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화. 낙원의 치욕 (1)
자정이 지나 축시(丑時) 중반이 되었다.
활발하던 거리도 그 기세가 죽었다. 거리는 여전히 번쩍번쩍했지만, 오가는 사람의 수는 십분지 일로 줄어들었다.
거리의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패율의 눈은 한없이 깊기만 했다.
‘온다고 한다면 역시나 이곳을 통과하겠지.’
괜스레 등 뒤에 맨 단창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서늘한 창대의 감촉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복잡하십니까.”
패율이 옆을 돌아보았다.
강량이 단검으로 육포를 뚝뚝 잘라 베어 물고 있었다.
“사는 지역은 달라도 같은 구파일방으로 엮인 문파에 저런 사람이 나 버렸군요. 선배 마음도 복잡하겠습니다.”
“시끄럽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형태로든 문파에 변절자가 나오면, 기분이 참 착잡해지지요.”
“…….”
“그나마 아미는 다행인 겁니다. 무너지기 전에 변절자의 존재를 알았으니까.”
패율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너는 아직 변절자를 찾고 있냐?”
“찾아야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귀철검문을 무너트린 건 양천이 아니냐?”
“정확히는, 양천의 명령을 받은 묵룡부의 전력이지요.”
“그게 그거지.”
“맞습니다. 그게 그거죠. 그래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복수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을지.”
문득 패율은 강량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평소 언행과는 달리, 생각이 깊은 놈이었다. 강량은 문파를 잃으면서 부모를 잃었고, 형제와 같던 검사들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아픈 경험은 패율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점창이 양천의 손에 무너졌다면? 그리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면?
볼 것도 없다. 목숨 따위 돌보지 않고 곧장 묵룡부로 쳐들어가 눈에 보이는 모든 흑도인의 목을 따 버렸을 것이다.
복수라는 것은 효율의 문제를 따지기 힘든 행위다.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 악당의 손에 죽었는데, 어찌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자신은 힘을 기르겠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대로 진격했을 것이고, 양천의 얼굴은 보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강량은 참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 녀석 성격상, 절대 목숨이 아까워서 지금껏 참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항상 핀잔을 주곤 하지만, 이놈은 진짜다.
극단적인 감정을 매 순간 억누르고 있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원수인 양천의 품으로 들어갔음에도 섣부른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 중반에도 이르지 못한 혈기 넘치는 청년답지 않았다. 성격을 보았을 때 타고난 것은 아닐 테니,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억누르고 또 억눌렀을 것이다.
“귀철검문의 배반자는 양천에게 들러붙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양천의 목을 딸 수는 없지만, 그 변절자의 목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지 않겠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양천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 텐데?”
“이해 안 해 줄걸요. 설령 이해한다 한들, 이미 변절자 놈은 호남에 없습니다.”
“어떻게 알지?”
“양천이 말해 줬거든요.”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그 양반과 너의 관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복잡할 거 없습니다. 그냥 원수지간일 뿐이에요. 다만 저는 그 원수의 심장에 칼을 박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고, 그자는 드높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변절자는 어찌 사라졌다더냐? 너희 문파를 배신한 것은 그 나름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 아니었느냐?”
“순진한 생각이십니다.”
“음?”
“대가를 받기 이전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뭘 얻으려고 변절한 게 아니라, 본인은 살겠다고 배신한 것이지요.”
“…….”
순간 패율은 할 말을 잃었다.
나름대로 강호 경험이 풍부한 그였지만, 자주 보고 들어도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목숨이 아까워 문파를 배신한 놈들이었다.
차라리 뭔가 이득이라도 있었다면, 괘씸한 건 똑같아도 이성으로 이해는 했을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죽기 싫어서 문파를 배신했다고?
‘끔찍하군.’
그렇게 삶을 이어 간다고 해도, 그 삶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 변절자는, 배신행위에서 오는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사람의 삶을 버리고 짐승의 삶을 택했군.”
“글쎄요.”
“아니라고 보는 것이냐?”
강량이 피식 웃었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고매한 누군가는 그러한 행위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치사한 행위라 생각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생존을 위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너는 어떠냐?”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왜지?”
“그러한 행위를 어떻게 보는가를 떠나, 그놈은 제가 죽여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고매한 사람도 아니고, 짐승의 삶을 당연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아니에요. 그저 적들의 손에 가족과 문파를 잃은 검사일 따름입니다.”
“…….”
“거기에 숭고한 가치나 필요 이상의 혐오를 씌우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불순물이잖습니까.”
강량이 단검을 품에 넣었다.
“저는 복수를 할 겁니다. 그저 그게 전부입니다.”
패율은 생각했다. 이 녀석은 이미 어른이라고.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사십 년을 넘게 산 자신보다도 성숙한 것 같았다. 하기야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기도 했고,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가만히 강량을 보던 패율이 한마디 던지며 고개를 돌렸다.
“꼭 성공해라.”
“당연하지요. 그때까지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강량이 패율의 단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 단창은 어째 점점 마물(魔物)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음?”
“창 자체에서 피 냄새가 줄줄 흐르는데요? 정파 무림의 정점이라는 구파의 사람 손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 냄새가 난다고?”
“그냥 느낌이 그래요. 선배는 그리 안 느끼시나 보죠?”
“모르겠다. 나는 둔한 사람이거든.”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패율은 거칠지만 솔직한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 필요 이상의 자부심을 지니거나 자존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후배 앞이라지만, 모른다는 건 모른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사람 까다롭게 보는 연호정이 패율에게 꼬박꼬박 선배 대접을 해 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잡담은 그만하지. 연호정 그 녀석이 말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쩝, 아무리 형님이라도 적이 어느 시간에 움직일지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어렵지.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착착 해내 온 놈이 아니더냐.”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무섭네요.”
“그 고수들을 직접 쓰러트린 게 그놈이야. 아마 깨어나는 시간 정도는 직접 조절했을 것이다.”
패율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곧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잡힐 것이다.”
패율의 말은 사실이었다.
일각 후.
“……?!”
거리의 좌우를 훑어보는 강량의 눈이 매서워졌다.
“선배.”
“느꼈다.”
“……시벌, 이 새끼들 작정을 한 것 같은데요?”
“사천삼강(四川三强)의 장로급 인사들이 당했다. 저치들 입장에서도 어중간한 병력을 파견할 리는 없지.”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과한데.”
저 멀리, 커다란 건물 좌우에서부터 은밀하게 거리를 감싸고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기세를 죽이고 거리를 가로지르지만, 애초에 저들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 패율과 강량의 눈에는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가 훤히 보였다.
“백오십여 명…… 그중 암살자는 백 명 정도 되는 것 같고…….”
강량의 얼굴에 불신이 어렸다.
“미치겠네. 이게 말이 되나? 남은 오십 명, 느껴지는 무력이 엄청난데요? 선배에 뒤지지 않는 무력만 열이 넘어요. 나머지도 능히 장로급이라 할 만합니다.”
무력의 편차는 크지만, 애초에 구대문파의 장로급이라 불릴 정도라면 무종지벽에 멀지 않은 수준은 되어야 한다.
백오십 중 백 명을 제외한 오십 명의 고수 중, 무려 사십여 명에 가까운 고수들이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 나머지는 최소가 패율급이었다.
적어도 느껴지는 기세와 존재감은 그러했다.
강량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 새끼들, 저렇게나 많이 썩었단 말이야? 사천의 대장 문파들이라고 거들먹거리더니 완전히…….”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예?”
패율이 암살자들 뒤에 붙어 천천히 거리를 주파하는 고수들을 훑었다.
“저 오십 고수들 모두가 청성, 아미, 당가의 무공을 익혔다.”
“그러니까요. 저렇게 많은 놈들이 변절자라면…….”
“하지만, 그 세 문파에 속한 놈들은 별로 없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
“……설마?”
“확신은 못 하겠다. 거리가 너무 멀어. 하지만…….”
패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문파 특유의 색이 옅어. 문파 소속은 아니지만, 그 문파의 무공을 익힌 놈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변절자들이, 문파의 무공을 유출해 오래전부터 고수를 길러 왔다는 뜻이었다.
“미친! 그게 말이 됩니까?”
“모르겠다.”
“절정고수 하나 만드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재능 있는 놈들을 추려서 이런저런 지원을 쏟아부어도 최소 십 년이란 말입니다.”
“정말 저들의 정체가 문파 소속이 아니라면, 변절자들은 최소 십 년 전부터 반역을 꿈꾸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
패율이 몸을 돌렸다.
“지금은 저놈들의 과거를 유추해 볼 때가 아니야. 일단 가자.”
“그랬단 말이지요.”
패율과 강량의 보고를 들은 연호정의 얼굴은 유독 심각했다.
황석태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사천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버린 것이로군.”
아무도 몰랐던 새에 이렇게까지 곪아 버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놈들이 급파한 병력의 규모가 이 정도나 된다는 것이지요.”
“…….”
“그리고 그만한 병력이 우리를 노리고 오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낙원소라…… 이것들, 정말 보통이 아니로군.”
강량이 물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낙원소가 정확하게 뭡니까?”
황석태가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놈들부터 막아야 하니.”
“막는다고요? 그만한 병력을요? 그냥 발 빼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낙원소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나중에 몽땅 상대하느니, 지금 힘이라도 좀 빼 놓는 게 좋지 않겠냐.”
“말은 좋죠. 초절정고수가 열이 넘는다니까요? 저 정도 하는 놈들도 사십이나 돼요. 거기에 암살자 백 명까지 있는데, 이겨도 우리 쪽에 사상자가 나올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 아니냐.”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산의 중턱, 깎아지른 듯한 경사도를 가진 참호(塹壕)와 같았다. 일시적으로 수성전을 벌이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연호정이 교룡쇄를 꺼내 들었다.
치리리리링!
양손에 단단히 쥐어진 교룡쇄에서 섬뜩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자신감을 가져. 다 묻어 버리고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