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8화. 붕괴의 조짐 (8)
“헉!”
송하신니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사, 사저!”
등화사태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닥쳐라.”
나직이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그야말로 살벌했다.
강량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저 묘한 사람은 누굽니까?”
연호정이 대뜸 등화사태의 등을 걷어찼다.
퍽!
“큭!”
등화사태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연호정에게 내공을 봉쇄당하고 마혈을 짚여, 목 아래는 완전히 마비 상태였던 것이다.
“아미의 장로였던 사람이다.”
“아, 아미의 장로요?”
강량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도무지 그렇게 보이질 않는데요?”
그럴 만도 했다.
부처를 모시고 불법을 배우는 비구니들의 문파가 아미파였다. 한데 등화사태는 머리를 기르고 분칠을 했으며, 제법 화사한 의상까지 입고 있었다.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 신체도 늙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얼굴을 제외하면 젊은 처자라고 오해할 만한 외양이었다.
얼핏 보면, 젊을 적 기녀 생활을 하다가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간 사람 같기도 했다.
더는 승복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강량은 물론 패율과 황석태도 충격을 받았다.
물 한 사발을 마신 연호정이 대차게 트림을 뱉었다.
“그래서 말했잖냐. 장로였다고. 지금은 아니다.”
“에?”
“저 모습 어디에 아미가 있냐. 직책은 아직 장로일지도 모르지만, 더는 아미의 사람이 아니야. 아예 아미를 증오하기까지 하던걸, 뭐.”
담담한 목소리로 엄청난 내용을 말하는 그였다.
패율이 툭 던지듯 말했다.
“술이 필요한 밤이군.”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꽤 심란한 말로 푸는 그였다.
연호정이 송하신니에게 물었다.
“사저라고 했소?”
“…….”
“송하신니.”
“예? 아, 예.”
“사저라면, 이 사람의 신상 명세나 말해 주시오.”
등화사태는 독한 눈으로 송하신니를 올려다보았다.
송하신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충격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등화 사저라고 합니다. 제 사저이자…… 본산의 이장로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로라면 대표 장로 중 하나로군. 확실히 무공 자체는 뛰어나 보였소.”
“…….”
“당신이 쫓던 사람이 이 사람이오?”
“……아닙니다.”
주르륵.
송하신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저는 등화 사저께서도 이 일에 연관되었을 줄은 정말 몰랐…….”
“닥치지 못해!”
등화사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개 같은 년! 네년 하나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아이들까지 죽었다! 너는 절대 곱게 죽지 못할 것이야!”
느닷없는 폭언이었다.
강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 망할 인간 주둥이에 몽둥이 하나 물려 줘도 됩니까?”
“왜 굳이 몽둥이냐? 칼을 물려 주지.”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긴 합니다.”
“뭐, 주둥이는 몰라도 다른 부위는 생각하고 있지.”
연호정이 등화사태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크윽!”
엄청난 완력이었다. 내공 한 줌 쓰지 않고 단련된 성인 여성을 들어 올렸다.
등화사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가 몰려서 그런 건지, 수치스러워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연호정이 빈 의자로 등화사태를 던졌다.
터엉!
거칠게 내던져져 아무렇게나 늘어진 등화사태를 대충 바로 앉힌 연호정이 그녀의 아혈을 짚었다.
순간 그녀의 목에 핏줄이 불거졌다.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연호정이 강량에게 손을 내밀었다.
“칼.”
강량이 요대에서 검을 풀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단검.”
“이거요?”
강량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노숙할 때 사냥이나 고기를 자르는 용도로 쓰는 칼이었다.
강량에게서 단검을 건네받은 연호정이 그대로 등화사태의 발등을 찍었다.
푹!
등화사태의 얼굴이 붉다 못해 퍼렇게 질렸다.
단검이 발등부터 발바닥까지 그대로 뚫어 버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당한 일격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이 전해진다.
놀란 건 등화사태만이 아니었다. 송하신니는 물론 다른 세 사람도 깜짝 놀라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겉옷을 벗어 등화사태에게 던졌다.
펄럭!
등화사태의 얼굴과 상반신이 가려졌다.
연호정이 교룡쇄와 흑룡부를 들고 말했다.
“잠시만 나가들 계십시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 말의 의도는 명백했다.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 안 됩니다!”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송하신니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사저입니다! 아미의 장로라고요! 은공이라지만 이런 처사는 절대……!”
그때, 패율이 송하신니의 어깨를 잡았다.
“나갑시다.”
“패율 장로!”
“저자는 신니의 사저이자 아미의 장로일지 모르지만, 달리 보면 사천을 광기의 늪으로 빠트리는 주동자 중 한 명일 수도 있잖습니까.”
“하, 하지만!”
“인의와 정(情)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런 인간적인 감정은 덮어 둬야 할 시기 같습니다.”
“……!”
“저희를 믿으십시오. 아닌 말로, 지금 신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이 결정타였다.
독한 말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송하신니의 능력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저 녀석은 무림맹 유군 부대의 대수이자, 무림맹 대표로서 흑도에 파견된 사람입니다.”
“…….”
“무림맹은 아무에게나 그런 직책과 책임을 건네주지 않습니다.”
결국 송하신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패율이 연호정에게 말했다.
“너도 알고는 있겠지?”
“…….”
“상황이 어찌 되었든, 상대는 아미파의 이장로다. 이 일, 설령 제대로 풀린다 한들 아미파에서 불만을 표할 수도 있는 문제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감수할 수 있겠냐?”
“그런 거 하나하나 따지면서 일 저지를 사람으로 보셨습니까?”
“너는 그게 문제야, 이 자식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원 모두가 저를 미워한다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호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심정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사였다.
패율이 피식 웃으며 송하신니를 이끌고 나갔다.
황석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와줄 건 없나?”
“누가 들어오지 않게만 해 주게.”
“그건 걱정하지 말게.”
황석태가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비싼 단검입니다. 망가트리진 말아 주세요.”
“봐서.”
“쳇.”
그렇게 남은 두 사람도 방을 나섰다.
연호정이 교룡쇄를 들어 올렸다.
치리링!
쇠와 쇠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섬뜩하게 들릴 줄은, 등화사태도 상상치 못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정확히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는 모르겠거든.”
콱!
연호정이 단검의 손잡이를 밟았다.
“죽이진 않을 거다.”
차라리 죽인다는 말이 덜 무섭게 들릴 것 같았다.
“내게 뭘 말해야 할지는 알아서 생각해 보도록 해. 일단 다리 하나부터 시작하지.”
연호정이 등화사태의 무릎을 교룡쇄로 갈겼다.
캉!
반 시진 후.
“들어오게.”
황석태가 문을 열었다.
순간 강렬한 피 냄새와 땀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황석태와 강량이 서둘러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패율과 송하신니는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봐서 좋을 게 없는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패율과 송하신니가 안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자, 단검.”
연호정이 강량에게 깨끗하게 닦은 단검을 건넸다.
강량이 떨떠름한 얼굴로 단검을 받았다. 깨지거나 흠집은 나지 않았지만, 등화사태의 몰골을 보니 받기가 참 뭐하다.
황석태가 등화사태를 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그냥 죽이지 그랬나?”
“안 죽이기로 약속했네. 적어도 오늘은.”
“죽는 게 나아 보이는데.”
등화사태의 두 다리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제때 지혈을 했는데도 이 정도 출혈량이 나온 것이다.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도 미치거나 충격으로 죽지 않은 게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등화사태는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었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네만.”
“내공 방벽으로 소리를 차단했어. 혹시 모르잖나.”
“철두철미하군.”
“됐고, 이 쳐 죽일 년부터 꽁꽁 싸매도록 하자고.”
이전과 같이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강량은 느꼈다. 연호정의 기분이 최악이라는 걸.
등화사태를 심문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필시 그녀의 입에서 나온 정보가, 연호정을 극도로 분노케 했을 것이다.
‘너무 분노해서 오히려 차분해진 것 같은데.’
강량이 서늘한 눈으로 등화사태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지?’
언뜻 보아도 삼교 때문은 아니다. 삼교와 연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일에 관련된 모두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궁금했다. 등화사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가.
잠시 후, 커다란 천으로 등화사태를 완전히 묶어 버린 연호정이 그녀를 들쳐 멨다.
“패율 선배한테 말해. 슬슬 뜨자고.”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뜨자니?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인적이 드문 곳. 하지만 찾아오기 어렵지 않은 곳.”
“……음?!”
“뒷골목에서 제대로 한판 붙었거든. 지금쯤 몇 놈이 깼을 거다. 당연히 나와 이 망할 것을 잡으러 오겠지.”
황석태가 입을 쩍 벌렸다.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미리 말 좀 해 주시지.”
“미리 말한다고 달라질 것 없잖아. 선수들끼리 왜 이러나.”
“그냥 그렇다고요. 한데 왜 놔뒀습니까? 좀 조심스럽게 접근할 생각이라면 아예 실종 처리를 해 버리는 게 낫지 않았어요?”
“등화를 앞세워서 그 ‘낙원소’라는 곳에 쳐들어가지 않은 건, 그곳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아하? 이번 유인책으로 놈들의 병력을 보려는 것이로군요?”
“동시에, 병력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지.”
“그렇겠지요. 우리 중 누구도 죽지 않는다면요.”
“죽으면 쓰나.”
“실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계속 우는소리 할 거냐?”
“싸늘한 양반 같으니. 준비 끝났습니다, 저는.”
“좋아.”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밤이 제법 길겠다. 나가자.”
* * *
“헉헉!”
“억! 장로님!”
피를 줄줄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청성의 장로, 풍곡진인을 본 무사들은 기겁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어서, 어서 삼현대(三賢隊)를 소집해라!”
“예?!”
“시키는 대로 빨리 움직이지 못해!”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일시 폐점해! 물건들을 전부 옮기라고 말해 둬라!”
무사장의 눈이 깊어졌다.
“장로님.”
“빨리 움직이지 못하겠느냐!!”
“삼현대는 즉시 소집이 가능하지만, 이곳 낙원삼점을 폐점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에는 ‘그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다! 등화가 놈들에게 잡혀갔으니, 이곳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야!”
“……등화라면, 부점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때, 풍곡진인이 손으로 무사장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언제부터 너희 말단 놈들이 우리 말에 토를 달 수 있었지?”
“크르륵!”
“지금 당장 폐점해라! 그리고 일대에 흑안을 깔아 둬! 반드시 놈들을 잡아야 한다!”
낙원소 설립 이후, 처음으로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린 그들.
사천의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시각, 당관과 당양선 부자가 사천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