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그림자는 짙었다 (2)
“형님…… 엇?”
문을 열고 들어온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연호정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정수리 부근에서 미약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걸 보면 운공에 집중하고 있는 듯했다.
“쩝, 기척이라도 내시지.”
강량이 몸을 돌렸다.
그때,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예? 아, 그러지요.”
방문을 닫은 강량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선 채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알아채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호정은 자신의 감각이 이전과 달라졌다며, 예전처럼 사방의 감각을 모조리 읽어 내질 못한다고 말했다.
언뜻 들으면 몸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것이 아니라 했다.
무공의 변화.
퇴보든 발전이든, 연호정의 무공이 또 한 차례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참.’
연호정을 보는 강량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씁쓸함과 부러움, 투지와 뿌듯함이 느껴지는 복합적인 미소였다.
‘정말 독한 양반이라니까.’
강량 역시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무(武)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그것은 수련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가짐의 문제였고, 삶의 태도 문제였다.
그러고도 가끔, 자신의 언행이 무에서 멀어지는 순간을 직시하곤 했다. 그럴 때면 의식적으로 다시 무도에 몸을 실었다.
밥을 먹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누워서 쉴 때도 몸은 자연스럽게 무도에 녹아들도록 노력했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레 이뤄지면, 그때부터는 하루하루가 남다를 것이다. 강량은 그리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의 이유는 분명했다.
눈앞의 저 사람이, 강량이 원하는 그러한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삶과 무공의 일체화 때문은 아니겠지.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형님의 변화는.’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대체 형님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형님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형님은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모른다.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연호정은 남들처럼 수련했고, 남들처럼 생활했다. 가끔은 남들보다도 여유롭게 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변화는 누구보다도 확실했다. 매 순간 발전했고, 퇴보의 순간을 맞닥뜨려도 기어이 뛰어올라 또 다른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
‘어쩌면.’
강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미 육체의 수련은 의미가 없는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르지.’
고수일수록 지긋한 육체 단련보다는 번뜩이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틀렸다.
깨달음 자체도 중요하나, 그 깨달음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부단한 단련이 필요한 법이다.
몸은 그릇이고 깨달음은 내용물이다. 천운이 닿아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그 깨달음을 수용하는 몸이 제대로 단련되지 않았다면 말짱 헛것이란 말이다.
심신의 조화는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노력 없이는 깨달음 역시 다가오지 않으니까.
즉, 강량은 지금 연호정의 육체가 그 어떤 깨달음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전과 감각이 달라진 것은 그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에 극도로 집중하는 와중에도 주변의 흐름을 다 읽던 형님이, 심신의 조화가 깨지자 감각도 흐려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문제야.’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예전과 비슷한 감각을 되찾고 있는 지금의 형님은…….’
팔짱을 낀 강량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의 편린을 얻어 가고 있다는 뜻인가.’
그때, 연호정의 눈이 번쩍 뜨였다.
“후우.”
강량이 팔짱을 풀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거의 정상이다.”
당관이 준 화백단의 효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지금껏 먹었던 그 어떤 내상약보다도 빠르고 안정적인 치료를 보장했다. 당관 말마따나 내상이 깊을수록 효능이 반감되겠지만, 어느 정도 내상을 다스린 상황에서 화백단을 취하면 요상 속도가 무섭도록 빠르다.
“대단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난 연호정이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까지 효능 좋은 내상약은 본 적이 없다. 괜히 사천당가가 아니구만.”
강량이 피식 웃었다.
“허구한 날 약초와 독초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 아닙니까. 영약은 몰라도 회복약의 경우엔 어떤 문파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다.”
연호정이 어깨를 빙빙 돌렸다.
거의 회복되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어깨를 돌리는 동작 하나만 봐도 평소와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송하신니와 등화는?”
“삼 층 방에 있습니다.”
“송하신니 상태는 좀 어떠냐.”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안 좋죠.”
아미파의 명진사태까지 잡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송하신니는 거의 억장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실제로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리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까지였던가? 당가주님이 이 객잔을 빌린 게?”
“그렇습니다.”
“그럼 다들 이 층으로 모이라고 전해라.”
이각 후.
일행 모두가 이 층 중앙에 놓인 탁자에 모였다.
분위기가 제법 무거웠다. 모이라고 한 연호정의 표정부터가 진지했기 때문이다.
“슬슬 일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당관, 패율, 황석태, 강량의 눈이 일제히 번뜩였다.
한옆에 앉은 송하신니 역시 최대한 힘을 내려는 듯 허리를 빳빳이 폈다. 며칠 새에 심적 고통이 극심했는지, 얼굴이 많이 상한 모습이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사천에는 낙원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원소를 만든 사람들은, 사천삼강에 속한 이들이지요.”
당관의 눈이 깊어지고, 송하신니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졌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 보니 사천 전역에 퍼져 있는 모양인데, 뿌리를 뽑아도 잔당들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잠깐.”
강량이 손을 들었다.
“낙원소라는 말도 들었고, 그쪽 사람들과 피 터지게 싸우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음.”
“저는 아직도 낙원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릅니다. 일단 그것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강량이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가주님도 모르시는 듯하고요.”
당관은 대답 없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신니.”
“예, 예?”
“설명해 주시지요. 가감 없이 솔직하게.”
송하신니가 침을 삼켰다.
“아, 알겠습니다.”
산중 수행에 생을 바쳤던 그녀였다. 낙원소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화가 났다. 수행자로서 감정을 다스려야 마땅한데도,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낙원소는…….”
송하신니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연호정과 달랐다. 요점만 짚어 말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쓸데없이 긴 부분도 있었으며, 다소 감정에 치우쳐진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모두는 기겁하고야 말았다.
“그게…….”
강량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수행자들인데요? 청성과 아미는 도불(道佛)의 수행자들에게 선망의 시선을 받는 성지가 아닙니까? 그런 곳의 수행자들이 그런 무도한 단체를 만든다는 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악귀가 되는 것은 나이의 문제도, 성별의 문제도, 신분의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깨끗하고, 때로는 억눌리고, 때로는 답답한 생활을 고수하는 수행자 집단에서 더더욱 그런 사람이 날 수 있지.”
강량은 얼이 빠졌다.
강량만이 아니었다. 패율의 눈가에는 살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다만 그의 음성은 강량만큼 격양되지 않았다.
담담했고 담백했다.
“최소 십 년 전부터다.”
“그렇습니다.”
“그 정도 고수들을 기르려면 오랜 세월이 필요해. 최소 십 년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확률이 높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조직을 세웠느냐는 거다.”
송하신니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신니. 조직이나 집단이란 그저 사람을 모은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오.”
“네?”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
“그들은 사천 곳곳에 낙원소를 세울 만큼 돈이 많소이다. 송하신니의 말대로 낙원소에서 그리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면, 그만한 인력을 구하는 데에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인건비가 들 것이오.”
“아!”
산사에서 수행에만 힘쓰던 그녀는 이런 부분에 유독 약했다.
아미파 또한 불교를 따르지만, 당연히 돈도 벌고 있었다. 돈을 벌지 않고서는 문파를 제대로 운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놈들은 십 년 넘도록 각파의 무공을 타인에게 가르쳤소. 설마하니 가르친 놈들 모두가 천재가 아니라면, 그 많은 병력을 기르기 위해 온갖 영약과 훈련 장소가 필요했을 거요.”
“그, 그렇군요.”
“거기에 놈들은 암살자까지 키웠소. 보니 암살 전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다면 더 대단한 거요. 첩보와 정보 통제는 그쪽 관련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그 방면의 인력을 기르는 것은 고수를 키우는 것보다도 훨씬 힘든 작업이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체 놈들은 어디서 그 많은 돈이 났을까? 문파의 공금을 빼돌렸다고 해도, 조직력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만한 금액이 빠져나간 것을 각파에서 모를 리가 없어.”
“그 또한 옳습니다. 다만, 하나 정정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자신의 도끼를 탁자 위에 올렸다.
“저는 제법 유명한 사람입니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자랑……은 아니지요?”
“시끄러워, 인마.”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저에 관한 얘기가 다소 과장되게 퍼지긴 했습니다. 다만 제 소문 중 가장 독특한 것은 광룡부라는 기병을 쓴다는 건데, 그 도끼는 사람 키보다 크고 무겁지요. 누가 봐도 이놈이다, 할 겁니다.”
“맞지요.”
“한데 놈들은 모르더군요.”
“……응?”
“놈들은 저에 대해 아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광룡부를 들지 않아서? 굳이 광룡부가 아니더라도, 이 연배에 도끼 들고 설치는 고수는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형님밖에 없을 겁니다. 무공의 경지까지 생각한다면요.”
“그래. 그런데도 놈들은 날 모르는 기색이었지.”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주축들은 그럴 수 있다. 색욕과 무공 수련에 빠져서 시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모두가 그러진 않겠지만, 대다수는 그럴 것이라 본다.”
사람은 한 분야에 깊게 빠져들면 주위를 보지 않는다.
들었어도 잊어버리고, 보았어도 기억을 못 한다. 그것은 고수나 범부를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첩보와 정보 통제를 위해 키워진 놈들이 나를 모른다는 건 좀 이상한 일 아니냐?”
“……그러네요?”
“이상하지. 처음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놈들은 정말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렇다면…….”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예?”
“다행이라고. 놈들의 정보력이 사천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
좌중의 눈이 번뜩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놈들이 우리 사정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다면, 그건 더 말이 안 된다고 본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개방.”
“정확합니다. 개방까지 놈들과 손을 잡았다고 봐야 하지요.”
“…….”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야. 개방은 놈들과 한통속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되니까. 잔가지들은 몰라도 말이지.”
황석태가 툭 던지듯 말했다.
“판이 엄청나게 커지는군.”
“안 커졌지. 일단 개방은 빠졌으니까. 그래서 설명이 되는 거야. 놈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음.”
“놈들은 개방을 무서워하고 있어. 그래서 사천 내의 정보만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던 거다. 그 이상의 정보력을 쌓을 힘도, 여유도, 시간도 없는 거지.”
“그럼……?”
“놈들의 세상은 사천에 국한되어 있다. 그 밖은 이미 세상이 아니야. 놈들한테는 사천이 곧 세상의 전부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공략법이 쉬워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