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들어야 안다 (6)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던 부선이 문득 느껴지는 피 냄새에 눈을 떴다.
“왔군요.”
스르륵.
그녀가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엽성이 있었다.
엽성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깨끗한 천으로 잘린 팔을 동여매고 의복도 말끔한 것으로 갈아입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정말이었어.’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이 기도, 본래의 혈사자기가 아니야. 괴암무의 진기가 극소량 섞여 있다.’
전홍이 죽은 지 몇 시진 지나지도 않았다.
한데 엽성은 벌써 대부분의 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모양이었다. 예전처럼 짐승 특유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서늘하고 불같은 힘이 동혈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전홍의 기였다. 정확히는, 전홍의 기 대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엽성의 새로운 힘이었다.
그래 봤자 본래의 힘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지만.
‘문제는 그 절반밖에 안 되는 힘으로도 위험하다는 것.’
새삼 자신과 엽성 간의 차이가 실감이 갔다.
그리고 그런 엽성을 너무나도 쉽게 제압해 버린 연호정에 대한 놀라움도 커졌다.
“날 기다리고 있었느냐?”
엽성의 목소리는 탁했다.
본래의 목소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전홍의 목소리와 섞인 듯한 느낌이랄까.
기분 탓이겠지만, 정말이지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난 부선이 엽성의 몸을 살폈다.
“왼쪽 팔은 원래대로 복구했군요. 내상은 다 낫지 않았지만…… 벌써 절반 이상을 회복했어요.”
“…….”
“굉장해요. 제아무리 사흡공이 대단해도, 빨아들인 내력을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건 시전자의 능력이겠지요?”
엽성의 눈이 깊어졌다.
“사흡공을 알고 있느냐?”
“사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지요.”
“그런가…….”
엽성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사부…… 사부라…….”
섬뜩한 목소리였지만, 묘한 여운을 남기는 듯했다.
가만히 부선을 바라보던 엽성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묵룡부의 외곽이지. 나는 네가 따로 떨어져 있는 순간을 노리려 하였다. 그래서 지금 나타난 것이다.”
“…….”
“하지만…… 보아하니 이조차 함정이었던 것 같군.”
부선이 차갑게 말했다.
“그따위 삿된 무공으로 셋째를 죽였으니, 어떻게든 당신을 잡아 죽일 수밖에요.”
“틀렸다.”
“……?”
“너는 사부에게 지나친 환상을 갖고 있어. 너는 사부를 모른다.”
“당신보다는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아니, 모른다. 사부는 내가 너나 셋째를 어떻게 죽이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분이다. 사부의 무공으로 죽였든, 제삼자에게 받은 무공으로 죽였든 아무 상관하지 않을 분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셋째를 노린 것이다. 이 기회에 놈을 잡고, 혈사자기를 얻어 보다 빠른 회복을 도모하여 너까지 잡아먹을 생각이었지.”
잡아먹는다.
그야말로 무서운 표현이었다. 부선은 상대에 대한 경멸의 감정 외로, 은근한 섬뜩함을 느꼈다.
엽성이 고소를 지었다.
“문제는…… 사부 역시 ‘변화’를 맞이할 줄 아는 분이라는 걸 내가 몰랐다는 것이겠지.”
“…….”
“안 그렇습니까, 사부님?”
엽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혈 너머의 그림자에서 양천과 강량이 모습을 드러냈다.
엽성이 미소를 지었다.
“거기 계셨군요. 대단합니다. 놀라워요. 몸은 이 지경이 되었어도 감각은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사부가 어디에 계시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양천은 말없이 엽성을 바라보았다.
엽성이 말했다.
“저를 잡으러 오셨습니까?”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부께서는 그렇게 말이 많으신 분이 아니었잖습니까? 굳이 저를 떠볼 이유가 있습니까?”
“…….”
“역시 사부님은 바뀌셨습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너를 잡으러 왔다.”
“왜 저를 잡으시려는 겁니까?”
묘한 질문이었다.
엽성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사부님은 그런 분이 아니잖습니까? 후계자든 아끼는 부하든, 어떤 식으로 상대를 잡아먹어도 관여하지 않던 분이십니다.”
“…….”
“약육강식. 독에 당했든 술수에 당했든, 결국 당한 놈이 병신이다. 이게 진정한 강자존 아닙니까?”
양천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엽성이 손으로 부선을 가리켰다.
“사부께서는 둘째를 인정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 녀석에게 우리가 모르는 더 강한 무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참았습니다. 아니, 굳이 신경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 죽이면 그만이니까. 최후의 일인이 되면 자연히 사부님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
“…….”
“한데 이게 뭡니까?”
엽성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왜 저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설마하니, 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벌써 후계자로 정하신 건 아니겠지요?”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직 누구도 후계자로 정하지 않았다.”
“그럼 도대체 왜!”
엽성의 목소리가 살짝 격양되었다.
“도대체 왜 저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이대로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서 술이나 한잔 잡수고 계십시오! 사부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잖습니까!”
“…….”
“우리는 그렇게 키워졌습니다! 약한 상대는 물어뜯고, 강한 상대에게는 몸을 사리도록 키워졌지요! 그렇게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앞에, 마침내 최후의 한 명이 남았습니다!”
“…….”
“그간의 가르침은 다 헛것이었습니까? 차라리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십시오!”
“묘하구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마따나, 예전의 나였다면 굳이 널 잡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한데, 너는 과거 어느 시점의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냐?”
“……?!”
“사음교주와 한판 승부를 벌이기 전의 나? 아니면 사음교주의 독에 당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을 적의 나?”
“……!!”
“그도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삼교와의 전쟁에서 승리코자 무림맹과 손을 잡은 얼마 전까지의 나냐?”
엽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설령 네가 내 변화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것이 억울한 일이었다고 치자.”
“…….”
“한데 묵룡부에서, 이 흑도의 대지에서, 이 드넓은 구주팔황의 땅 위에서 투왕이 본인의 제자를 잡아 족친다는데 감히 누가 뭐라 할 것이냐?”
“……!!”
그야말로 충격적인 언사였다.
엽성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이유가 필요하냐? 내가 너희를 그리 가르쳤더냐?”
“…….”
“아니지. 나는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왜? 나는 너희를 제자가 아닌 수하로 보았기 때문이다.”
쿠구구궁!
양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사위를 짓눌렀다.
그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명목상 제자로 받아들였을 뿐, 나의 인정을 받은 자만이 진짜 제자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반병신이 된 너의 수많은 사형제들처럼 너 역시 잡아 족칠 수 있다.”
“……!”
“본인도 그리될 수 있다고, 너는 정녕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냐?”
“왜…….”
엽성의 눈에 핏발이 섰다.
“왜 제 일에 관여하십니까? 왜 후계자 선정 문제에 관여하시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더냐. 내 마음에 안 들면, 거기서 후계자고 뭐고 끝이다.”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희와 나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공유되는 가치는 단 하나다.”
양천이 턱을 치켜들었다.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
“강해져서, 나라는 주군에게 제자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왜 둘째를 마음에 들어 했느냐고?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제자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 처리를 함에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강해지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지.”
“…….”
“내가 언제 후계자 싸움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느냐? 내가 정녕 그런 말을, 너희 앞에서 뱉은 적이 있었느냐?”
“……?!”
“방목했다고 멋대로 해석하고, 그간 관여하지 않았다고 지금의 현실을 억울해하느냐?”
콰르르르릉!
환청인가.
동굴 전체가 무너질 듯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동굴 안에서 천둥이 치는 듯했다.
양천이 말했다.
“너는 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냐? 네가 본 나는, 너의 조막만 한 머리로 잴 수 있는 천품이었느냐?”
엽성의 얼굴엔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오해야 할 수 있지.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니까. 그러나…….”
화르르륵!
양천이 왼손을 내밀었다.
그의 왼손에서 검붉은 기운이 타올랐다. 끔찍한 살기와 상상 초월의 위력을 한껏 담은 그 기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내 무공의 궁극을 엿보지도 못한 놈이, 고작 그 정도 경지에 만족하여 다른 사람이 준 무공을 연성해?”
“……!!”
“재능이 있기에 더더욱 용서 못 할 대죄니라. 하물며 네가 연성한 그 사흡공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파악하지 못했겠지.”
양천의 눈은 이제 완전히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너는 셋째보다도 못한 놈이야. 셋째는 오만하고 안목이 부족했을지언정, 적어도 제 무공에 확신은 있었느니라.”
부르르르.
엽성의 몸이 떨려 왔다.
저 엄청난 기운 앞에서 절로 무기력해지는 공포, 그리고 자신과 상대에 대한 극도의 분노 때문이었다.
“너는 결국, 마지막까지 내게 실망만을 안겨 주는구나.”
“으아아아!”
쾅!
엽성이 괴성을 지르며 부선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었다. 양천의 압도적인 기운을 받아 내는 도중에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두두둑!
“크아악!”
어느새 부선의 앞에 도달한 양천이 엽성의 왼팔을 쥐었다.
탈골되었던 것을 고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의 왼팔이 또다시 망가져 버렸다.
“으아아! 으아아아아!”
엽성이 잘린 오른팔을 휘둘렀다.
퍽! 퍽! 퍽!
양천의 가슴을 마구 후려치는 오른팔에서 점점 피가 배어 나왔다. 애써 막아 둔 상처가 다시 터져 버린 것이다
끔찍한 광경이지만, 엽성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그의 이성을 완전히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엽성의 팔을 쥔 양천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우둑!
“컥!”
뼈가 부러졌다. 동시에 엽성의 두 다리가 절로 무릎을 꿇었다. 흑사자기로 엽성의 몸을 완전히 통제한 것이다.
양천이 서늘한 시선으로 엽성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지금 나의 자존심이 얼마나 산산조각이 났는지 모를 것이다.”
“크으윽!”
“그리고, 내가 얼마나 후회하는지도.”
신음을 토해 내던 엽성이 놀라서 양천을 올려다보았다.
후회라니? 그가 아는 스승은 어떤 일이 있어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양천이 엽성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만 쉬어라.”
터어어엉!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엽성이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엽성의 눈은 흰자위만 가득했다.
부선이 침을 삼켰다.
“죽은 건가요?”
“그렇지 않다.”
쓰러진 엽성을 내려다보는 양천의 표정은 묘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정말이지 묘한 표정이었다.
“녀석이 사흡공을 어디에서 받아먹었는지를 알아내야 할 것 아니더냐.”
“아, 네.”
“만약 연 부관이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다 뽑아냈다면, 그때는 편히 보내 줘야지.”
양천이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쉽지 않구나. 정말 쉽지 않아.”
후회가 일었다. 엽성이 죽는 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었다.
그리고 선을 넘은 놈의 죽음에 제 탓을 하기 시작하는 스스로가, 양천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