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49화 (548/963)

549화. 서쪽으로 부는 바람 (3)

서신을 읽는 연위의 얼굴은 유독 진지했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연 대수의 고민이 많을 법도 합니다.”

“…….”

“당가주에게는 따로 연락을 취해 두었다고 합니다. 아마 당가주는 오늘내일 중으로 사천에 갈 듯합니다.”

“그렇구려.”

서신에서 눈을 뗀 연위가 턱을 쓰다듬었다.

“혹, 광동에서는 따로 연락이 온 게 없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봉공분들께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광동의 정세가 안정을 되찾아서, 조만간 의정군도 돌아온다고 하더군요.”

제갈문호가 의아한 듯 물었다.

“한데 의정군은 어찌?”

“아니오. 문득 생각이 났을 뿐이외다.”

제갈문호는 알고 있었다. 연위가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음을.

하지만 제갈문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연위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고 바로바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충분히 정리가 되면, 그때 말해 주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병신군 막원이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는 것이지요.”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연 대수가 또 큰일을 했습니다.”

연위가 쓰게 웃었다.

“제 할 몫을 잘하고 있는 듯하여 안심이 되오. 다만…….”

연위는 말끝을 흐렸다.

제갈문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식 가진 부모라면 다 같은 심정이리라.

“일단 회의를 열어 정보를 공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십시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아.’

연호정이 묵룡부로 파견을 가서 인정받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꾸만 위험한 일에 투입되고 있었다. 아들의 능력을 믿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풀릴 일이든 풀리지 않을 일이든,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것임을.

그러나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아마 연호정이 자신의 나이가 되어도 똑같이 걱정할 것이다.

‘무사해야 한다.’

연위의 한숨이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

서신을 읽는 당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당상아가 물었다.

“누구에게서 온 서신이에요? 보아하니 가문에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당관이 서신을 접으며 대답했다.

“싸가지다.”

“연 대수님이요?”

당상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 대수님이 또 무슨 일로…….”

“그냥 개인적인 문제다.”

당관이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당양선이 담담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일순 당관의 눈이 서늘한 빛을 뿜다가 잠잠해졌다.

“양선.”

“예, 아버지.”

예전보다 훨씬 더 의젓해진 목소리였다.

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실력이 늘었구나. 예전의 그 어정쩡함은 어디로 갔는지, 기세가 아주 탄탄해졌어.”

당양선의 얼굴에 뿌듯함이 어렸다.

그는 아버지 당관의 입에서 이 정도 칭찬이 나오기가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건, 정말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네 조부님은 잘 계시더냐?”

“아버지께서 무림맹으로 오신 후, 딱 두 번 뵈었습니다.”

“두 번.”

“예. 최근에 뵌 것이 석 달 전이었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그래…….”

당양선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따로 연락을 드린 적은 없으십니까?”

“없다.”

딱 자르는 듯한 대답이었다.

칼날 같은 대답이 얼마나 단호했는지, 당양선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당상아가 말했다.

“그래도 한번 연락을 드려 보는 게 어떠세요?”

당양선은 다소 경직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분위기가 또 살벌해지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관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굳이 연락을 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어차피 무림맹이 반쯤 봉문 상태인데, 이럴 때 한번 가문에 돌아가서 집안 살림을 돌아보면 되지 않겠느냐. 겸사겸사 네 조부님도 뵈면 될 것이다.”

당상아와 당양선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본가로 돌아가시게요?”

당관이 당상아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맹이 반 봉문 상태라도 본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는 안 될 일이지. 잠시 다녀올 테니, 맹에는 네가 남거라.”

“제, 제가요?”

“너는 아직 부족하다.”

당관이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모두가 어설프고, 뭣도 모르는 혈기로 세상과 부딪치며 성장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네 조부도 그랬다.”

“…….”

“아직 부족하다고는 하나, 너의 무공은 내가 안심해도 될 경지에 올랐다. 중요한 것은 안목인데, 무공과는 달리 안목은 철저한 경험 위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당관이 창가를 힐끔거렸다.

“연가주에게 따로 말을 해 둘 터이니, 그의 밑에서 많이 배우거라.”

당상아는 당황했다.

“제,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보고 배운다고 생각해라. 강호는 거칠어. 무공만 강하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 기회에 충분히 성장하도록 해라.”

당상아는 아버지의 진심을 느꼈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당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선.”

“예, 아버지.”

당양선은 내심 무척 놀라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누이를 얼마나 배척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어떤가? 자신을 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부드러운 관계가 아닌가.

너무 놀라서 질투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당양선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만, 너는 나와 다시 사천으로 가야겠다.”

당양선이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을 둘러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

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중으로 출발할 것이다. 푹 쉬어 두거라.”

“예, 아버지.”

당관이 방문으로 향했다.

당상아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당관이 툭 던지듯 대답했다.

“못난 널 맡아 줄 사람에게 술이라도 한잔 사야 할 것 아니더냐.”

* * *

“후우.”

연위가 웃으며 큼직한 대접을 가져왔다.

“오래 기다리셨소.”

탁자에 놓인 대접에는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고깃국이 담겨 있었다.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는 요리도 하시오?”

연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당가주도 할 줄 알잖소? 홀로 강호행을 하다 보면 노숙하면서 이런저런 먹거리를 찾게 마련이지. 그럴 때 배워 두었소.”

“할 줄 아는 거 많아서 좋겠소.”

“요리에는 문외한이신 모양이오.”

“본가는 돈이 많거든. 수행원들이 알아서들 해 줬지.”

“하하, 그대답소.”

당관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백주요.”

“알고 있소. 그래서 놀랍소. 백주는 맛없다면서 왜 그걸 들고 오셨소?”

“싸구려 입맛에 길든 사람한테는 고급주보다 백주가 낫지 않소이까?”

“하하하!”

연위가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당관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고는 시원하게 비웠다.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더럽게 쓰군.”

“그래서, 내일 바로 출발하실 거요?”

“점쟁이요?”

“내가 당가주를 모르오?”

“아는 거 많아서 좋겠소.”

연위가 말없이 당관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가만히 잔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무슨 기분이오?”

“음?”

“자식 농사에 성공한 사람은 어떤 기분인지 궁금해서.”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당가주도 잘 알지 않소? 요즘 같은 세상에 상아처럼 좋은 아이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소.”

“상아…… 그래, 못난 애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효녀지.”

당관답지 않은 말이었다.

“상아는 알아서 잘 컸소. 내, 어릴 적을 제외하고는 상아에게 제대로 신경을 써 주지 못했소. 즉, 자식 농사에 성공한 게 아니오. 자식이 알아서 잘 큰 거요.”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한데, 정작 내 나름대로 아끼고 밀어준 아들내미는 완전히 엇나가 버렸지 뭐요?”

“…….”

“솔직히 충격이었소. 녀석의 오만함이 도를 넘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오만함은 결국 본가를 향한 믿음과 애정에 기반하오. 녀석은 언제나 본가가 중원제일이라 생각했지.”

“천하 무림에서 사천당가가 최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소.”

“최고는 최고지. 최고로 악독하고, 최고로 무서운 가문이지.”

“…….”

연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당관이 양손으로 잔을 매만졌다.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나는 말이오, 내 아들이 적의 간세에 홀릴 정도로 바보인 줄은 상상도 못 했소.”

“…….”

“그리고 어쩌면, 양선만이 아니라 본가의 중책에 앉은 몇몇 인사들도 양선과 한배를 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다 아찔해지는군.”

쉽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연위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가를 향한 당관의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아마 당가 사람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당가는 무림 대다수의 무가와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폐쇄적인 가문이었다. 세상과 교류는 하지만, 당씨 문중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어서, 가문과 조금이라도 얽힌 일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독한 기질을 만들어 냈다.

지금의 사천당가는 가히 하나의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관은 그런 왕국의 왕이었고, 왕으로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내 잘못이오.”

당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에게 본가가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 주기 전에,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거친지부터 알려 줘야 했소. 본가의 무공이 최고라고 일러 주기 전에, 얼마나 연성키 어려운 학문인지부터 주지시켜야 했소.”

“…….”

“나는 모든 것을 거꾸로 가르쳤소. 하물며 그렇게 성장한 아들이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을 때도, 그 오만함이 차기 가주로서 분명 필요한 기질이라고 자위했소.”

당관이 잔을 비웠다.

연위는 묵묵히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나는 쓸 만한 가주라고 생각하오.”

“그대는 훌륭한 가주요.”

“쓸 만한 가주지만, 쓸 만한 아비는 아니구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연위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 있소. 하지만 그와 다른 경우도 있지. 후회하고 고치려 노력하면, 분명 나아지고 발전하는 경우라는 것도 있다고 보오.”

“…….”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은 명백한 후자라고 생각하오.”

“본가는 다르오.”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아닐 수도 있소. 아직 시도해 보지 않았잖소?”

“…….”

“당가주도 나도 부모가 처음이오. 처음은 언제나 어렵고, 언제나 돌발적인 상황을 맞이하기 마련이지.”

연위는 또다시 비워진 당관의 잔을 채워 주었다.

“당가주는 좋은 사람이오.”

“입에 발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소.”

“당가주처럼 좋은 사람의 자식이라면, 자식 역시도 부모의 좋은 면을 물려받았을 것이오. 한때 엇나갔을지언정 제대로 잡아 준다면 충분히 좋아지지 않겠소?”

“희망적인 말이로군.”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꿈꾸고 있지 않소이까?”

당관은 말없이 잔을 내려다보다가 고깃국을 떠먹었다.

“싱겁소.”

“소금 좀 더 타 드릴까?”

“됐소.”

몇 번 고깃국을 떠먹던 당관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만히 당관을 보던 연위는 자신의 잔을 비우고 채우길 반복했다.

당관은 오랫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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