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그림자는 짙었다 (5)
일각 후.
떠나가는 연호정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기충의 눈빛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부분타주 황포가 다가왔다.
“분타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이렇다 할 공격을 가한 것도 아니고 마혈만 짚었을 뿐이잖냐.”
“빌어먹을.”
황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 강하더군요. 이렇게까지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요.”
그들 모두가 손도 써 보지 못한 것은 당관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관이 아니더라도, 피를 볼 각오를 하고 전투에 뛰어들었더라도 그들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그런 것은 굳이 칼질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들의 전력은 이미 어지간한 문파의 전력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기충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믿어도 될까?’
연호정이 어떤 인물인지는 이미 알 만큼 알고 있었다.
나아가, 이번 분타 습격전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으로 연호정다운 짓이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어떤 과격한 수라도 쓸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오정패 역시 분명한 진품이었고, 당가주와 패율, 황석태와 강량 모두가 진짜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뜻 저들을 믿고 모든 정보를 공개해도 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간의 정보를 보면 저들은 절대 낙원소 같은 곳에 발을 들일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기충의 눈이 흐려졌다.
‘현재 낙원소를 만든 자들도 그런 평가를 받지 않았던가.’
사천당가는 자존심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었다. 그들의 혈족 모두가 그러했다.
심지어 청성과 아미는 수행자들의 문파였다. 그러한 세 문파에 속한 고수들이 합심하여 낙원소 같은 무도한 조직을 만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기충은 정녕 저들을 믿어도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쩔 수 없지. 정보를 풀 수밖에.”
“그래도 되겠습니까?”
“저들은 우리를 다 잡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사과를 했고, 그대로 떠나기까지 했어. 정말로 낙원소와 한패였다면, 고작 이 정도 문서만 살펴보고 떠났을 리 없다.”
“그건 그렇지만…….”
황포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낙원소를 만든 그들도 믿었었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충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후개께 연락을 드려야겠다. 직통으로.”
“예?!”
황포는 깜짝 놀랐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길 바라지만…… 개방 내부에도 낙원소에 넘어간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번 정보를 탈취한다면…….”
“저들은 이미 낙원소를 정면으로 깨부술 생각이다. 심지어 삼현대를 몰살시키기까지 했어.”
“…….”
“이미 낙원소는 적의 존재를 눈치챘다. 사천 밖이라면 모를까, 사천 내에서 저들의 정보력은 우리에 비해도 크게 모자람이 없을 것이야.”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낙원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거늘, 저들은 어찌…….”
“연 대수가 말하지 않았느냐. 낙원소는 아무도 모르게 양민들을 납치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
“나 역시 그들을 일망타진하고 싶다. 관련자는 단 한 놈도 살려 두고 싶지 않아. 하지만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를 기다리다가는, 무사할 수 있었을 양민들까지 낙원소로 끌려갈 것이다.”
기충이 눈을 감았다.
“연 대수의 말은 지극히 옳다. 우리는 낙원소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뭐가 우선인지를 잊고 있었던 것이야.”
황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침묵했다.
세상이 항상 정의롭게 움직이진 않는다. 케케묵은 말이지만, 가끔은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할 때도 분명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죄 없는 양민들이 관련된 지금 이 상황에서, 낙원소를 일망타진하겠답시고 앞으로 새로이 희생될지도 모를 양민들의 사정에서 눈을 돌린다는 것은 분명 정의롭지 못한 처사였다.
‘애초에 양민들의 안전이 소(小)라고 볼 수도 없지.’
복잡한 상황이었다. 협의로 이름 높은 개방의 방도들조차 무엇이 먼저인지,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은밀하게만 움직이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런 시기에 연호정 일행이 나타나 낙원소를 공략하겠다고 나선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봐도 될는지.
“지금 즉시 문서를 추려라. 연 대수가 덕양현 인근까지 도달하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섬멸까지의 시간은 유시(酉時) 말로 볼 테니, 미시(未時) 초까지 정리하여 움직여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모용가주님의 위치를 파악해라. 연 대수 말마따나 지금쯤 사천으로 진입하셨을 것이다.”
“예.”
기충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하니, 본인들의 지부까지 부숴 가면서 우리를 속이려 들진 않겠지.”
* * *
대로를 걷던 연호정은 문득 강량을 돌아보았다.
강량은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모습, 쉽게 건드리기 힘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는군.’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이제는 폭발 직전이야.’
절정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깨달음을 주워 담고 무종지벽을 돌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강량은 그 거의 없는 경우에 해당했다. 저 젊은 나이에, 초절정고수도 깨닫지 못한 것을 저 영역에서 모두 다져 놓고 올라갈 생각인 것이다.
필시 무종지벽을 돌파한 순간, 그의 전력은 어지간한 초절정고수를 한참이나 웃돌 것이다.
기반이 튼튼한 고수의 성장은 언제나 폭발적이고도 안정적인 법.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강량의 얼굴을 보니, 문득 연지평이 떠올랐다.
‘워낙에 잘 컸으니 걱정은 없다만.’
일이 바빠서 제대로 챙겨 주지를 못했다. 와중에 남들처럼 대련을 해 준 적도 많지 않았다. 물론 그 이상으로 깨달음의 단초는 많이 던져 줬지만.
‘모용 형님과 같이 있으니 배우는 게 많겠지.’
모용우의 무력은,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패율이나 황석태를 뛰어넘었을 것이다.
그것은 직감이었다. 재능을 떠나, 모용우는 아직 멈출 때가 아니었다. 그가 연성한 무공, 그가 이룩한 깨달음, 그의 성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배우고 있는 연지평 역시, 강량 못지않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이내 피식 웃었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찝찝하게.”
“예?”
“느닷없이 왜 그리 웃느냔 말이다.”
“저는 뭐 웃으면 안 됩니까?”
“재수 없는 웃음이었다.”
정말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말투가 아닌가.
연호정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가족 생각을 했습니다.”
“연가주?”
“지평이요.”
“…….”
“일이 바빠서 제대로 신경을 써 주지 못했거든요. 그 재능과 열성이라면 알아서 잘 크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의외로군.”
“뭐가 말입니까.”
“항상 생각했다. 너답지 않다고.”
“……?”
“임무, 전투, 정치. 너는 언제나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칭찬해 주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런 너의 모습에 가족은 어울리지 않았다.”
뜬금없이 한 대 맞은 것 같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일이 많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가족에게 소홀해지는 법이다. 우애를 나누려 해도 시간이 없고, 정을 주고받고 싶어도 여유가 없으니 제대로 교감이 되질 않지.”
“…….”
“공과 사, 모든 것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은 없다. 어느 한쪽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무게추가 기울어져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가주님은 어떠셨습니까?”
“어땠을 것 같으냐?”
“…….”
“당가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집안 단속만 잘하면 되는 자리가 아니다. 본가의 영향력은 사천 전역에 드리워져 있으니, 하루에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에 소홀하셨군요.”
“그렇다.”
당관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누군가는 변명하지 말라고 한다. 시간은 어떻게든 쪼개서 만들면 된다고.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어중간하게 살려거든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한계를 그어 놓고 사니 시간도 쪼갤 수 있는 거라고.”
“…….”
“일과 가족, 둘 모두를 챙기려 들다가는 둘 모두를 놓치게 될 것이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림맹에 계실 때의 가주님은, 그래도 제법 시간을 낼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따님에게 가르침도 내릴 수 있지 않았습니까?”
“무림맹이었으니까. 나 대신에 일해 줄 사람에게 공무를 맡길 수 있었으니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면 자식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헛소리군.”
“예?”
“가문의 힘은 혈족에게서 나오고, 혈족이 번성키 위해서는 자식을 낳아야만 한다. 사랑이든 의무든, 결과가 달라져선 안 돼. 그것은 기본이다.”
하긴, 맞는 말이다.
인력은 곧 전력이다. 무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황궁이나 문파는 물론, 여느 가정도 마찬가지다.
“또한 나에게는 대통을 이을 후예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나에게 자식을 낳지 말라고 하는 것은, 가문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라는 말과 같다.”
“이해했습니다.”
자식을 낳았으면, 자식답게 키워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당관은 분명 잘못했다. 그는 공과 사 중 공을 선택했고, 가족에게는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별 후회가 없었다. 이전까지는 그러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너도 나와 별다를 게 없는 놈이다. 오히려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쩝.”
“가족을 챙기고 싶다면 이번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다. 가족을 챙기는 건 그 이후에 해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매혹적인 말씀이십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라.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한 결론이다. 공무와 가족을 다 챙길 수 없다는 당관의 말에 십 할 공감하진 못하겠지만, 결국 결론은 전쟁을 끝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이 나기도 전에 놈들을 무너트리는 것이지만.
“그건 그렇고.”
당관이 눈을 빛냈다.
“덕양현 쪽 낙원소를 부수자마자 본가로 갈 생각이냐?”
“그럴 생각입니다. 가주님께서도 그걸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무런 대응도 없이 가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면을 보면 당관도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즉에 가문으로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가서 가문을, 사천을 이 지경으로 만든 혈족들을 제 손으로 박살 내고 싶을 것이다.
당관은 그러한 욕망을 참고 있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낙원소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진즉에 당가로 진입했을 겁니다. 놈들 때문에 삶이 망가질 민초들을 위해 경각심을 줄 요량으로 들르는 거지, 저 역시 마음은 진즉에 당가로 향했습니다.”
“나름의 생각이 있단 말이지.”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저 가주님 믿고 돌격하는 겁니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호정이 자신의 뺨을 탁탁 쳤다.
“자, 일단 덕양현까지 빠르게 날아가 볼까요.”
반나절 후.
그들은 덕양현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거대한 장원 앞에 도달했다.
낙원소 덕양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