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55화 (554/963)

555화. 붕괴의 조짐 (5)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송하신니가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반면 황석태는 경악한 얼굴로 송하신니를 보았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게…….”

황석태조차 말을 더듬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송하신니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요.”

“…….”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저는, 그냥 믿고 싶지 않아서 눈을 돌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랍게도 황석태는 송하신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백도와 흑도를 벗어난 문제였다. 세상 누구라도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불신부터 하고 볼 것이다.

입술을 깨물던 송하신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려선 안 됩니다! 이미 사천의 여러 명숙들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어요! 저는 세상을 모르지만, 그들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상상도……!”

“괜찮소.”

연호정이 손을 들어 송하신니의 말을 막았다.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비밀을 은인인 내게 말해 주었소. 그리고 난 당신 말의 무거움을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니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문제는.”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각 좌장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소?”

송하신니가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이 일이 언제부터 벌어진 건지도 모르는 판국이에요. 당연히 좌장들은 모를 거라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강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해도, 송하신니는 최소한의 신중함을 갖춘 사람이었다. 마음은 찢어질 듯했으나, 관계 때문에 의심을 버리지는 않은 것이다.

연호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사천의 대문파들, 즉 당가와 청성, 아미의 일부가 살벌한 늪에 발을 디뎠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태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들의 좌장들이 이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일단 당가주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당관과 친분이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사천당가는 여타 문파들과 차원이 다른 냉혹함을 자랑한다. 연가 역시 가법에 엄격한 편이지만, 당가는 엄격함을 넘어 때로는 잔혹한 모습도 보여 주는 가문이었다.

즉, 당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 냉혹함과 잔혹함을 견뎌 낼 정도의 철심(鐵心)은 물론 절대적인 권력이 필요하다.

오죽하면 당관이 스스로를 사천의 제왕이라 칭했을까. 비슷한 전력의 청성과 아미가 있음에도 제왕이라 자칭한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관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가문을 완전히 재정비하기 전까지는 외부로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역시 송하신니가 언급한 ‘늪’에 홀린 사람이었다면 무림맹도 진즉 사달이 났을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아마파의 수장인 복호사태 역시 이 사실을 모를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청성은?

‘풍벽자.’

풍벽자는 삼교에서 파견한 세작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풍벽자는 죽었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놈 역시 예전부터 얽혀 있었을 것이다.’

풍벽자를 떠올리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든 아직은 전부 가정에 불과한 것. 제대로 알아보기 전까지 확신은 금물이겠지.”

“예?”

“아니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맡겨 주시오.”

송하신니가 놀라서 말했다.

“비, 비밀을 지켜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비밀 누설은 걱정하지 마시오. 적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테니까.”

“……?!”

“단순히 숨기고 싶은 일이라면 모를까, 해결하고 싶은 일이라면 방법을 찾아야지.”

“맞는 말씀입니다만…….”

송하신니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해야 할지…… 게다가 제 주변에는 모두…….”

“이 일은 당신만의 일이 아니오. 우리 모두의 일이오.”

“……!”

“걱정하지 말고 날 믿으시오. 어차피 사천에 드리운 구름을 벗겨 내려 온 길이니까.”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말했다.

“잠시만 호법을 서 주게.”

“그곳으로 갈 생각인가?”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과격함보다는 신중함을 앞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철창을 건넸다.

“거리부터 정리하고 오겠네. 얼추 정리가 끝나면 신니를 내 방으로 모셔 줘.”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고 다녀오게.”

“알겠네.”

송하신니가 다급히 물었다.

“거리를 정리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신의 뒤를 쫓으며 깨달았소. 몇몇 사람이 당신을 주시하고 있더군. 물론 찰나에 불과했지만, 대충 세어 본 숫자만 예닐곱은 되었소.”

“……?!”

“겉옷을 벗으시오.”

“예?”

“겉옷과 죽립을 주란 말이오.”

송하신니는 홀린 듯 겉옷과 죽립을 벗어 연호정에게 건넸다.

연호정은 송하신니의 겉옷을 걸치고 죽립을 썼다.

신장과 골격 차이는 있지만, 애초에 연호정 역시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다. 근육이 극한까지 압축된 몸을 지니고는 있었으나, 골격 자체는 호리호리한 편에 속했다.

연호정이 도끼를 꺼내 머리카락을 잘랐다.

사각!

후두둑 하고 떨어지는 머리카락. 등허리까지 내려오던 그의 머리가 어느새 짧게 변했다.

송하신니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머, 머리카락은 왜……?”

연호정은 말없이 죽립을 썼다. 원체 크고 두툼해서 짧은 머리를 전부 가려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흑룡부와 백룡부까지 황석태에게 맡겼다.

“다녀오겠소.”

스르륵.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이게……?”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송하신니는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황석태가 말했다.

“저 인간은 걱정하지 말고 운공으로 내상이나 바로잡으시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합니다.”

“이 일이 제아무리 위험하다 한들 묵룡부에 세작으로 들어가는 일만큼 위험하겠소?”

“…….”

“저 인간은 그걸 해낸 사람이오. 특히나 이런 암투(暗鬪)에는 도가 텄으니,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소.”

송하신니의 입이 떡 벌어졌다.

황석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도끼까지 맡기고 가다니, 대단한 자신감이야.”

* * *

거리는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자정이 되려면 멀었지만, 설령 자정이 지나도 이 활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좌우로 줄 지어선 주루와 객잔들. 골목 너머에는 홍등가도 있었고, 간편한 간식을 파는 가게는 물론 포목점에 가죽신을 파는 곳도 많았다.

활기찬 거리였다.

‘정말이지…….’

죽립을 눌러 쓴 채 거리를 걷는 연호정의 심정은 몹시도 복잡했다.

‘상상을 초월하는군. 송하신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전쟁을 완벽한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연호정은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처럼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전쟁에도 선이라는 게 있다고.

헛소리다.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최소한을 말한다.

하지만 전쟁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떨어지면 그 누구도 최소한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들이 부르짖던 최소한이라는 말은 곧장 ‘어떻게든’이라는 단어로 바뀌게 된다.

삶을 위해서, 터전을 위해서.

나아가 미래를 위해서.

이유는 제각각이다. 중요한 것은, 제각각의 이유에 강한 욕망이 담길수록 인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삼교도 그러했고, 무림맹도 그러했으며, 흑제성 역시 그러했다. 적을 가차 없이 대하는 데에는 흑백의 구분도, 정사의 구분도 없었다.

다만.

‘이런 짓까지 저지를 줄은 몰랐다.’

연호정의 눈가가 살짝 떨려 왔다.

그는 삼교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공격을 당하기 전에 공격해서 죽을 침략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수년간 놈들의 지독함에 시달려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삼교 소속원을 죽일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 생에서 놈들은 이렇게까지 끈적하고 악랄한 짓을 저지르진 않았다. 적어도 연호정이 아는 한에서는 그러했다.

‘어떤 의미로, 정말 효과적인 방법이랄 수 있겠군.’

전시 작전은 도덕성이 결여될수록 끔찍하고 효과적인 결과를 낸다.

지금 삼교 놈들은, 이전보다 더 깊고 더 악랄하며 더 치명적인 간계로 사천을 공략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역으로 공략당했군.’

연호정은 놈들이 어찌 이런 술수를 쓸 수 있었는지, 이 술수가 어찌 이리 빨리 강대문파의 수뇌부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삼교라는 존재를 최대한 숨기려 했다.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었어. 놈들에 대해 세상에 알릴 때는, 무림 대다수가 하나가 될 준비를 마쳤을 때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지만, 모두의 마음이 일치되어도 적을 막기는 어려운 실정이 아니던가.

한데, 놈들은 이 틈을 쑤시고 들어왔다.

‘강대문파의 수뇌부들을 타락시킨다…… 대단해. 만약 중원 모두가 삼교의 존재를 알았다면, 놈들은 절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테니까. 승리 후의 점령에서 큰 문제가 일어날 방법이다.’

그때였다.

한 줄기 음험한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스르륵.

인파에 파묻혔던 연호정이 어느새 가죽신을 파는 장사치의 등 뒤로 이동했다.

우두둑!

단숨에 그의 목을 꺾어 버린 연호정은 그의 시체를 탁자 밑으로 구겨 넣었다.

거리는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누구도 장사치가 죽은 것을 깨닫지 못했다.

연호정은 손을 털었다.

내공을 익힌 놈이었다. 그것도 암살공을.

그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에 섞여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삼교라는 존재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가 예전보다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놈들은 틈을 파고들 수 있었던 거야.’

연호정이 탄식했다.

스르륵.

또다시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든 그가, 어느 높은 주루 건물의 지붕 위에서 나타났다.

지붕 위에는 한 복면인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걸 보니, 송하신니의 복장을 한 연호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호정의 손이 복면인의 목덜미를 잡았다.

콰드득!

복면인이 혀를 빼물고 쓰러졌다.

훅!

단숨에 거리로 내려온 연호정이 재차 인파 속에 파묻혔다.

‘나중에 가서 삼교 놈들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공표해 봤자 진실성의 깊이가 달라진다. 선동된다면 될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큰 그림을 봤을 때는 또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때가 되면 모두가 창칼을 뽑아 들고 싸울 테니까.’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가 막히는군. 누구 머리에서 나온 작전인지 몰라도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스륵.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당가주.’

당관이 떠올랐다.

과거 흑암제 시절, 자신의 가슴에 암기를 박아 넣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너무나도 사람다운 사람으로 바뀐 사천의 거인이.

‘부디 무너지지 않기를.’

그때였다.

“송하가 아니구나.”

연호정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어느 길목, 한 중년 여인이 연호정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놈은 누구냐?”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골 빈 장작꾼이다, 이 개 같은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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