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화. 그림자는 짙었다 (4)
사천성 성도 인근, 면양현으로 들어온 모용군과 언자방은 곧장 큰 주루로 향했다.
주루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날이 밝은데도 음식에 술을 곁들인 사람이 태반이었다.
“흐음.”
모용군은 나직이 감탄했다.
“여전하구먼. 맛과 향이 강렬해. 사천 음식을 얼마 만에 맛보는 건지.”
언자방은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모용군이 술병을 들었다.
“자네는 한잔 안 하시는가?”
“괜찮소.”
“딱딱한 사람 같으니.”
모용군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술잔에서 풍기는 주향이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검남춘일세. 자네도 들어 봤지?”
“사천의 명주 중 하나 아니오.”
“사천에 들를 때마다 많은 술을 마셔 봤지만 내 입맛에는 검남춘이 제격이더군. 단독으로 마셔도 좋고, 음식과 곁들여도 괜찮아.”
모용군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언자방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판국에 술을 자셔도 되겠소?”
“자네가 있는데 내 무슨 걱정인가?”
속도 편한 양반이었다. 언자방은 창밖을 보며 차를 홀짝였다.
모용군이 대뜸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무슨 말씀이오?”
“공기 말일세.”
모용군은 히죽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사천에 들어선 이후 묘하게 공기가 텁텁하던데, 자네도 그리 느꼈나?”
날씨나 온도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언자방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텁텁하고, 습하고, 끈적거리는군.”
“과연 대단해. 자네 감각도 민감하기 그지없군.”
“공기가 달라졌음은 느꼈는데, 그 원인은 모르겠소.”
거리에는 생기가 넘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
다른 곳도 비슷하겠지만, 특히 사천 사람들은 살아생전 타 지역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었다. 거대한 분지를 형성한 사천 지역은, 언뜻 보면 다른 지역과 유리되어 있는 듯했다.
북부나 서부의 외세가 중원을 공략할 때면 언제나 사천을 뚫으려 노력했지만, 정작 성공한 세력은 많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실제로 사천은 적의 침공에 무너진 역사가 손에 꼽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한 이유였다. 그들의 삶은 중원의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안정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사천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하네. 지역 전체가 적의 침공에 무너진 역사가 적기 때문이야.”
“…….”
“그렇기에 둔하지만, 동시에 한번 무너지면 이러한 분위기를 다시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네.”
“그럴 것 같소.”
“즉, 사천의 누구라도 민생에 영향을 끼칠 만큼 소란스러운 일을 벌이기 꺼리지. 이들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지는 순간 외인들은 사천에 크나큰 변고가 터졌음을 직감할 수 있으니까.”
“음.”
“다만, 이 정도로 공기가 텁텁하다면 이들 역시 겉으로 보이는 얼굴과 달리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안고 있을 것이야.”
모용군이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싸움이 임박한 분위기는 아니야. 그 칼날 같은 긴장감은 없어.”
“동의하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텁텁한 이 공기, 양민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여유 속 보일 듯 말 듯한 불안감…….”
“마치.”
언자방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살인마나 강도를 두려워하는 것 같소.”
“정확하게 보았네.”
모용군이 턱을 쓰다듬었다. 며칠 수염을 다듬지 않았더니 꽤 거칠어졌다.
“전투의 긴장감보다는 민생의 삶을 위협하는 긴장감에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치열한 전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온 이들이었다.
창칼을 휘두르고 피와 살점이 떨어지는 싸움터만이 전장이 아니다.
모용군은 정치판의 소용돌이에서 매일같이 변하는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날을 세웠고, 언자방은 온갖 정보를 다룸과 동시에 자신의 무공을 완성키 위해 보이지 않는 귀신과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것이다. 사람들 얼굴 속에 드리워진 걱정과 불안의 낌새를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왔을 때와는 특히나 분위기가 달라. 그 차이가 실로 명백하게 느껴질 정도지.”
모용군이 잔을 비웠다.
“아마 연호정 일행은 벌써 알아채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힐끔 모용군을 보던 언자방이 물었다.
“그놈이 그렇게 대단하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옆에서 다 봤잖나? 내가 그놈 때문에 번번이 물 먹는 꼴을.”
“보기는 했소만, 나는 아직 모르겠소. 그 꼬맹이가 정말 천하를 논할 만큼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재능이라…….”
모용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능이라면 재능일 수 있지. 재능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서 말이야.”
“당신이 보기에는 재능이 아니란 말이오?”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면에서는 분명 대단한 재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네.”
모용군이 씁쓸하게 웃으며 재차 잔을 채웠다. 그 독한 술을 잘도 마시는 그였다.
“그놈은 약점 파악에 도가 튼 놈이야.”
“약점이라면?”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본능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단 말일세. 작게는 무공 대결에서부터, 크게는 시국까지도.”
언자방이 눈살을 찌푸렸다.
“와닿지 않는 말이구려.”
“지금껏 연호정 그놈과 싸운 이들 중, 그놈보다 강한 자는 얼마든지 있었네.”
“…….”
“자네도 알다시피, 무공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한 수의 격차도 커지게 마련이야. 한 수 위의 고수를 정신력과 전투 감각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지.”
“동의하오.”
“하물며 무종지벽을 돌파하게 되면, 정신력이나 전투력으로 어찌하기 힘들 만큼 차이가 벌어지게 되네.”
“양측 모두 방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맞는 말이오.”
모용군이 껄껄껄 웃었다.
“그렇지. 어떤 승부라도 방심하면 끝이지. 한 수가 아니라 두세 수 차이라도 방심하면 당하는 게 이 바닥 아니던가.”
“…….”
“한데 그놈은, 방심하지 않은 적까지도 기어이 이겼네.”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요?”
“전쟁이었으니까.”
“……?”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녀석의 싸움 방식일세. 연호정은 일대일 상황에서도 그것을 무인 간의 비무나 생사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모용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녀석에겐 모든 싸움이 전쟁일세.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데에 주저해서도 안 돼. 설령 약점이 보이지 않으면, 약점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공략해야 하는 것이 전쟁이라네.”
“……!”
“그놈은 그러한 방식에 도가 텄어. 그리고 그런 기질은, 비단 싸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야.”
“…….”
“세력전이든 정치든 뭐든, 녀석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태를 아군에 유리하도록 만들 줄 아네.”
언자방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와닿지가 않소.”
“굳이 알려고 할 필요 없네. 자네가 녀석과 싸우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언자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은 마치, 내가 그와 싸우면 반드시 질 거라는 뜻으로 들리오.”
“승부에 반드시라는 말만큼 무의미한 건 없지. 하지만 뭐, 자네 말도 맞네. 가능성을 생각하면, 나는 자네가 연호정을 이길 확률이 한없이 낮다고 보네. 무공이든, 정치든.”
“…….”
“자존심 상해 할 것 없네. 나도 녀석 때문에 몇 번의 고배를 마셨으니까.”
모용군의 얼굴에 쓴웃음이 드리워졌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한 몇 안 되는 천재가 그놈이야. 내가 타인을 평가함에 있어 자존심을 꺾는 일은 거의 없네. 한데 그놈 앞에서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더군.”
“…….”
“뭐, 어쩌겠는가? 자존심은 상해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놈이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진정 그놈이 나보다 못나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건 아니지.”
“그렇지. 그래서 인정해 버렸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걸 인정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지더군.”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언자방이 툭 던지듯 물었다.
“포기한 거요?”
“무엇을?”
“당신의 꿈,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호정의 존재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잖소.”
“맞는 말이지. 당장은 아니지만.”
“당신보다 역량이 뛰어난 천재를 넘어설 수 있겠느냔 말이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약점 공략은 연호정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네.”
“……!”
“약점이 보이면 주저 없이 쑤시고 들어가야지. 약점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박살을 내어 상대를 뒤흔들어야지. 연호정이 잘하는 짓 아닌가?”
“…….”
“녀석에게 많이 배웠다네. 또한, 넘어서야 할 산이 뒷동네 야산 정도면 정복해 봐야 얼마나 큰 성취감을 느끼겠는가?”
모용군이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 세상을 보는 그의 눈빛은 묘하게 아련해 보였다.
“이런저런 장애물을 치우고 부수고 뛰어넘어야, 마침내 도달한 그곳에서의 빛이 진정 따스함을 알 수 있는 법이라네.”
어쩐지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언자방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감했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뭐, 그런 생각은 당분간 뒤로 미뤄 두자고. 사실상 아군일 경우 연호정이라는 존재는 너무나도 안심되는 전력이라네. 그리고 그놈 역시 나라는 존재를 괜찮다고 생각했으니 이곳까지 불렀겠지.”
“그렇겠지.”
“조만간 녀석에게서 연락이 올 것일세.”
모용군이 잔을 들었다.
서서히 취기가 오르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곧장 당문으로 향했을 리는 없고…… 별일 없다면 지금쯤 개방과 연수하여 사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부터 알아보고 있을 걸세.”
* * *
“그랬구려.”
“…….”
폐가촌에서 보관하고 있던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깨끗한 문서들이었다.
그 문서들을 모두 읽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많았소.”
스륵.
연호정이 기충의 혈을 짚었다.
“후우!”
기충이 천천히 일어나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반 시진 가까이 몸이 굳은 채 움직이질 못했다. 절정고수라도 뻐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호정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과 황석태가 무릎이 꿇린 개방도들의 마혈을 풀었다.
연호정이 기충에게 포권했다.
“부득불 거칠게 진압에 들어갔소. 용서를 바라진 않지만, 분명한 사죄를 드리리다.”
의정군의 대수라면 무림맹에서도 고위급 간부라 할 만하다. 심지어 그는 맹부 동맹의 상징으로서 묵룡부에 파견까지 간 사람이었다.
기충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연 대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해 주어 감사할 따름이오.”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기충은 기분이 나쁘다고 공무에 사감을 섞을 만큼 어설픈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연호정이 문서를 흔들었다.
“삼합 분타를 위시한 몇몇 분타는 이미 낙원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들을 조사 중이며,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것은 개방 내부에도 그들과 연관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소?”
“그렇습니다.”
그때, 당관이 말했다.
“방주나 후개에게 직통으로 연락할 방법이 하나도 없었나?”
기충이 고개를 숙였다.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 연락하는 도중에 정보가 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흠.”
“저 역시 사활을 걸고 조사하는 일이었던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충이 한숨을 쉬었다.
“사천성의 고위 관부 몇몇도 얽힌 일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정보가 새면…… 일이 정말 어려워질 겁니다.”
일행의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연호정이 물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삼합 분타가 저희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를 말입니까. 다만, 조금 더 신중해지심이 좋을 듯합니다. 일망타진을 바란다면 말입니다.”
“일망타진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민생 안전을 생각하면, 경각심부터 일깨우는 게 좋겠지요.”
“예?”
“놈들을 한꺼번에 잡으려고 시간 끌다가는 죄 없는 양민들만 다칠 겁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무도한 짓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잖습니까?”
“…….”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양반도 슬슬 도착했겠군.”
“예?”
“모용가주가 사천에 들어왔을 겁니다. 망을 총동원해서 위치를 파악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도에서 가까운 낙원소의 지부들을 집어 주십시오.”
연호정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오늘부터 피 좀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