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붕괴의 조짐 (3)
움찔!
송하신니(松河神尼)는 잠시 멈춰 섰다.
매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거리엔 여전히 오가는 인파만 북적일 뿐이었다.
내공을 연성한 사람도 간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중 신경을 써야 할 정도로 놀라운 고수는 없었다.
‘착각인가?’
얼핏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이 느껴진 것 같았다.
너무 순간적이라 긴가민가 싶었지만, 정말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다.
‘내가 너무 긴장한 모양이구나.’
하긴, 이 지역은 유동 인구가 많은 편임에도 유독 무림인들이 적은 구역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천성의 성도에서 어중간하게 떨어진 지역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은 대체로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물가도 비쌌고, 조금만 더 가면 성도인데 굳이 이곳에서 터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부들은 많지만, 무림인은 많지 않다.
정확히는, ‘신경’을 쓸 정도의 무림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후우.’
속으로 한숨을 쉰 송하신니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이 근처일까? 잘못된 정보는 아니겠지?’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잘못된 정보라도 간다.’
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아직 빛도 보지 못한 어린 제자 둘의 목숨이 날아갔다.
그야말로 피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이 은밀히 나섰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만으로도 아미의 어른으로서 실격이었다.
이 모든 일이 해결되면, 그때까지 자신이 죽지 않는다면.
그때, 죽은 제자들의 무덤 앞에서 백팔 일간 사죄 후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욱.
펑퍼짐한 장포 안, 요대에 매인 연검(軟劍)을 매만지는 그녀의 눈에 독한 기운이 어렸다.
‘이 일에 관련된 놈 중 하나라도 잡아야 한다.’
사실 혼자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미의 장로로서 부끄럽지 않은 무공의 소유자였지만, 평생을 산에서 무공과 예법, 불도에만 매진했기에 세상 경험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산(山)의 장로들이 이 일에 얼마나 얽혀 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불신하게 되니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몇몇 떠올랐지만, 그들에게도 좀처럼 다가갈 수 없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그들 역시 이 일에 관련되었을까 봐.
자신의 목숨이 날아가는 것은 아쉽지 않지만, 이 극악무도한 비밀을 세상에 까발리기 위해서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스르륵.
한 건물 뒤로 돌아간 송하신니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개방에 연락을 취해 볼까?’
십만개방(十萬丐幇)이라 불리는 그들은 명실공히 중원 제일의 정보 단체였다.
특히 당대 용두방주와 후개의 의협심은 정평이 나 있었다. 역대 개방 주인들 중 최고라 불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 정도 거인들이 버티고 선 단체라면 뿌리가 썩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너무 많다.
십만개방이라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무공을 연성하지 않은 개방도까지 합치면, 얼마나 많은 거지가 개방 소속인지 추산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고민하던 송하신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꾸 약해지는구나. 이러지 말자. 설령 용두방주와 후개가 연관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파리와 잔가지는 썩었을 수 있다. 지금의 나로서는 개방의 수뇌부들에게 접근할 방도가 없어.’
정확히는, 그들에게 연락을 취한다 해도 중간에서 끊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개방에도 악도들이 있다는 가정하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 존재를 확신한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송하신니는 지금 자신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무지(無知)라는 것이 이렇게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구나. 참으로 헛살았다.’
나직이 탄식하던 송하신니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내 흔적을 남겼으니, 내가 잘못된다면 나머지 일은 뒤에 맡길 수밖에.’
결심한 송하신니는 지도를 따라 골목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녀는 어느새 한 건물 앞에 도달했다.
건물은 화려하지도, 고풍스럽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허름하지도 않았다.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삼 층짜리 건물이었다. 다만 좌우 폭이 굉장히 넓었는데, 밤이라 그런지 곳곳에 화등을 켜 두었음에도 실제보다 작아 보였다.
‘여기다.’
송하신니의 얼굴에 긴장과 분노가 떠올랐다.
‘바로 여기가……!’
부르르르.
소매 속에 감춰진 주먹이 무섭게 떨려 왔다.
우우웅.
자신도 모르게 진기가 튀려고 했다. 송하신니는 나직이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자.’
세상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은 강호 경험도 많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애초에 그녀는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세상에 뛰어들어 아미파의 명성을 드높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무도를 통해 불법에 접근하는 것이었고, 그로써 더 많은 지혜를 함양하길 원했다.
와중에 무도(武道)의 경지가 깊어지며 재미를 느꼈고 실제로 경지도 상승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녀는 실수를 많이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무수히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며, 지금도 실수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 못했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숨어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나보다도 강한 고수가 있을 수 있어.’
송하신니의 눈이 모종의 결심으로 굳어졌다.
‘들어가자.’
사박.
가볍게 땅을 박찬 송하신니의 신형이 어느새 건물 지붕 끝에 나타났다.
놀라운 경지에 이른 신법이었다. 아미의 기본 신법인 금정신법(金頂身法)이었지만, 그것도 고수가 사용하니 천하일절의 무공이 되었다.
스르륵.
지붕 바닥에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송하신니는 지붕 위에서 몸을 낮춘 채 기감을 예민하게 가다듬었다.
‘……?’
일순 송하신니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뭐지?’
왜 없지?
정보에 의하면 이 건물에 수많은 고수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정작 기감에 걸리는 고수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서너 명에 불과했고, 그조차도 절정고수 하나에 나머지는 피 냄새 물씬 풍기는 일류고수였다.
이 정도면 굳이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당당하게 정면 돌파를 했어도 무난하게 제압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아니, 잠깐.’
송하신니의 눈이 흔들렸다.
‘고수만 적은 게 아니야. 인기척 자체가 많지 않아.’
이상하다.
‘족히 수백 명의 기척이 느껴져야 한다. 정보가 사실이라면! 한데 왜 느껴지지 않는 거지?’
설마?
‘정보가 거짓이었다고?’
그때였다.
파바바바박!
섬뜩한 소리와 함께 송하신니가 앉았던 지붕 위로 일곱 자루의 비수가 꽂혔다.
낌새를 눈치챈 송하신니가 재빨리 몸을 날려 피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비수가 죄다 등판에 박힐 뻔했다. 그 정도로 촘촘하고 날카로운 암기술이었다.
“누구냐?!”
송하신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없어?’
분명 암기가 날아오는 그 순간의 살기를 포착했다.
살기를 포착했다면, 그 암기를 날린 자도 포착이 되어야 했다. 한데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지붕 위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이 서 있을 만한 곳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내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가?!’
송하신니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문 특유의 깊고 담백한 신공으로도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암습이라는 것 자체를 처음 겪어 보는 그녀였다.
경험이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아미파 장로 최고수 중 한 명임에도, 이 정도로 당황하면 자신이 감각 이상 상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계속 거기에 있으면 안 되었다. 감각으로 포착되지 않은 습격자가 있다면,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쉬쉬쉬쉭!
사방에서 비수들이 쏟아져 내렸다.
최소한의 살기를 담은 암기술이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낌새를 알아차린 순간 공격을 허용할 만큼 빠르고 날카로웠다.
송하신니의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했다.
후우우웅! 피슉! 피슉!
회전하는 몸놀림에 아미파 신공의 기운이 담긴다. 공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놀라운 초식에 비수 대다수가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하지만 모든 비수가 빗나가지는 않았다. 그중 세 자루가 그녀의 팔과 다리에 생채기를 낸 것이다.
“후욱!”
숨을 몰아쉰 송하신니가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똑같았다. 여전히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살자? 살수!’
송하신니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살수란 이렇게도 무서운 존재였던가.’
정보가 사실인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강호 경험이 없다고는 해도 무종지벽을 돌파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의 감각에 걸리지 않을 정도면, 초일류의 은신술을 익혔다고 봐야 했다.
‘이런…….’
암살자, 살수라는 족속들에 대해서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어 보았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저 못된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맞닥뜨리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막막하구나.’
무섭지는 않았다. 아마파의 광명정대한 신공은 당황의 늪에서 그녀를 건져 주진 못했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에선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문제는 해결 방법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뭔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파바바바박!
또다시 날아드는 암기들.
송하신니의 얼굴이 급박함으로 물들었다. 방금까지는 비수였는데,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독침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피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 것이다. 비수만이라면 모를까, 독침에 잘못 맞으면 무공도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 것이다.
‘안 되겠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그때였다.
“컥!”
송하신니는 저도 모르게 밭은기침을 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피부가 어느새 차갑게 느껴졌다.
송하신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독?!’
우우우우웅!
아미연화심공(峨嵋蓮花心功)의 진기를 도인하여 독기를 뽑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다. 끈적거리는 독기가 마치 먹물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데, 그 속도가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이, 이런!’
번쩍!
연화심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비수에 베인 상처에서 허연 연기가 치솟았다.
그제야 송하신니는 깨달았다. 이 독이 비수 날에 베인 상처를 통해서 들어왔다는 것을.
‘비수……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니!’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강호에는 비수에 독을 묻혀서 던지는 졸자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막상 당하니 독이 이렇게나 무서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통 독이 아니었다. 독에 해박한 지식은 없지만, 연화심공의 진기에도 끈덕지게 체내로 파고들고 있다면 거의 극독으로 분류해도 손색이 없는 마물일 것이다.
툭! 투둑!
코에서 쏟아진 피가 지붕을 적셨다.
송하신니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이리 허무하게…… 허무하게 죽는 것인가?’
그때였다.
부아아아아앙!
어두운 밤하늘을 찢는 돌풍 소리.
퍼버버버버벅!
동시에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내 나름대로 정말 많은 사람을 봤지만…….”
송하신니가 지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기다란 창을 어깨에 걸치고, 다른 한쪽 손에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손도끼를 든 괴인이 있었다.
“이렇게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구만. 너무 황당해서 개입하는 게 늦어 버렸을 정도야.”
“누, 누구……?”
괴인,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댁 정체가 더 궁금해. 뭐가 이렇게 어설퍼? 아미파 무공을 몰래 훔쳐 배우기라도 했소? 흉내는 그럴듯하게 내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