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45화 (544/963)

545화. 들어야 안다 (5)

“그래?”

“예.”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양천이 강량에게 빈 잔을 건넸다.

“한잔 받지.”

“예?”

“왜? 술은 별로 안 좋아하나?”

강량의 얼굴에 황당함이 일었다.

“형님이 말한 곳으로 병력을 보내야 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술이라니요?”

“병력은 병력이고 술은 술이지. 좋은 술이니까 한잔해.”

가만히 양천을 보던 강량이 이내 공손한 자세로 잔을 받았다.

그의 잔을 채워 주며, 양천이 말했다.

“좀 느닷없기는 하지만,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네.”

“……?”

“미안하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해하는 그를 보며, 양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철, 아니 귀철검문의 문주는 멋진 호한이었어. 그 대쪽 같은 성품은 잘 알고 있었지. 실제로 만난 적도 있고.”

“…….”

“내 욕망을 위해 부득불 자네 문파를 궤멸시켰네. 사과함세.”

“뭡니까?”

강량의 눈이 차가워졌다.

“이제 와서 진심이 담기지도 않은 사과 따위 받아 봐야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날 선 목소리였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강량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기실 바로 욕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진심일세. 하지만 자네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겠네.”

“…….”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군. 나도 나고, 자네도 자네야. 자네는 보타암의 저 검수들과는 달라. 명확한 선이 있고, 목표도 있었지. 자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그런 의도는 없겠지만, 그런 말을 들어도 제 살의는 죽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내 가족과 터전을 짓밟은 침략자를 말 한마디로 용서해서야 쓰나. 그것은 꿈과 야망 이전에 사람으로서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지.”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는 보기 드문 인재야. 무재를 말하는 게 아닐세. 자네의 그 강단과 대범함,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강렬한 목표는 그 나이대에서 보여 줄 만한 게 아닐세.”

“…….”

“비록 원수지간이지만, 나는 그런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네.”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 합니까?”

“한데 왜 내 제자들에게는 그러지 않았을까?”

“……?!”

양천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 방식에 대해 후회하지 않네. 방식은 후회하지 않지만, 내 제자들에게는 미안하더군.”

“…….”

“만약이라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만약 내가 녀석들을 하나하나 신경 써 줬다면, 지금 이 사달이 나지는 않았을 것 같네.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군.”

강량은 당황스러웠다.

이 강철의 위정자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런 말을 굳이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현실이.

양천이 피식 웃었다.

“첫째는 재능이 출중한 녀석일세. 무의 재능만 따지자면 당대 무림 최고를 논할 수 있다고 보네. 한데 그런 녀석이, 쓸데없는 정치질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사흡공 같은 괴공이나 익히고 있을 줄이야.”

“…….”

“투왕의 제자로서, 묵룡부주의 후계자로서 한길에만 매진하는 것이 그리도 힘들었던가…….”

힘든 일이다.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투왕 양천의 제자라면, 강호 최강자 중 하나를 스승으로 두었다면, 그런 스승의 발치에라도 이르고자 했다면 주변을 둘러봐선 안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무공에 한해선 그래야만 했다.

“나는 묵룡부주라네. 재미있는 건, 나도 이곳 묵룡부에 어떤 비밀 장소가 있는지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그럴 수 있지요.”

물론 어지간한 통로와 비밀 장소는 다 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다 알 필요는 없다. 그의 눈과 귀가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니까.

“첫째는 내가 모르는 통로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문제지. 만에 하나 녀석이 내가 모르는 통로들을 많이 알고 있다면, 만에 하나 녀석이 내가 모르는 제삼의 세력과 손을 잡고 있다면.”

“……?!”

“그렇다면, 지금 묵룡부는 꽤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봐도 좋겠군.”

순간 강량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엽성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만에 하나일 뿐이야. 아닌 말로, 정말 제삼의 세력과 손을 잡았다 한들 본부 전체가 나의 지배하에 있네. 그런 상황에서, 통로를 안다고 제삼자가 이곳에 침투한다? 온갖 고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세작 능력이 탁월하다면…….”

“그 세작 능력이 탁월함을 증명한 연 부관도 감히 숨어서 들어올 생각은 못 했는데?”

“……으음.”

“묵룡부와 무림맹은 달라. 무림맹은 숱한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혀 있지. 반면 묵룡부는 나라는 절대권력자 한 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 하물며 지리적으로 봤을 때, 무림맹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묵룡부를 빠져나가는 게 몇 배는 더 어렵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놈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방수가 있다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형님의……?!”

양천이 껄껄껄 웃었다.

“연 부관이 자네를 왜 데리고 다니는지 알겠군. 머리가 제법이야.”

“이, 이런!”

강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천이 손을 저었다.

“급하게 움직일 것 없네.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까.”

“예?”

“연 부관이 왜 자네를 나한테 보냈겠나? 나더러 지원군을 요청해 달라는 뜻이었겠지.”

“……!”

“자네는 뛰어난 검객이지만, 연 부관이 보기에 이런 전투에서는 제힘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일세. 그래서 자네를 보냈고, 내게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지.”

“대체 언제……?”

“언제 보냈느냐고? 자네가 와서 보고를 마친 순간 움직였다네. 내 친위대인 묵룡대(墨龍隊)가 직접.”

“……!!”

양천이 잔을 비웠다.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자, 그쪽은 그쪽에게 맡기고 우리는 말썽꾸러기 첫째나 잡으러 가 볼까? 둘째가 위험해지기 전에 말일세.”

* * *

남자의 생김새는 다소 평범했다.

이제 오십이 조금 넘었을까? 아주 지긋한 나이는 아닌 듯하지만, 슬슬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외양이었다.

“대단하군.”

초로의 사내는 연호정이 왔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쇠로 된 막대 비슷한 걸로 길쭉한 철제 원통을 쑤시고 있을 뿐이었다.

“유산독탄(榴散毒彈)은 당문의 폭우이화침을 개량한 물건이지. 확산 범위는 비슷하지만, 속도는 더 빨라. 그런 물건을 그리 가볍게 피하다니, 내 목숨도 오늘까지인가 보군.”

“…….”

“자네 이름은?”

연호정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제야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연호정은 사내의 녹안(綠眼)을 보고 확신했다.

‘역시 독인(毒人).’

독공을 연마한 자들이 이루고 싶어 하는 경지 중 하나가 바로 독인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독인이면서도 독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반만 독인이었다.

“도끼라…… 자네가 연호정인가?”

“엽성에게 들었나?”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쉽게 인정하는군.”

“내, 실력은 부족해도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뛰어나다고 자부하네. 자네의 눈빛과 분위기를 보니, 엽성도 끝났군.”

“끝났다…… 아직 놈이 묵룡부 안에 있는 모양이지?”

“모르고 있었나?”

“몰랐지. 묵룡부가 워낙 미로 같아서.”

“허허, 내가 쓸데없이 말이 많았군. 하지만 뭐, 상관없겠지.”

상관없다.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자다.

‘아니, 이미 진즉 죽었어.’

마음이 죽었다. 살아갈 의욕을 진즉에 잃은 사람이었다.

“나는 효극이라 하네. 독 쓰는 일에 능한 사람이지.”

“효극이라…….”

연호정의 눈이 효극의 얼굴과 체형을 훑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 깊게 새겨진 주름, 뻣뻣한 머리카락에 중원인과는 다소 다른 복식까지.

“남만 오독궁 출신인가?”

“남만이라……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군. 그 말은 취소하지.”

효극이 껄껄껄 웃었다.

“재미있는 사내로다. 확실히 자네는 다르군. 며칠 만에 철기단을 굴복시켰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건 무공만 강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지.”

“그것도 엽성이 알려 주던가?”

“엽성이 자네에게 접근하지 않던가?”

“접근했지.”

“왜 접근했다고 생각하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길래 따로 속셈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 나를 끌어들여 철기단을 손에 넣을 생각이었나.”

엽성이 부선에게 연호정에 관련된 소문을 듣지 않았느냐고 말했던 게 바로 철기단이었다.

엽성이 원한 것은 연호정이 아니라 철기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연호정도 자신을 지지해 준다면 좋을 일이었겠지만.

“생각보다 아는 게 적었군. 내가 다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아.”

“정보가 너무 없었어. 다만 이런저런 유추는 했었지.”

“그랬구먼.”

끼기긱!

철제 원통을 쑤시던 효극이 막대를 버렸다.

연호정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얘기를 많이 듣고 싶은데, 이 이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구만?”

“허허, 자네는 눈치가 빨라서 좋군.”

“이왕 목숨 내놓은 거, 좀 더 알려 주지.”

“무엇이 그리 알고 싶은가?”

“엽성에게 사흡공을 전해 준 건 당신일 테고, 이 숲에 그 유산독탄인지 뭔지 하는 걸 깐 것도 당신일 테고.”

“사흡공이라…… 그래, 내가 그에게 전해 주었지.”

“하지만 당신이 본래부터 사흡공을 알고 있진 않았을 텐데.”

사아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불그죽죽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음이냐? 아니면 광혈이냐?”

효극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말 엄청난 살기구나. 우리 숲에서도 그런 살기를 뿜는 마수(魔獸)는 없었거늘.”

“다시 묻겠다. 사음이냐, 광혈이냐?”

“삼교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마지막으로 묻겠다.”

스르륵.

연호정이 효극에게 도끼를 겨누었다.

순간 효극의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목숨을 버린 것은 버린 것이고, 신체의 반응은 반응이다. 무지막지한 살기가 집중되자 그의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사음이냐? 광혈이냐?”

“……그건 말해 줄 수 없구먼. 계약이거든.”

“삼교가 맞긴 하군. 그럼 사음일 확률이 높겠어.”

효극은 아차 했다. 이 살기의 폭풍에 이성이 잠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정보를 준 것이다.

“엽성에게만 접근한 건 아니겠지?”

효극이 미소를 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 억지로 짓는 미소였다.

“그건 알아서 조사해 보시게.”

가만히 효극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이내 히죽 웃었다.

“당가의 폭우이화침을 개량했다……. 그래, 당가주님한테 들은 적이 있다. 저 멀리 남쪽 지방에 팔다리가 잘려도 죽지 않는 괴물들이 있었다고.”

“……!!”

“어떻게 물리칠까 하다가 그냥 내장을 통째로 녹여서 싹 죽여 버렸다고 들었는데.”

“……닥쳐라.”

효극의 눈이 붉어졌다.

“우리는 괴물이 아니다. 새로운……!”

“아직 복수도 못 했는데 왜 죽으려고 하지?”

“……?!”

“아니군. 복수는 이미 했군. 당가주를 죽이진 못했지만, 다른 방식으로 복수에 성공했어. 그래서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야.”

화르르륵!

순간 연호정의 등 뒤로 시뻘건 태양신의 불꽃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너, 당가 쪽에도 수작질을 부렸냐?”

“이놈!”

콰아앙!

유산독탄이 폭발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