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붕괴의 조짐 (7)
“여기구만.”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강량을 보는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여긴 어인 일로?”
“형님한테 전음을 받았습니다. 이 인근으로 오면 황 단주와 손님이 계실 거라고.”
“음.”
거리 청소가 끝났다는 뜻이리라.
이 짧은 시간, 어떻게 그 모든 암살자를 처치했는지 모르겠다. 역시나 대단한 남자다.
“꽤 멀리서 날아온 전음이었어요. 목소리가 중간에서 잠깐씩 끊겼거든요.”
“그랬겠지.”
강량이 송하신니를 바라보았다.
운공을 멈춘 그녀가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강량이 포권을 취했다.
“강량이라 합니다.”
“아, 저는 송하입니다.”
몸이 좋지 않은데도 송하의 인사는 성의와 예의가 넘쳤다.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성품이 고우신 분이로군요.”
“아, 아닙니다.”
“일단 저희 숙소로 가시지요.”
황석태가 물었다.
“패율 그 사람은?”
“쉬고 있습니다. 둘 다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속 편한 양반이군.”
“대단한 분이죠. 본인이 끼어들어야 할 때와 빠져도 될 때를 잘 아시는 분이거든요.”
그때, 송하신니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패율? 패율이라면 설마, 점창의 장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량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패율 선배를 아십니까?”
“물론이지요. 예전에 점창에 들렀을 적, 서로의 무(武)를 견준 적이 있습니다. 굉장히 실전적인 무공을 구사하던 사람이었어요.”
구파일방으로 엮이긴 하지만, 각 문파의 소재지는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각파의 고수들도 워낙 많고 땅덩어리도 워낙에 넓어서, 타 문파의 고수와 친분을 나누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 송하신니의 경우, 패율을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선배도 점창의 장로니까.’
최연소라도 장로는 장로다.
“일단 가시지요. 굳이 찬바람 맞아 가면서 운공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 한데…….”
송하신니는 당황했다.
“연 소협을 기다리지 않고 가도 되겠습니까?”
“본인이 직접 모셔 오라 했는데요, 뭘. 그리고…….”
강량이 피식 웃었다.
“무림에서 가장 불필요한 걱정이 벽산호장 걱정입니다. 제발 죽어 달라고 기도를 올려도 안 죽을 양반이거든요.”
* * *
퍼어어엉!
짓누르듯 묵직하게 내지른 장타(掌打)에 불그스름한 검기(劍氣)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파앙!
장타와는 반대로 짧게 후려치는 단타각에 비수가 튕겨 날아갔다.
위협적인 칼날 병기로 휘몰아쳐 온 공격 두 개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너져 내렸다. 복잡한 초식이나 기가 막힌 방어, 회피기 따위 없이도 순식간에 공격을 차단하는 능력이 일품이었다.
후우우웅!
기쾌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장력과 권풍은 연호정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흘러 나갔다.
회전하며 내지른 장타와 각법으로 네 방위에서 몰아친 공격을 모조리 파훼해 버렸다. 순간의 판단력이 극치에 달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요술 같은 몸놀림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내달린 연호정의 몸이 어느새 한 중년인의 코앞에 도달했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중년 사내, 당각의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눈으로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언제 이 앞에 도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호정의 무릎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퍼어억!
비명도 없었다. 당각이 피를 토하며 담벼락을 부수고 날아갔다. 타격이 들어간 순간 이미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독과 암기는 귀찮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가장 까다로운 적부터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말은 쉽지만, 그 찰나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판단을 내렸다 해도 환경과 고수들의 움직임에 따라 실제로 기습까지 성공시키기는 지극히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현할 줄 알아야 진짜 고수인 법이다.
연호정은 고수였다. 그의 무공, 그의 전투술, 그의 실전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그 모든 요소가 하나로 똘똘 뭉쳐 최적의 효율을 내고 있었다.
“이런!”
“머리통을 날려 버려!”
꽤나 끔찍한 대사가 아닌가.
산중에서 수양을 쌓는 도사나 비구니가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대꾸도 없이 몸을 날렸다.
콰앙!
강력한 권법이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허공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권법.
소림사의 백보신권(百步神拳)과 유사하면서도 더 조용하고, 더 날카롭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가 조용히 접근해서 단숨에 송곳니를 박아 넣는 듯하다.
아미파가 자랑하는 금강복호권(金剛伏虎拳)을 격공장(隔空掌)의 수법으로 내지른 것이다. 아미파의 절정권법이 고급의 무리(武理)에 실리니, 그야말로 천하 일절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 어디?!”
강력하고 시기적절한 권풍이었으나, 정작 연호정은 그 자리에 없었다.
파바바바박!
담벼락을 타고 귀신처럼 이동한 연호정은 어느새 청성의 두 검사 중 하나의 뒤에 서 있었다.
대단한 신법이나 보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사각을 점령당했다.
어두운 밤, 좁은 뒷골목, 사람의 시야를 교란하는 움직임, 거기에 기척을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내공 운용까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연호정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그들 모두 고수였지만, 이런 환경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연호정의 주먹이 청성 검사의 옆구리에 박혔다.
퍼억!
“커억!”
검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단 한 방에 전투 불능이 된 것이다.
연호정의 완력은 무림맹 최고수들도 인정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거기에 침투경에 효율적인 현무기를 반탄지기(反彈之氣)의 형태로 바꿔 박아 넣었으니, 오장육부가 통째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놈이!”
쉬이이익!
붉은 광영(光影)을 흩뿌리는 한 자루 서늘한 검격.
빠르고 강하다. 검법 특유의 예리함보다 강력한 내공과 완력으로 상대를 파괴하는 검공이었다.
청성의 대표절기, 청운적하(靑雲赤霞) 중 적하의 검이었다.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입문조차 어렵다는 청성파 최고의 검법 중 하나가 음습한 뒷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연호정의 수도(手刀)에 백호기가 어렸다.
쩌어어어엉!
백호공, 호왕구벽세가 맨손 수도로 재현되었다. 백호도법(白虎刀法)이었다.
“이!”
청성의 노도사가 이를 갈았다.
적하검의 파괴력은 강호 일절이다. 검법의 파괴력만 보자면 사천제일을 논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상대의 공격에 튕겨 나간 것이다. 그것도 맨손에!
뚝. 뚝.
연호정의 손날을 따라 핏방울이 떨어졌다.
연가신단의 힘을 받은 사신기의 출력은 불세출의 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맨손의 한계는 명확했다. 연호정의 주무공이 육장(肉掌)은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적하검의 파괴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군.”
연호정의 담담한 말에 노도사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어린놈이 어디서 허세를!”
그때였다.
풀썩!
청성의 노도사나 아미 장로로서는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는 순간이었다.
금강복호권을 구사했던 아미의 고수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권풍을 피하고 담벼락을 타고 와 청성의 검사 하나를 쓰러트리기 전, 청룡공의 용군삼형을 암경(暗勁)으로 풀어 그녀의 심맥을 공격한 것이다.
그 암경 출수의 내공 운용이 워낙에 복잡해서, 청성인 하나를 쓰러트리는 데에 가용 가능한 내공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래서 백호도법의 위력이 본래와 같지 않았던 것이다.
“적하검을 이런 곳에서 보고 싶지는 않았다.”
소맷자락으로 손날의 상처를 찍어 낸 연호정이 소매를 걷었다. 어느새 베인 상처에선 피가 나지 않았다. 벌써 지혈이 된 것이다.
“고즈넉한 청성의 산봉우리에서 일 합, 일 합 제대로 받아 보고 싶었더랬지. 역시 흘러가는 세상사가 사람 마음 같지는 않구만.”
구대문파의 절기는 하나같이 위대했다. 다만, 그중 연호정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청운적하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청성파 장문인, 풍벽자를 처리했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남았더랬다.
충격으로 얼이 빠졌던 노도사가 이내 노성을 질렀다.
“이 비겁한 놈이 어디서 청성의 절기를 입에 담……!”
콰아앙!
폭음과 함께 노도사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그 속도가 실로 빨랐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아미 장로는 기겁하며 노도사를 피해 냈다. 받아 줄 만도 한데, 이미 그럴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닌 듯했다.
연호정이 발을 내렸다.
“어디서 비겁을 입에 담아.”
파아앙!
바람처럼 흘러가는 신법으로 거리를 좁히니, 노도사가 또다시 피를 토하며 적하검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양손이 녹청빛 광채를 뿜었다. 청룡기의 그것과는 달리 더 무거우면서도 청아한 빛을 내는 무공이었다.
연가의 절정무공, 반룡장이었다.
피슉! 퍼어어엉!
적하검의 검기가 연호정의 어깨를 스쳤고, 반룡장의 경력이 노도사의 가슴팍에서 폭발했다.
적하검의 검력까지 회수하여 담아 터트린 장공이었다. 노도사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죽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아도 기식이 엄엄해 보였다.
“자, 그럼.”
한 차례 어깨를 푼 연호정이 자신을 이곳까지 이끈 아미의 장로, 등화사태(燈花師太)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 하나 남았다.”
등화사태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이럴 수가.’
연호정이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이들을 몽땅 물리칠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 모두가 문파의 장로급 고수였다. 그 전력을 보면 소림의 방장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이 정도로는 연호정은 물론 소림 방장 공공대사도 물리치지 못한다. 지닌 무공들은 하나같이 위협적이지만, 그 무공을 제대로 풀어 쓰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천하의 보검을 쥐었다고 뛰어난 검객이 될 수는 없는 법. 하물며 이들 모두가 무공 수련은 물론 수양에서도 손을 뗀 지 오래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필연적이었다.
“실망이다.”
연호정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상대를 흔들기 위한 말이나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실망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무너졌을 줄은 몰랐어. 그래도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들일 텐데, 실력들이 너무 허술하지 않은가.”
“…….”
“실전 감각을 논할 게 아니야. 애초에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의 단련을 게을리했어. 사흘만 쉬어도 퇴보하는 것이 무공이라 하였거늘, 꼴을 보니 아주 오랜 시간 무공을 놓았구나.”
지금껏 하루하루를 제대로 연마했다면, 연호정이라도 이리 쉽게 상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고수들 앞에서라면, 실전 감각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힘의 총량을 뒤집는 결정적인 한 수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데 그게 통했다는 건, 이들이 본 실력의 절반도 꺼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네년은 달라.”
실망으로 가득했던 연호정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일었다.
순간 등화사태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싸움에 미친 투마(鬪魔)의 그것이었다.
“수련 하나는 제대로 했어. 겁이 지나치게 많은 게 흠이지만, 도망치지 않은 걸 보면 감이 죽지는 않은 것 같아.”
도망쳤다면, 그 즉시 연호정은 승부를 내려놓고 등화사태부터 쫓아가 죽였을 것이다. 등화사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한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사고 칠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고.”
우두둑.
연호정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꿇어라. 그럼 죽이진 않으마. 적어도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