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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62화 (561/963)

562화. 낙원의 치욕 (4)

느닷없는 사태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중턱에 있던 고수를 공격했던 풍뢰자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습격자에게 목숨을 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고수들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압도적인 숫자에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그들은, 애초에 이런 식의 기습을 상정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때, 패율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당국이 외쳤다.

“공격해! 공격해라!”

파라라라락!

무수히 많은 암기가 패율을 향해 솟구쳤다.

그때, 연호정의 교룡쇄가 한발 앞서 패율의 다리 하나를 묶었다.

티이이이잉!

엄청난 속도로 끌어당겨진 패율.

쏘아진 암기들이 모조리 허공을 갈랐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쾅!

바닥에 내려선 패율이 투덜거렸다.

“아프다.”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명진이 버럭 소리쳤다.

“죽여! 다 죽여 버려!”

파바바박!

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연호정과 패율을 향해 달려들었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좋지!”

콰아앙!

달려드는 그들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돌진한 연호정이 백룡부를 휘둘렀다.

쉬이이이이잉!

단숨에 몰아치는 새하얀 참격, 백룡의 도끼날 위로 하얀 야수의 발톱이 어른거렸다.

쩌저저정!

쏟아지는 경력을 한 번의 휘두름으로 모조리 쳐 낸다.

강력한 힘이었다. 연가신단의 힘을 받아 최고의 출력을 뽑아낸 백호기, 거기에 전사력(轉絲力)까지 가미하여 파괴력을 더했다.

그들의 공격이 튕겨 나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연호정의 몸은 명진과 당국을 지나쳐 사십여 명의 고수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퍽! 퍼벅! 퍼어억!

백룡부가 목을 자르고, 흑룡부가 팔다리를 찍어 낸다.

두 자루의 신병은 자신들이 할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연호정의 몸놀림에 맞춰 화려하게 움직이는 흑백쌍룡의 신병이 단숨에 여섯 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냈다.

“이런!”

당국이 외쳤다.

“떨어져라!”

사십여 명의 고수 중에는 당가의 무공을 연성한 자들이 절반이 넘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독공과 암기에 능했다.

독과 암기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만, 모여 있을 때의 효율은 최악이었다. 다 같이 몰아칠 때라면 몰라도, 저 미친놈처럼 목숨을 걸고 중앙으로 돌파한 놈이 있다면 무조건 흩어져야 했다.

파바바박!

흩어지는 고수들.

연호정이 그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어딜.”

치리리리리리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교룡쇄가 거대한 원을 그렸다.

퍼버버버벅!

마치 철쇄 끝에 신검이 달린 것 같았다. 교룡쇄는 무려 십여 명의 고수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크아악!”

“아악!”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검에 찔린 것도 아니고 철쇄에 뚫렸다. 뭉툭한 철쇄는 그들의 내장을 찢어 내며 빠져나왔다.

당장 죽지는 않아도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기는커녕 내공 운용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펑! 퍼펑!

물러나며 쏟아 낸 장력이 연호정의 몸을 후려쳤다.

연호정이 몇 차례 움찔거렸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 교룡쇄를 회수해야만 했다. 그리되면 전투가 길어질 것이고, 전투가 길어지면 승리를 거머쥘 수 없다.

기습의 묘를 살린 직후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술로 갔다. 그 자신의 실력과 몸을 믿고 감행한, 과격하기 그지없는 전술이었다.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청룡기가 솟구쳤다.

청룡기는 간장(肝臟)을 담당한다. 간장은 인체에 들어온 거의 모든 종류의 탁기를 제거하는 해독의 장기였다.

그 대상엔 독도 포함되었다. 극도로 달아오른 청룡기가 간장 능력을 활성화하고, 활성화된 능력을 온몸으로 끌어내 침투하는 독기를 막았다.

‘괜찮아.’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목에서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참을 만해.’

연호정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콰앙!

대지가 뒤흔들리며 강렬한 충격파가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연호정 주변에서 물러나던 이들이 일제히 휘청거렸다. 그들 모두 뛰어난 고수들인데도, 진각 일발에 신체의 균형을 잃어버렸다.

백호군림보였다. 사신무 최고의 전투 보법이지만, 연호정에게는 보법 또한 공격의 하나였다. 최대 출력으로 내력을 쏟아 내어, 가공할 만한 내공 조절로 충격파를 극대화한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극상승의 창의력. 그 화려한 힘의 발산에 부대 전체가 당황했다.

연호정이 외쳤다.

“적창!”

콰르릉!

저 멀리, 거리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온 황석태가 적창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엄청난 파괴력이다.

맨몸인데도 마치 거대한 기마를 타고 돌진한 것과 같은 위력을 자아낸다. 적창과 함께 뿜어진 살기의 무공이 고수 셋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다시, 기습의 위력이었다. 정면 대결이었으면 수십 합을 겨루어야 겨우 물리칠 전력을, 단 일격으로 끝장내 버린 것이다.

명진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기습, 그리고 또 기습이다.

고작 한 명씩 기습을 한 것에 불과한데도, 부대 전체가 입은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전술의 근본이다. 제아무리 적은 병력이라 한들 시기적절한 기습 한 번으로 부대 전체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으며, 종국에는 공포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그래 봤자 고작 셋이야!”

번쩍!

명진의 외침에 남은 고수들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렇다. 그들은 고작 셋이었다. 하나하나가 놀라운 고수들이었지만, 그래도 전력의 차이가 컸다.

당황으로 떨어지던 사기가 명진의 한마디에 다시 불타올랐다.

명진이 재차 외쳤다.

“차근차근 몰아쳐! 독인들은 무조건 거리를……!”

그때였다.

쩌어어어엉!

“큭!”

명진이 비틀거리며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를 공격한 것은 패율이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공격의 때를 살피던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명진을 공격한 것이다.

“역시, 대단한 실력이오.”

우우우우웅.

패율의 단창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그 살기는 가히 황석태의 살기 못지않았다. 다만 황석태의 살기가 군기(軍氣)와 어우러져 풍성하고 위압적이었다면, 패율의 살기는 뾰족하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따로 어울려 봅시다.”

“개 같은 새끼가!”

퍼어어엉!

금강복호권은 가히 신권(神拳)의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절기였다.

단창에서 느껴지는 권력(拳力)이 실로 무서웠다. 창을 넘어 팔목, 팔꿈치까지 진동하는 듯했다. 제대로 쥐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일격에 창을 놓쳤을 것이다.

파바바바박!

그럼에도, 패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겁을 먹지도 않았고,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의 무공은 언제나 전진을 요구했다. 단숨에 명진의 품으로 파고든 패율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단창을 올려 쳤다.

명진이 냉정한 얼굴로 손을 휘둘렀다.

쩌어엉!

턱을 꿰뚫을 듯 솟구치던 단창이 갈 길을 잃었다.

단창의 경로를 따라 패율의 몸도 좌측으로 쏠렸다. 굉장한 힘이었다.

‘이놈.’

명진의 주먹이 패율의 머리를 노렸다. 일권에 머리통을 날려 버릴 기세였다.

그때였다.

몸통이 쏠린 그대로 회전하던 패율의 왼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소검이 들려 있었다.

쩌어어엉!

“큭!”

명진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물러났다.

“후우.”

패율이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낮추었다.

오른손에는 단창, 왼손에는 소검이다.

각고의 단련을 통해, 좌우 어떤 손으로도 창과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된 그였다. 훗날 점창파 최고의 절기로 칭송받을 관일공(貫日功)을 완벽하게 터득하기 위해선 양손의 움직임에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노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훅 하고 끼쳐 드는 모래바람 사이.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솟구친 주작화기가 교룡쇄를 순식간에 달궜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악!”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교룡쇄에 뚫린 고수들이 그대로 쓰러졌다.

죽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죽는 것보다도 못한 상태일 것이다. 뚫린 부위를 지져 버리는 주작기의 화력은 그들을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후우우욱!

연호정의 몸에서 진녹색 기운이 뽑혀 나왔다.

청룡기로 즉각 독을 해독하며, 남은 독은 화기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펑! 퍼펑! 퍼퍼퍼펑!

수많은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평소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공격을 모조리 받아 내야 했다.

주르륵.

연호정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다. 어느새 안색도 창백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아군의 희생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 무도한 놈들을 상대하는데, 일행 중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 실전에서 그러한 마음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지만, 적어도 이들과의 싸움에서만큼은 아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연호정은 스스로를 희생했다.

일행 중 가장 강하고, 가장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신기(四神氣)의 무한한 공능은,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그를 버티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연호정의 신앙과도 같았다.

파바바바박!

그런 연호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독장이라면 오히려 쉽게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암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천하의 금강불괴(金剛不壞)가 아니고서야 암기가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암기 중에는, 피부를 베어 내는 것도 모자라 혈관을 타고 내부를 찢어내는 위험한 놈들도 많았다.

연호정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부우우우우웅! 쩌저저저저정!

회전하는 몸에서 현무기가 솟구치며 강렬한 수기(水氣)의 방벽을 세웠다.

진기의 방벽이다. 기(氣) 중 가장 밀도가 높은 수기를 이용하여 촘촘한 방벽을 만드니, 그 어떤 암기도 연호정의 몸을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적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퍼퍼퍼펑!

북천십이벽의 방어력이 무서운 속도로 약해졌다.

독장 때문이었다. 장력에 깃든 독기는 무형의 방벽인 현무기를 오염시키기에 제격이었고, 독에 오염된 현무기는 응축된 방벽 곳곳에 빈틈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극한의 집중력으로 세운 북천십이벽이라면 독장조차도 손쉽게 막을 것이다. 다만 뒤흔들린 내부와 심해지는 내상, 급박한 상황이 맞물려 북천십이벽을 완벽하게 세우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괜찮아.’

연호정이 백룡부를 던졌다.

퍼어억!

암기를 던지려던 고수 하나의 머리통을 날린 백룡부가 호선을 그리며 돌아와 다시 그의 손에 잡혔다. 어느새 교룡쇄를 연결해 두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버틸…….’

콰앙!

연호정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개새끼.”

사태를 지켜보던 청성과 아미 소속 고수들이 마침내 연호정을 잡기 위해 나섰다.

그들 모두가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였다. 풍뢰자가 죽고 명진은 패율과 싸우고 있으니, 남은 초절정고수만 무려 아홉이었다.

연호정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진짜 아쉽군.”

일 대 구의 싸움이라면, 온갖 전술과 실전 경험으로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난전에서, 아홉 고수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은 막막하기만 했다. 서너 명 정도야 코웃음을 치며 날려 버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아홉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덩치 큰 비구니, 도선이 말했다.

“다른 놈들은 됐다. 어떻게든 저 도끼부터 죽여야 한다. 저놈이 이 병력의 핵이야.”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가 이 무리에서 제일 똑똑하냐?”

“닥치거라!”

부우우웅!

도무지 비구니의 무공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묵직하게 공기를 밀어 내며 다가오는 권풍이 압권이었다. 속도를 버리고 오로지 파괴력만 살린, 느릿하지만 맞으면 치명타가 될 만한 권풍이었다.

연호정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권풍이 산산조각이 났다.

도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권풍이 이리 쉽게 박살 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앞서 한 말은 취소다. 대체 어쩌자고 무공을 이따위로 익혔냐? 무식해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이 새끼가!”

그때였다.

번쩍!

허공을 가로지르는 패도적인 검광이 도선의 머리를 향해 쏟아졌다.

깜짝 놀란 도선이 주먹으로 검광을 막았다.

쾅!

힘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자부했지만, 이 검광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호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 전에 형님이 죽게 생겼잖소!”

파바바박!

기습의 일격을 내친 강량, 그 역시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들은 알 수가 없었다.

파아아악!

물러난 도선을 향해 연호정이 달렸고, 도선의 좌우로 선 고수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연호정의 뒤를 쫓는 고수들을 강량이 막았다.

쩌저저저저정!

신들린 쾌검으로 암기를 쳐 낸 강량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거 진짜 좆 된 거 아닌가.’

이 승부, 정말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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