가 있습니다!”
“그래?”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열쇠가 있어야만 열리는 구조입니다! 열쇠를 정확하게 집어넣고 돌려야만 열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죽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하얗게 웃었다.
“빠릿빠릿하니 마음에 드는구먼. 자네, 참 오래 살겠어.”
“허억! 허억!”
“안내해 줄 수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좋아. 가자고.”
연호정이 강량을 보며 재차 씩 웃었다.
“이 친구 참 마음에 들어. 그렇지 않냐?”
강량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정말이지 연호정의 사악함은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