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화. 낙원의 치욕 (7)
쩌저저정!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형을 그리는 적창의 방어막이 수십 개의 암기들을 쳐 냈다.
그 어떤 암기도 황석태의 맨살에 닿지 못했다. 간혹 빠져나온 암기도 있었지만, 창풍에 휘말려 기세를 잃은 암기들은 황석태의 옷깃에 둘러쳐진 내공 방벽에 부딪혀 그대로 튕겨 나갔다.
실질적인 부상은 없었다. 문제는 충격의 축적이었다.
‘상당하군.’
암기는 무게가 가볍다.
무게가 나가는 암기라고 해 봐야 비수나 단검 종류였다. 거기에 내력을 실어 던져 봤자, 제대로 된 관통력이나 무게감이 나올 리 없다.
하지만 실제로 창이나 몸으로 받아 보는 충격량은 상당했다.
‘암기의 폭발력이나 암기 자체의 특성 때문이 아니다.’
휘리리릭! 퍼억! 퍼억!
거리를 좁혀 좌우로 창대를 휘둘렀다. 창대에 맞은 고수 둘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갈빗대가 몽땅 부러졌을 것이다.
그때, 사방에서 독장이 뿜어졌다.
파아아악!
어느새 황석태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황석태는 변칙적인 몸놀림이나 쾌공(快功)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진과 후퇴에 있어서만큼은 어떠한 고수보다도 빠른 기동력을 자랑했다. 그것은 그의 창술 특성이기도 했으며, 철기단이라는 부대의 특성이기도 했다.
‘내공? 아니야, 단순히 내공의 질적 문제는 아니다.’
퍼어어억!
무리해서 달려든 고수 하나의 목에 바람구멍을 낸 적창이 기묘한 움직임을 발하며 다시 황석태의 손으로 돌아왔다.
일순 황석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퍼버버버벅!
섬광처럼 뿜어진 일곱 번의 창격이 고수들의 돌진을 모조리 튕겨 냈다. 그중 하나의 허벅지에는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놀라운 힘, 기교 넘치는 창술이었다. 힘과 기교가 절묘하게 맞물린 창술은 뚫을 수 없는 철옹성과 막을 수 없는 공성추로서의 위력을 오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거룡창식(巨龍槍式)이었다. 흑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창술 혈룡창법(血龍槍法)에 자신의 깨달음을 가미하고, 나아가 양천의 손을 한 번 거쳐 완벽하게 재탄생된 천하일절의 창술이었다.
창술의 위력만으로는 가히 흑도 제일을 논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기에 기마대의 돌진력까지 가미되면, 그 어떤 고수도 정면으로는 막아 내기 힘들 것이다.
파아아아앙! 펑!
날카롭게 뿜어진 장력에 황석태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적창, 적룡신창(赤龍神槍)의 창대로 막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순간의 일격이었다. 당했다면 꽤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황석태가 전면을 노려보았다.
고수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룡창식, 용미칠섬(龍尾七閃)을 피하지 못하고 허벅지가 뚫렸던 놈이었다.
황석태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퍽!
날카로운 지풍(指風) 일격에 놈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파바바박! 쩌저저저정!
기회를 놓치지 않은 고수들이 또 한 번 암기 세례를 퍼부었지만, 황석태의 거룡칠식은 물 흐르듯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뚫리지 않는다. 탄성 가득한 회전으로 붉은 방패를 만들어 내는 창술 초식 앞에, 수십 개의 암기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그때, 한 줄기 비수가 바람을 타고 황석태의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전방에서 쏟아졌던 암기 세례를 생각하면 코웃음을 치며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
하지만 황석태는 회피를 택했다.
훅!
한 걸음만으로도 삼 장 거리를 물러났다.
놀랍게도, 느릿하게 쏘아졌던 비수는 어느새 탄력적으로 회전하며 황석태의 허벅지 앞에 도달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방향 전환에 믿기지 않는 속도 변화였다.
황석태가 주먹으로 비수를 내리쳤다.
카아아앙!
비수가 부러지며 땅을 굴렀다.
황석태의 주먹도 무사하진 않았다. 비수의 날을 친 그의 주먹이 꽤 깊게 베였다.
‘이건?’
그때,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검광 세 줄기가 폭죽 터지듯 비산했다.
퍼버버버벅!
“크아악!”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무리.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 먹이다.”
“지금 그따위 걸 따질 때요!”
바람처럼 달려든 강량이 신들린 듯 철검을 휘둘렀다.
파바바박!
진형이 무너진 틈을 타서 혼신의 힘을 다한 검격을 구사한다.
강량의 기가 막힌 전투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적이 강하게 나올 때는 회피와 반격으로 힘의 소모를 최소화하다가, 적의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여 피해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무공 이전에 그 전투 감각만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연호정과는 또 다른 실전 감각, 부족한 면은 있지만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실전 검사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어쨌든.’
우웅!
내공으로 상처를 봉합한 황석태가 강량의 등을 노리던 검사의 옆구리에 적룡신창을 박아 넣었다.
‘이제야 알겠어. 당가의 암기술이 왜 이리 위험한지.’
털처럼 얇고 가벼운 암기 하나를 막는 데에도 제법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수준이 다른 고수라서 손쉽게 튕겨 낸 것이지, 같은 수준의 고수라면 돌진의 기세가 주춤해질 정도의 힘이었다.
그것은 내공의 질적 문제가 아닌 활용도의 문제였다.
‘당가 암기술의 핵심은 암기 자체의 신묘함이나 정확도가 아니야.’
쩌저저저저저정! 쾅!
강량의 귀검이 사이한 초식을 그려 내며 적의 빈틈을 유도했다.
그 빈틈을, 황석태는 놓치지 않았다. 거룡창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몰아치니, 적들의 머릿수가 하나씩 하나씩 줄어들었다.
‘그건 기본이었어. 그 기본 위에, 암기의 파괴력, 관통력, 속도 변화를 극대화하는 내공 구결이 따로 있는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황석태는 내심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한 줌의 무게도 되지 않는 암기에 천 근의 무게를 담아낸다. 그처럼 신묘한 내공 운용법을 창조하는 데에만 해도 수 세대의 노력이 쌓였을 것이다.’
이것이 전통 있는 명가의 힘이다.
그들은 선조가 창안한 강력한 무공을 휘두를 줄만 아는 바보들이 아니었다.
그 가문 자체가, 하나의 무공을 수백 년 동안 개량하고 또 개량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창출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었고, 혈족의 힘이었다. 다른 어떤 가문보다도 폐쇄적이고 독한 당가는, 어느새 그들만의 독자적인 무공과 기술을 개발하여 사천을 휘어잡는 절대강자로 성장한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흑도에도 필요하다.’
파바바바박!
황석태가 제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장력과 검격, 암기를 모두 막기란 불가능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몸에도 상처가 나고 있었다.
당장에 문제가 될 상처들은 아니었지만, 그의 전투 능력을 확실하게 깎아 먹을 수 있는 상처들이었다.
황석태가 이를 악물었다.
‘저러한 선대의 역사가 흑도에도 필요한 것이야. 그래야 흑도 무림에도 실질적인 힘이 생긴다. 백도 무림에 밀리지 않는, 역사로 쌓아 온 진짜 무력(武力)이.’
쩌저정! 퍼억!
강하게 적을 몰아치던 황석태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놈들의 공격이……?’
더 강해졌다.
더 강해졌지만, 더 난잡해졌다.
느닷없는 공격에 상처를 입는 횟수가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변하는 적의 진형에 황석태가 빠르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때였다.
퍼버버버버벅!
순간 황석태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 좌우로 호선을 그리며 날아든 흑백의 쌍도끼가, 상대하기 난해했던 적 열 명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 버린 것이다.
‘연 부관?!’
팍!
대체 언제 자신의 뒤로 돌아왔을까.
황석태의 어깨를 밟고 날아오른 연호정이 허공에서 흑백쌍룡부를 회수하며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그의 발이, 목을 잃고 쓰러지는 시체들 사이를 정확하게 밟았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진각이었다.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는 백호의 충격파가 주변 모든 고수들의 균형 감각을 무너트렸다.
번쩍!
때를 놓치지 않은 강량이 연호정의 좌측에서 귀신처럼 이동해 적 셋의 목을 따 버렸다.
패율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석태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다가온 그는 연호정의 우측에서 번개처럼 이동하여 적 넷의 가슴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치리리리리링!
두 사람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 준 것은 연호정이었다. 신들린 듯 움직이는 교룡쇄가 적들의 파상 공세를 유연하게 막아 내며 충격을 최소화했다.
연호정이 외쳤다.
“뒤로!”
파아아아악!
강량과 패율이 연호정을 넘어 황석태의 뒤로 물러났다.
화르르르르륵!
연호정의 교룡쇄가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꿈틀거리며 전방 전체를 봉쇄한 교룡쇄의 움직임은 실로 한 마리의 용과 같았다.
순간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나다?!’
찰나의 찰나를 쪼갠 순간, 황석태는 깨달았다.
저 멀리 선두에서 싸움을 벌이던 연호정은 적 병력을 좌우로 찢어 버렸다. 그 덕에 황석태가 상대하던 적들도 당황하여 진형이 무너졌고, 그사이 난전이 벌어지며 자신과 적들이 살벌하게 부딪쳤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강량과 패율이 후측방으로 물러나고, 연호정이 주작화기로 불의 방벽을 만들어 낸 지금.
이 공격의 중심은 자신이었다.
파아아아아앙!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돌진한 황석태가 연호정이 만들어 낸 불의 벽을 뚫고 전방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거룡창식, 거룡대포(巨龍大砲)였다.
콰아아아앙!
거룡창식에서도 손에 꼽히는 파괴력을 지닌 초식이었다. 말 그대로 대포와 같은 위력을 발휘한다.
거기에 주작화기가 소용돌이치며 적의 시야와 기감을 교란했다.
콰르르릉! 쾅! 콰릉!
온갖 폭음과 함께 전방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황석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르르르륵.
불길이 걷히고, 교룡쇄가 꿈틀거리며 돌아와 연호정의 상체에 감겼다.
“이, 이런?!”
적룡신창이 만들어 낸 참상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남았던 적의 병력 열다섯 중, 무려 열이 넘는 이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즉사를 면치 못했고, 나머지 절반도 신체 어딘가가 날아가거나 극심한 화상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전투 불능 상태인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광경인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석태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연호정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철기단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만. 자신이 나서야 할 무대를 아주 잘 알고 있어.”
주작화기를 둘러친 교룡쇄의 청룡공, 용군삼형.
그 희대의 반격기에 힘을 받은 대포 같은 창술이 저 많은 고수를 몽땅 황천으로 보내 버린 것이다.
주르르륵.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주작기로 청룡공을 펼쳤다.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내상이 심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그의 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고 있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어때? 위험할 것 같으면 몸을 빼겠다면서, 아직도 위험한가?”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여러모로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
“칭찬 고맙네.”
“이런 전투도 있었군. 크게 배웠어.”
“자네가 감이 좋았던 거야. 때를 읽지 못했다면 전투가 두 배는 더 길어졌겠지.”
“물론 질 생각은 없었겠지?”
“나는 패배의 미학 따위는 개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세. 질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이런 곳에서 싸우지도 않았어.”
정말 못 당하겠다.
황석태가 적룡신창으로 전방을 겨누었다.
“이번 술은 내가 사지.”
남은 고수는 넷.
멀찍이 떨어진 명전의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어렸다.
연호정의 눈엔 살기가 어렸다.
“오늘은 비싼 술 좀 마셔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