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낙원의 치욕 (9)
“흐음.”
촉도로 가는 길은 험하다.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사천에 몇 번 들러 본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맹에서 넘어가는 이 길은 정말이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중심을 잃는 순간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다. 잔도도 말이 잔도지, 정작 걷는 사람 입장에서는 외줄 타기를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확실히, 사천은 천혜의 요새라 할 만해.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는 것 자체부터가 힘들겠구먼.”
모용군이 혀를 찼다.
그 역시 절세의 무공을 연성한 초절정 고수였다. 나아가, 근래 공공대사를 따라잡고자 극한의 수련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그였다.
지금 그가 이룩한 경지는 그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그의 그림자가 되어 온갖 정보를 운용해 온 언자방조차도, 모용군이 얼마나 드높은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모용군조차도 혀를 찰 정도의 길이라면, 이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자방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편하게 넘고 있소.”
“자네나 나 정도면 어려울 게 아니지. 문제는 병력이야.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단독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싸움에서 머릿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인데, 무리해서 이 길을 건너다가는 애꿎은 병력만 손실될 것 같네.”
“천천히 넘어가면 되겠지.”
“그게 문제일세. 전쟁에서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자네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언자방의 눈이 깊어졌다.
“설마 당신, 사천 무림과 전쟁을 생각하고 있소?”
“그럴 리가 있나. 다만,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법이니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언제나 염두에 두고는 있지.”
참 피곤하게도 산다고, 언자방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모용군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모용군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또한, 그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습관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절벽 꼭대기에 오른 모용군이 사천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기가 질릴 만한 넓이였다.
“그런 걸 떠나서라도, 만에 하나 사천 무림이 적의 손에 떨어지게 되면 우리는 적의 손에서 사천을 되찾기 위해 병력을 파견해야만 하네.”
“…….”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야.”
언자방은 묘한 눈으로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그간 언자방은 모용군의 그림자 속에서 온갖 일을 처리했다.
때로는 입에도 담기 힘들 정도의 일도 많이 했다. 제아무리 계약 때문이라지만, 그 일을 하며 모용군이라는 사람은 악귀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도 많이 했더랬다.
‘하긴, 계약이라도 한 손 거들었으니 나라고 다를 바 없는 놈이지.’
그런 모용군이 근래 묘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심중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히 지금의 모용군은 과거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말 백도 정파의 일원처럼 보였다.
“나한테 할 말 있나?”
“음?”
“빤히 쳐다보길래 말일세.”
언자방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당신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 생각했을 뿐이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왜? 내가 무림을 걱정하는 것이 그리 낯선가?”
“조금은.”
“전주(田主)가 되려면 그 밭이 멀쩡해야 마땅하네. 내가 가질 밭이 무뢰배들의 손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고 하면, 내 기분이 좋겠는가?”
“알고 있소. 그래도 근래의 당신은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소.”
“그리 보였다면 다행일세. 실제로도 부드러워지려 노력하고 있어.”
모용군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에 소리장도(笑裏藏刀)라 했네. 진짜 위험한 자는 당가주처럼 보이는 곳에서 눈알만 부라리는 사람이 아니야. 웃음 속에 칼을 숨길 줄 아는 자가 진짜 무서운 법이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 되려 하오?”
모용군은 대답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천의 일조량은 적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일까? 아침인데도 하늘은 어두웠고, 저 아랫동네에는 묘한 안개가 드리워져 있는 듯했다.
모용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네, 근래 언가권(彦家拳)의 복원에 성과가 있었다면서?”
“…….”
“강시술(僵屍術)에 발전이 있지 않고서야 언가권이 제 위력을 찾기 어려운 법이지.”
언자방의 눈이 깊어졌다.
“갑자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묻고 싶네. 자네는 진주언가(晋州彦家)를, 다시 이 땅에 세우고 싶은가?”
“…….”
“처음 자네와 계약할 때, 자네는 이리 말했네. 언가의 강시공과 언가권을 복원하여 선조의 이름을 바로 세우겠다고.”
모용군이 언자방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꿈은 언가의 옛 명성을 부활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언가를 다시 개문(開門)하는 것인가?”
언자방은 대답 없이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군.”
“…….”
“뭐, 괜찮네. 자네도 생각이 많겠지.”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요?”
“자네에게는 이번 전쟁이 기회야.”
“……?”
“언가의 무공을 복원하여 천하에 보여 주겠다? 대체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 천하를 떠돌며 비무를 할 건가? 승승장구한다 쳐도, 언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자네를 제대로 인정해 주겠는가?”
“…….”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자네의 두 주먹으로 적도들을 물리친다면, 언가에 대한 악평이 많이 줄어들 것이네.”
언자방의 눈이 깊어졌다.
“내 개인의 꿈은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중원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소.”
“아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위기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 아닌가?”
“…….”
“세상을 위해 두 주먹을 들었다 하여 모두가 자네를 알아주진 않는다네. 와중에 자네가 별 볼 일 없는 전투에서 죽어 버리면, 언가의 이름은 더 빨리 잊혀지게 될 뿐이야.”
“나는 그리 쉽게 죽지 않을 것이오.”
“그래야겠지. 내 말은, 조금 더 영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야. 언가를 다시 열 생각이든, 무공의 증명으로 만족하든.”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이번 사천대란(四川大亂)에서 자네의 능력을 증명해 주었으면 하네.”
“그게 무슨 말이오?”
“제대로 날뛰어 보란 말일세. 자네도 내 밑에서 정보 조작이나 통제 따위의 일에 시간을 소모하고 싶진 않을 것 아닌가.”
“……!”
“제대로만 날뛰어 준다면, 자네를 무림맹에 천거해 주겠네. 한 번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자네의 활약이 쌓일수록 세상은 자네와 언가를 달리 볼 것이야.”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당장 봉공까지는 무리겠지만, 무림맹의 중책을 맡을 수도 있네. 당당하게 말이지.”
“……!”
“내가 직접 자네를 추대하겠네. 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공(功)이 필요해.”
모용군이 언자방을 바라보았다.
순간 언자방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모용군의 눈에 강렬한 야망이 깃들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모용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 역시, 모용군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를 선택한 자네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려 주겠네. 그러니 최선을 다하게.”
언자방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군이 히죽 웃었다.
“사기가 제대로 오른 것 같군. 자, 이제 우리도 슬슬 사천 제일의 가문으로 발길을 옮겨 볼까?”
* * *
“후우.”
새벽에 돌아온 연호정은 결국 술을 마시지 못했다.
이번 전투로 일이 끝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사천 쪽의 문제는 제대로 파헤쳐 보지도 못했다.
최대한 몸 상태를 정상으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온종일 운공으로 내상을 달랜 그는 한나절이 지난 후에야 수욕을 끝내고 이 층으로 내려왔다.
‘다시 또 밤이로군.’
객잔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연호정은 왠지 알 것 같았다.
“혼자 드십니까.”
이 층 창가에는 당관이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관이 턱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연호정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호정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방에 기척들이 느껴지지 않던데.”
“모른다.”
하긴, 그 성격에 대화나 제대로 했을지 모르겠다.
“그 비구니는요?”
“지부에 보냈다.”
“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신니를 데리러 갔나 보군.”
전투가 끝났으니 안전한 곳에 숨겨 둔 송하신니와 등화를 데리고 올 때가 되었다.
보아하니 모른다고는 했지만, 비구니를 지부로 보내는 역할을 일행이 떠안은 모양이었다. 겸사겸사 송하신니도 데려올 것이다.
“언제부터 마시고 계셨습니까.”
“네놈이 방에 틀어박혀 운공에 들어갔을 때부터다.”
새벽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마시고 있었단 말이었다. 연호정은 혀를 내둘렀다.
“안 취하십니까?”
당관이 퉁명스레 말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긴, 술보다 몇 배는 독하고 치명적인 독에 내성을 지닌 그였다.
해독 능력 자체가 일반 고수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체력만 되면 며칠이고 퍼마실 수 있을 것이다.
연호정이 빈 잔을 내밀었다.
“취하지도 않는데 뭐 하러 그렇게 드십니까.”
당관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백주 아닙니까, 이거?”
“…….”
“좋은 술 사 주겠다는 말은 어디로 갔습니까?”
“시끄럽다.”
연호정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가만히 그를 보던 당관이 품에서 작은 단환 하나를 꺼내 던졌다.
단환을 받은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이게 뭡니까?”
“화백단(化白丹).”
“그러니까 효능이 어떻게 되냐고요.”
“내상약이다.”
당가 전용의 내상약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가주인 당관이 들고 다닐 정도라면 천금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진작에 주지 그러셨습니까?”
“치료에 탄력이 붙지 않았을 때 쓰면 효능이 반감된다.”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부려 먹을 놈 손에 칼은 못 쥐여 줘도, 주둥이에 들어가는 것 정도는 챙겨 줘야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런 날이 다 있군.’
그간 당관은 많이 바뀌었다.
그와는 비무도 했고, 서로 손발을 맞춰 일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전생의 당관은 자신의 가슴에 독 묻은 암기를 박은 원수였기 때문이다.
‘기분이 묘하구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눈앞의 당관은, 전생의 당관과 다른 사람이다. 연호정은 그렇게 구분을 두었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마음은 정리가 좀 되셨습니까?”
당관이 피식 웃었다.
“정리한다고 가다듬어질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내일 출발할 것이다. 몇 잔 마시고 들어가서 몸이나 제대로 치료해 둬.”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연거푸 비웠다.
가만히 잔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하는군.”
온종일 술을 퍼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야 취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뭐냐?”
“전대 가주님과의 사이는 어떠십니까?”
순간 당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건 어찌 묻느냐?”
연호정의 눈빛도 당관만큼이나 날이 섰다.
“그 양반의 존재야말로 이번 승부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으리라 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