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서쪽으로 부는 바람 (2)
“연 대수님.”
“왔나.”
기우희는 여전했다. 아리따운 금발도, 약간의 분홍 기가 도는 하얀 피부도, 지혜와 차분함으로 가득한 눈빛도 그대로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농을 던졌다.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군. 마음에 드는 사내라도 찾았나?”
기우희가 쓰게 웃었다.
“바빠서 누구 만날 시간도 없어요.”
“그렇겠지. 그래도 다행이야. 살이 쪽 빠져 있을 줄 알았더니만.”
“바쁜 일정 소화하려면 많이 먹어 둬야지요.”
“잘했어.”
“그나저나…….”
기우희가 질린 표정으로 묵룡부 내부를 둘러보았다.
“정말 엄청난 크기네요.”
묵룡부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동굴의 너비에 놀랄 것이다.
거대한 땅굴이 이렇게나 세련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지간한 자금력이 아니고서야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감탄은 나중에 하고, 일단 환자한테 가 보도록 하자고.”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건 또 뭐야.”
“그래도 외인인데, 이곳의 책임자에게 인사라도…….”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부주는 환자 상태부터 본 이후에 찾아가자고. 그 양반도 이해해 줄 거야.”
“오셨는가.”
막원은 요 며칠 사이에 제법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살이 빠져서 그리 보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내내 운기행공에 박차를 가해 전신에 진기가 건강하게 순행하고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몸은 어떻습니까?”
“괜찮네. 놀라울 정도로.”
“다행이군요.”
“자네 말마따나 온종일 운기로 내력을 가다듬었더니, 독기가 점점 기세를 잃더군.”
“소위 극독(劇毒)이라는 것은 대부분 음(陰)의 성질을 띱니다. 차갑다는 게 아니라 고인다는 뜻이지요.”
“어떤 것이든 고이면 위험하지.”
“바로 그겁니다. 독기를 완전히 제어할 능력이 되는 사람이라면, 끊임없는 운공을 통해 고인 독기의 힘을 상실케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아무나 되는 건 아니겠어.”
“잘 보셨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선배님이니까 가능했지요.”
“괜히 금칠해 줄 필요는 없네. 그나저나…….”
막원이 기우희를 바라보았다.
“이분께서 그 명성 자자한 무림맹의 의선각주이신가?”
기우희가 허리를 굽혔다.
“강호의 위대한 고수를 뵙습니다. 현재 무림맹 의선각의 책임자로 있는 기우희라 합니다.”
“허허, 오늘 두 분이서 내 얼굴에 금칠해 주려 작정이라도 한 모양이오.”
너털웃음을 짓던 막원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반갑소. 나, 막원이오.”
“백병신군의 위대한 명성, 언제나 들어 왔습니다.”
“지나친 평가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라 바보짓이나 하던 벽창호가 나요.”
웃음기 어린 말에 은근한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연호정이 말했다.
“낯 간지러운 자기소개는 거기까지 하고, 일단 진맥부터 들어가시지요.”
“사람 참.”
막원이 기우희를 보며 말했다.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겠소.”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걸었답니다.”
그래도 의선각주 일을 하면서 자존감이 많이 오른 그녀였다. 미소 짓는 얼굴에 여유가 묻어 나왔다.
“하나, 이 사람 말도 맞소. 사실 내 몸에 박혀 있는 이 독기를 한시라도 빨리 뽑아내 버리고 싶거든. 바로 진맥에 들어가 주시면 고맙겠소.”
“하면 실례하겠습니다.”
기우희가 막원의 맥을 짚었다.
눈을 감고 감각을 최대한 집중하는 그녀였다. 게다가 그녀 역시 내공심법을 익힌 몸, 상대가 누구라도 어떤 상태인지는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잠시 후.
“대단하세요.”
기우희의 얼굴에 순수한 감탄이 일었다.
“그런 극독을 완전히 압축시켜 꽁꽁 묶어 놓으셨군요.”
“이 정도야 요령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라오. 해서, 이 독의 정체를 알겠소?”
감탄하던 기우희의 얼굴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네, 잘 알고 있는 독이에요.”
막원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잘 알고 있는 독이다? 참으로 묘한 발언이었다.
‘음.’
문득 막원은 기우희가 서역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중독시킨 신화교의 교인들 대다수가 서역인이라는 점도.
“……혹시.”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맞습니다.”
“음?!”
“선배님께서 생각하시는 그게 맞습니다.”
막원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우리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허어.”
“일단 집중하시지요.”
“아, 알겠네.”
자신을 공격한 조직에 속했던 사람이란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불신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막원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기우희가 말했다.
“그 독의 이름은 화요신독(火妖神毒)이라 해요.”
“화요신독.”
“네. 독 중에서도 지극히 찾아보기 힘든 양강(陽强)의 독이지요. 절정고수는 물론, 설령 초절정고수라도 두세 방울에 목숨을 잃는 무서운 독입니다.”
“으음.”
“그 성질도 불과 같지요. 신경독이나 혈액독과는 달리, 생물의 기(氣)를 흡수하여 그 크기를 불리는 괴악한 물건이랍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지금은 아니지만, 불과 수일 전까지만 해도 이 독은 내 내공을 빨아들여 조금씩 몸집을 불려 가고 있었소.”
“기(氣)란 눈에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치료도 까다롭습니다. 애초에 중독된 사람을 치료하는 일 자체가 드물기도 해요. 대부분은 중독되자마자 목숨이 날아가니까요.”
“하면 방도가 없겠소?”
기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치료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막원의 얼굴에 안심의 빛이 감돌았다.
“참으로 다행이오.”
“다만, 완치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거예요. 정확한 약물을,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양을 투여해야 하거든요.”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오?”
“네. 어지간하면 침으로 자극하여 피와 함께 뽑아낼 수도 있겠지만, 독의 성질을 생각하면 오히려 위험한 방법이지요.”
“내공으로 뽑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오?”
“뽑아낼 수 있었다면, 혼자서도 진즉에 뽑아내셨을 겁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우희가 말을 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가주님 덕에 본래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해독이 가능하다는 것이겠지요.”
연호정이 물었다.
“당가주님의 의견이 도움이 되었나?”
“네. 약독에 관한 지식은 저와 비슷했지만, 그것을 응용하고 해독하는 방법은 감히 당가주님을 따라갈 수 없었어요.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몰라요.”
“하긴, 대대로 독을 만져 온 가문의 수장이니.”
기우희가 막원에게 말했다.
“일단 약재가 많이 필요해요. 치료는 내일부터 들어갈 테니, 오늘 하루는 독기 제어에만 신경 쓰시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섭취해 주세요.”
“알겠소. 그리고 고맙소.”
“별말씀을요. 의원은 사람 몸 고치는 게 일인 것을요.”
기우희가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감사 인사는 연 대수에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막원이 피식 웃었다.
“고맙다고 인사하면 낯부끄럽다고 욕이나 할 사람이외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제 성격을 금방 파악하셨군요.”
“그래도 고맙네.”
“잘 써먹으려면 써먹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리 말할 줄 알았네. 그나저나 예상 치료 시간은 어느 정도요?”
기우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환자분의 의지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한 달에서 두 달 사이로 잡으면 될 것 같군요.”
막원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생각보다 치료 기간이 길구려.”
“네. 그만큼 독한 독이니까요.”
“흐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하간 치료 잘 받고 계십시오. 어쩌면 선배님의 해독이 끝날 즈음 돌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음? 자네 어디 가나?”
“예.”
연호정이 서북쪽을 바라보았다.
동굴에서 보일 리 없는 구름 가득한 하늘이 그의 두 눈을 허옇게 물들였다.
“좀 골치 아픈 곳으로 갑니다.”
* * *
파아앙!
마지막으로 내지른 한 수가 불어오는 바람을 제대로 갈랐다.
“후우.”
나직이 숨을 몰아쉬던 패율이 단창을 내렸다.
“어떠냐?”
연호정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훨씬 좋아졌습니다.”
“정말이냐?”
“예. 순수한 관통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대신 모든 면에 있어서 균형 있게 발전한 느낌입니다. 특히나 보법으로 박자를 농락하는 게 대단했어요.”
“다행이군.”
연호정 옆에서 함께 구경하던 강량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누굴 꼬챙이로 만들려고 그런 무공을 만드신 겁니까?”
“싸가지 없는 후배는 닥치도록.”
“……대단하다고 말해 줘도 뭐라 그러시네.”
패율은 강량을 싹 무시했다.
“그래서, 언제냐?”
“알고 계셨습니까?”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이, 굳이 이 밤중에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확실히 선배의 눈치도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군.”
“예. 일이 좀 시급해졌습니다.”
“왜? 또 막원 선배처럼 누가 쫓기고 있다더냐?”
“당가에 문제가 터질 확률이 높거든요.”
순간 패율의 얼굴도 연호정처럼 진지해졌다.
“당가라니?”
연호정은 그간의 사정을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워낙 수련에 몰두했던 탓에 묵룡부 안에서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몰랐던 그였다. 묵룡부 자체가 원체 넓기도 했다.
“그새 그런 일이 있었어?”
“예.”
“허, 삼교 놈들 정말 미친 듯이 날뛰는군. 이제는 하다 하다 마공까지 풀었단 말이지?”
“그보다 더한 짓도 저지르는 놈들입니다. 이 정도는 우습지요. 다만, 놈들이 겨누고 있는 상대들 때문에 문제일 뿐입니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에 네 거처로 가겠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패율이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너답지 않게 뭘 그리 간질간질하게 말하는 거냐? 집어치워라.”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거든요. 당가에, 음제에……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다 두고 가고 싶을 정도입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적이 한두 번이냐? 군소리 그만하고 가라.”
“박정하시긴.”
연호정과 강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패율의 거처를 나섰다.
그때, 패율이 물었다.
“잠깐.”
연호정이 툴툴거렸다.
“나가라고 하더니 대뜸 잡으시네. 왜요?”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말고 또 누가 함께냐?”
“철기단주 외에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래?”
“예. 한데 왜요?”
“그냥 좀…….”
패율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막상 생각해 보니, 이거 이래도 되나 싶어서 말이다.”
“역시 선배도 사람이군요. 이번에는 똥꼬가 좀 찌릿찌릿하지요?”
“……너 가끔 말 진짜 더럽게 하는 거 아냐?”
“압니다.”
“죽는 거야 누가 좋아하겠냐마는, 사지(死地)에서 활개 치는 일이라면 익숙하니 나는 상관없다. 문제는, 죽을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실패할까 싶어 그러는 거다.”
“…….”
“이 정도 인원으로, 당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 음제 하은교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냐?”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래서 고민하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누구? 설마 부주나 이공녀는 아닐 테고, 백서?”
“이쪽 사람 말고요.”
연호정이 엄지로 북쪽을 가리켰다.
“무림맹 측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