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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56화 (555/963)

556화. 붕괴의 조짐 (6)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중년임은 분명한데, 어쩐지 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듯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오십 대에 가까운 듯싶다가도 지나치듯 보면 삼십 대로 보이기도 하는, 묘한 얼굴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아미로군.”

아미파, 그것도 송하신니보다 한 수 위의 고수였다.

한 수 위라지만, 전투력을 생각하면 송하신니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고수일 것이다. 아미파 특유의 깊은 기세 속, 날카롭게 곤두선 기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불제자라기보다는 강호인의 기세였다. 그것도 숱한 사람을 죽여 본, 거의 살인마에 가까운 기도라 할 수 있었다.

여인이 물었다.

“송하는 어디에 있느냐?”

“알 바 아니다, 땡중.”

“뭣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미의 어른씩이나 돼서 비단옷을 입고 분까지 발랐군. 어깨까지 늘어트린 그 머리카락은 또 뭐냐?”

“…….”

“네게서는 고즈넉한 아미의 불향(佛香)을 찾을 수 없어. 천박한 분 냄새에 코가 다 마비될 지경이다.”

여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불쾌한 기색이면서도 상대를 가소롭게 보는 듯했다.

“싸가지가 없는 놈이로구나.”

거친 언사였다.

아미파 소속이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말투다. 게다가 그 말투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입에 어지간히 상소리를 달고 사는 듯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묘하군.’

앞에 저 비구니, 아니 비구니였던 여인의 기세는 상당히 놀라웠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해 본 사람이다. 말하자면 피 맛을 보는 데에 익숙한 듯했다.

한데 저만큼의 피비린내를 풍기면서도 상대방을 철저하게 경시하고 있다.

강호인이 저만큼의 피 냄새를 풍기려면 수십 번의 생사결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즉, 강호 경험이 풍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이는 절대로 상대를 경시하지 않는다. 입으로야 무슨 소리를 못 하겠느냐마는, 온갖 쌍소리를 해 대도 눈으로는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극도의 집중력을 끌어 올리기 마련이다.

여인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피 냄새는 진동하는데, 묘하게 어설펐다.

느껴지는 기세로 보아 전투력도 출중할 것이다. 그러나 짙디짙은 피 냄새에 비하면 그조차도 애매했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는 누구냐?”

“여기서 싸움이 나게 되면 말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너, 전직 비구니는 무조건 작살이 날 거다.”

“웃기는 놈이로고.”

“너를 작살내 놓은 나는 네 정체를 세상에 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미파의 명성이 곤두박질을 치게 되겠지.”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가만히 여인을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미파를 두고 한 협박이 안 통하는군. 아예 아미에 대한 애정이나 걱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어디서 주둥이를…….”

“아미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다……. 이미 마음이 떴구나, 너는.”

여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이 손목을 돌렸다. 천천히 돌리는데도 우둑, 우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낙원소(樂園所)의 아미파 앞잡이 중 하나는 네가 분명하겠지?”

순간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너, 낙원소를 어떻게 알지?”

역시.

이렇게 가볍고 손쉬운 함정에 덜컥 걸린다. 전투력은 높지만, 강호 경험은 또 아주 많지는 않은 듯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낙원소가 실존하는 곳이었군. 역시 정보가 사실이었어.”

그제야 여인은 자신이 연호정에게 휘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놈이…….”

“보는 눈이 많군.”

연호정이 턱으로 저 너머를 가리켰다. 암살자들이 판을 치고 있던 건물 방향이었다.

“자리를 옮길까?”

여인이 차갑게 웃었다.

“용기가 있느냐?”

“안내해라.”

“버릇없는 놈. 목숨 아까운 줄…….”

“안내하라고.”

“…….”

“여기서 작살나고 싶으냐?”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오늘부로 네 목숨은 끝이다.”

“너희는 그게 문제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죽이려 드는 것.”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파멸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된 녀석들은 언제나 파멸을 향해 달려가지.”

“너!”

그때, 연호정의 몸이 흐릿해졌다.

우두둑! 우두두두둑!

순식간에 좌우로 이동한 연호정이 다시 여인의 앞에 나타났다.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턱짓했다.

“안내해라. 알아서 잘 쫓아갈 테니까.”

“……너, 정체가 뭐냐?”

여인은 당황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도 그렇고 느껴지는 기세도 그렇고, 별 볼 일 없는 놈이 분명했다.

한데 방금 보여 준 몸놀림은 가히 극속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대단했다. 아미파의 최고 장로 중 하나인 그녀조차도 어떻게 움직였는지 파악이 안 될 정도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안내 안 하냐.”

“……!”

“이제부터 네년에게 같은 내용을 두 번 이상 말하지 않겠다. 한 번 말해서 알아듣지 못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지를 찢어 주마.”

순간 여인은 지독한 섬뜩함을 느꼈다.

살기를 드러내지도, 자신을 노려보지도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투로 담담하게 말하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연호정이 재차 말했다.

“안내해라.”

주춤거리던 여인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때, 그녀의 귀로 미세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둑!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놈의 손에 또 한 명의 흑안(黑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럴 수가……!’

흑안의 은신술은 초일류급이다. 목표물을 공격할 때도 일말의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진짜배기들인 것이다.

저놈은 그 암살자들의 위치를 속속들이 파악해 순식간에 죽여 버리고 돌아오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녀는 당황했다.

사천에 저런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요 이 년여 간 낙원소를 유독 많이 들락거리긴 했지만, 주변 정보에 분명 신경을 썼었다.

‘대체 저놈은 누구인가?!’

여인은 침을 삼켰다.

왠지, 등 뒤에서 시커먼 표범이 소리 없이 접근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는 어정쩡한 걸음으로 연호정을 안내했다.

협박이 통하지 않으면 고문이나 살인도 불사하려고 온 길인데, 정작 그녀 자신이 상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암살자들을 죽였던 삼 층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골목.

턱.

여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연호정 역시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묻겠다.”

여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분명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네 이름이…….”

“한 서너 명 불렀냐?”

“뭐?”

“어정쩡한 놈들 몇 불렀다고 기세등등한 꼴을 보니 조금 웃겨서.”

“……!!”

연호정이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좋은 곳으로 데리고 왔군. 여기라면 싸움이 벌어져도 거리까지 소리가 새어 나가진 않겠어.”

여인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두 눈은 차가운 살기로 번들거렸다.

“너, 누구냐.”

“너야말로 누구냐.”

“…….”

“상대 이름을 알고 싶다면, 본인의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우선이지.”

“미친놈! 너 따위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다!”

“왜? 겁나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나 하나 못 잡을까 겁이 나서 이름도 알려 주지 못하는 거냐?”

“…….”

“그런 새가슴으로 찔릴 만한 일은 왜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구나. 비구니면 비구니답게 얌전히 불공이나 드리면서 살 것이지.”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대단한 입심이었다. 도발이라는 걸 알면서도 열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봐준 줄도 모르고 감히!”

“그럼 덤벼 봐.”

연호정의 얼굴이 한순간 무표정하게 변했다.

번개와도 같은 변화, 두 눈에서는 어느새 푸른 섬광이 명멸을 반복했다. 한순간에 사람이 바뀐 듯했다.

“덤벼서 날 제압하든 죽이든 해 봐. 혓바닥만 나불대지 말고.”

여인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차피 죽을 놈,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겠지.”

“내 앞에 선 놈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하더군.”

“건방진!”

그때였다.

화르르르륵!

연호정의 몸에서 시뻘건 화기가 일렁거렸다.

가만히 있다가 일순간 뿜어지는 화력이 실로 엄청났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삼 장 밖에 서 있던 여인조차 화들짝 놀라 열 걸음을 더 물러설 정도였다.

“흐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독인가.”

여인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럴 수가!’

화아아아아악!

뿜어져 나오는 홍염의 광기에 대기조차 숨을 죽이는 듯했다.

화력도 엄청났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대단한 화기마저 평범하게 보일 정도의 기세였다.

마치 중력(重力)이 서너 배로 껑충 뛴 것만 같았다. 몸이 무거워지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세가……!’

무종지벽을 돌파한 이후로도 오랜 시간 아미의 무공을 연성했다.

그녀의 무공은 아미파에서도 전대와 장문인인 복호사태를 제외하고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했다.

그런 고수가 상대의 기세만으로 육신의 제어가 버거워진 것이다. 그녀는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여인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성천?!”

화르르륵!

연호정이 죽립을 벗었다.

저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강한 화력이라면 육신은 멀쩡해도 의복은 어느 정도 상해야 했다. 진기 제어가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분명한 한계가 있으니까.

한데 연호정의 옷은 멀쩡하기만 했다. 심지어 진기 출력의 핵심지인 장심(掌心)과 가까운 죽립마저도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엄청난 내공 조예!’

진기를 제어하는 능력이 그야말로 극치에 달한 고수였다.

“부끄러움이 과하시군.”

화르르르르르륵!

활화산처럼 뿜어지던 화기가 어느 순간 연호정의 왼손에 응축되었다.

번쩍!

손바닥 위에 둥실 떠 있는 작은 구체는 직시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손을 휘둘렀다.

퍽!

빛살처럼 쏘아진 화염의 구체가 깔끔한 소리를 내며 벽 하나를 관통했다.

“컥!”

벽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비명이 터졌다.

“크아악!”

콰앙!

비명과 함께 벽을 부수고 나온 사람은 온몸이 불덩이에 휩싸여 있었다.

이미 의복은 온통 불에 타서 재가 되었다. 어떻게든 내공을 끌어 올려 불길을 잡으려 했지만, 그 정도의 내력으로는 주작화기를 꺼트릴 수 없었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당가 쪽 사람인 것 같은데, 굳이 이름을 알고 싶진 않다. 그대로 죽어라.”

화르르르륵! 털썩!

고통에 몸부림치던 사내가 결국 버티다 못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화염은 꺼지지 않았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사내의 몸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죽은 것이다. 산 채로 불타 목숨이 날아갔다.

여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피를 많이 보긴 했지만, 이렇게 끔찍하게 죽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기억하고 있나? 두 번 이상 묻지 않겠다는 거.”

후우우우웅.

연호정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네 이름이 뭐냐?”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질린 얼굴로 연호정을 바라볼 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다리부터 뽑아 놓겠다.”

파아아아앙!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콰앙!

동시에 네 명의 고수가 벽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검(劍), 장(掌), 비(匕), 권(拳).

청성과 당가, 아미의 무공이 소용돌이치며 연호정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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