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낙원의 치욕 (8)
싸움은 기세라는 말이 있다.
사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기세를 받은 부대는 본래 위력의 두세 배를 낼 수 있지만, 기세를 잃은 부대는 본래 힘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다.
부대를 이루는 것은 사람이다. 즉, 그것은 개개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연호정 일행과 대치한 네 명의 고수는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첫 전투가 시작됐을 때도, 적의 기습에 깜짝 놀랐을 뿐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아군 병력의 십분지 일도 남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적은 누구 하나 죽은 사람이 없었다. 적의 좌장으로 보이는 청년 고수가 가장 많이 다쳤지만, 뿜어지는 기세를 보아하니 앞으로 반나절은 더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는 명확했다.
패배다.
초절정고수 열한 명, 절정고수 서른아홉 명으로 이뤄진 오십의 부대가 고작 네 명에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가히 사천 무림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이변이었다. 그들은, 특히 명진은 지금도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
연호정이 쌍도끼를 허리춤에 걸고 손을 풀었다.
“저 되다 만 비구니 하나만 남겨 두고 다 죽이자고.”
파아아아아악!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은 강량이었다.
강량의 몸도 피투성이였다. 적의 피도 많았지만, 그의 몸에도 상처가 많았다.
실전 감각이 뛰어나도 근본적인 실력 차이는 명확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분전했지만, 그 역시 상당한 내외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돌진한다. 불타오르는 기세, 흑도 제일의 패검이라는 귀검의 혼이 적의 목숨을 탐내고 있었다.
쩌어엉!
힘차게 내리친 검격에 청성 고수가 뒤로 물러났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그는 강량을 눈 아래로 굽어볼 만한 고수였다.
그런데도 밀린다. 강량이 짙은 살기와 투기에 물들어 평소 이상의 힘을 내뿜고 있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무기력했다.
이것이 바로 기세의 차이였다. 심리적 충격이 큰 상태에서는 몇 수 아래의 하수에게도 당할 수 있는 것이 승부인 것이다.
뒤이어 패율과 황석태도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쩌저저정!
두 사람은 각기 한 명씩 맡았다.
둘의 실력은 강량을 한참이나 웃돌았다. 승부는 단숨에 아군의 우위로 접어들었다.
퍼엉! 퍼퍼퍼퍼펑!
폭음과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연호정이 걸어오고 있었다.
입을 떡 벌린 채 연호정을 보던 명진이 품에서 뿔피리를 꺼내 힘차게 불었다.
삐이이이이이이.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임이 분명한데도 그 소리가 미세하게 들릴 정도였다.
이 조와 삼 조를 부르는 명진의 다급함이 소리의 크기에서 묻어 나오고 있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후볐다.
“소용없다.”
“뭐?”
“네가 부르려는 병력은 이미 전멸했어.”
“그 무슨 미친 소리냐!”
“그러니 기감을 잘 열어 두고 있었어야지. 내가 왜 내상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뻘건 창잡이의 힘을 무리하게 증폭시켰겠냐?”
“……?!”
“너희 빼고는 더 이상 싸울 놈들이 없으니 그런 거다. 그게 아니었으면 체력을 깎아 먹는 한이 있더라도 더 신중하게 잡으려 들었을 거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우우우우웅!
그의 주먹에 백호의 바람이 깃들었다.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얌전히 무릎을 꿇어라.”
명진은 당황하여 좌우를 살폈다.
‘……?!’
모르겠다.
그녀는 놀라운 감각의 소유자였지만, 멀리 떨어진 이 조와 삼 조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누구도 그러기는 힘들다. 설령 연호정이라도 이 거리에서 작정하고 은신한 흑안들의 기세를 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는 기세보다 공기를 읽고 적의 존재를 감지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아무 상관은 없었겠지만.
“이익!”
명진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적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뿔피리를 불었는데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정말 놈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결국 명진이 택할 방법은 하나였다.
파아아아앙!
순식간에 몸을 돌려 신법을 펼친다.
명진의 신법은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온 힘을 다해, 전신의 내공을 몽땅 퍼부어서 달리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명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야!’
그때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명진의 신형이 다시 연호정 쪽으로 날아갔다.
명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코와 입에서 피를 줄기줄기 뿜으며 날아든 그녀는, 온몸이 마비될 것 같은 충격에 정신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알았다.
‘주, 죽는다?!’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
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공도 불안정했고, 설령 충만했다 하더라도 사지를 놀리지 못하는 몸으로 떨어지면 치명적이다.
‘으아아아아!’
그때, 하강하는 속도가 늦어졌다.
후우웅. 쿵!
“크악!”
하강 속도가 늦어졌다 하더라도 땅에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명진이 입을 떡 벌렸다.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갈비뼈와 빗장뼈에도 금이 갔다.
눈이 잘 뜨이지 않았다. 정신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었다. 뇌진탕을 입은 것이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그러게 그냥 얌전히 무릎 꿇으라니까.”
스르르르륵.
절벽 위.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 한 사람이 사뿐한 움직임으로 하늘을 날았다.
삭.
허공에서 착지하는데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신법 조예가 극치에 이르러 있었다.
“…….”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관이었다.
“꼴이 아주 가관이구나, 싸가지.”
연호정이 툴툴거렸다.
“구경만 하니 좋으셨습니까? 도와줄 거면 진즉에 도와주시지.”
“구경 안 했다.”
실제로 당관은 이 조와 삼 조를 박살 낸 즉시 이곳으로 왔다.
제아무리 아군을 믿어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손을 보태는 것이 낫다. 당관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당관이 차가운 눈으로 명진을 내려다보았다.
“아미냐?”
“그렇습니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당관이 명진의 하복부를 밟았다.
퍼억!
“컥!”
바르르 떨던 명진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하단전, 기해혈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여전히 손속이 거치십니다.”
“네가 할 말이냐? 사람 토막 내서 죽이는 놈이.”
“사람을 자꾸 토막 살인마처럼 대하지 마십시오.”
“시끄럽다.”
가만히 당관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아드님은요?”
“…….”
당관은 대답이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잘 잡으셔야 할 겁니다.”
“……뇌옥에 처박아 두었다. 내 손으로 직접.”
“…….”
“그런 조언이 필요한 때는 지났다.”
“그렇군요.”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가십시오.”
스륵.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관의 신형이 황석태의 앞에 도달했다.
황석태는 깜짝 놀랐다.
콰앙!
적룡신창의 무서운 관통력을 주먹질 한 방으로 무마시킨 당관.
실로 놀라운 힘이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황석태가 긴장하며 적룡신창을 세웠다.
하지만 당관은 황석태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황석태가 상대하던 인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국이었다.
“……!”
당국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가, 가주님?!”
“……가주라?”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주가 맞느냐?”
“……!!”
“내가 사천당가의 가주가 맞느냐 물었다.”
당국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완전히 공포에 질려 버린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미소 짓던 당관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그가 왼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를 튕겼다.
딱!
청아한 소리와 함께 강량이 상대하던 청성의 검사, 그리고 패율이 상대하던 아미의 권사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어어?!”
촤아아악!
미처 검을 회수하지 못했다. 강량의 검에 쓰러진 청성 검사의 몸이 사선으로 쪼개졌다.
퍼억!
패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아미 권사의 머리가 관일창 일격에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
섬뜩한 광경이었다.
전투의 흥분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일대의 분위기가 한겨울 빙판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이내 그들은 깨달았다. 두 고수가 그대로 쓰러져 버린 것은 당관의 독 때문이라는 걸.
그렇기 때문에 놀라웠다. 그들은 당관이 언제, 어떻게 하독을 했는지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무시무시한!’
이것이 당가의 정점, 사천의 패자라 불리는 당관의 힘이다.
단순히 독을 써서가 아니다. 그 독을 대놓고 쓰는데도 어떻게 썼는지, 무슨 독을 썼는지, 저 동작 어디에 독의 발작을 유도하는 내공 구결이 담겼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후우우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당관이 당국을 향해 물었다.
“몇 명이냐.”
“…….”
“몇 명이 더 있느냐?”
당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선 자세 그대로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양손 가득 끌어 올렸던 진기도 어느새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저 멍하니 당관을 바라본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정신이 나가 버린 듯했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내미도 홀린 판국이다. 너 하나로 끝이 아니겠지.”
“…….”
“너에게서 당씨 성을 박탈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당관이 몸을 돌렸다.
황석태는 주춤했다. 당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석태를 위아래로 훑어본 당관이 눈을 빛냈다.
“완성도가 뛰어나군. 묵룡부에서 왔는가?”
“……그렇소.”
“거기도 인재가 있었군.”
당관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들여도 되는 거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묵룡부는 극도의 위험인물인 저도 들였습니다.”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묵룡부와 본가를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손 하나 더 보탤 사람을 들인다고 생각하십시오.”
“마음에 안 드는군.”
“마음에 안 들어도 청소부터 시작해야 할 거 아닙니까.”
당관이 다시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황석태는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을 되찾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당관이 한마디 던졌다.
“죽어도 날 원망하지 말게.”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원망의 대상은 이미 정해 두었소.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당관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이번 침묵은 다소 길었다.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당관이 고개를 내렸다.
“가세. 오늘 술은 내가 사지.”
“그러시지요.”
연호정이 그의 뒤를 따랐다.
강량이 슬그머니 연호정의 곁으로 가서 물었다.
“형님.”
“음?”
“저치는 어떻게 합니까? 그냥 놔둬요?”
강량의 시선은 당국을 향해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둬. 그리고 기절한 비구니 좀 업고 와라.”
“아, 예.”
강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명진을 들쳐 멨다. 그런 와중에도 당국은 멍하니 전방만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완전히 미쳐 버린 건가?’
그래도 저런 위험인물을 그냥 놔두고 가도 되는 것일까?
강량은 이내 의아함을 접었다. 다 이유가 있겠지.
잠시 후.
일행이 거리 입구에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당국의 끔찍한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제야 강량은 깨달았다. 이미 당국은 당관의 독에 당했음을.
아마도, 당국은 오랜 시간 지옥과도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 갈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당관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또 백주 타령하면 네놈 주둥이에서도 저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비싼 술로 사 주십쇼. 무서워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