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들어야 안다 (4)
워낙 은밀하게 움직여서 그렇지, 묵룡부는 당금 중원에서 무림맹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당연히 휘하 병력의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한 집결도만 따지자면 무림맹 이상이었다.
두두두두두.
철기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덕 위에서 철기단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황석태가 새로운 화원(火猿)에게 말했다.
“철기단의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구백 인원은 남쪽 퇴로를 봉쇄하겠소.”
“그래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인원이 너무 적소. 정보단에서 상황을 시시각각 알려 주지 않으면 놓칠 확률이 높소.”
“걱정하지 마세요. 본부의 정보력이 무림맹 이상이라는 걸 철기단주께서도 아시잖아요.”
“물론 그렇소만.”
“임무를 나갔던 광풍단(狂風團)도 남쪽의 퇴로를 봉쇄한다고 했어요. 일차로 철기단, 이차로 광풍단까지 진을 형성하고 있으니 적어도 남쪽은 안심해도 되겠지요.”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광풍단이라.”
광풍단 역시 철기단처럼 일천의 병력으로 구성된 묵룡부의 정예 부대였다.
철기단은 묵룡부 최강의 부대다. 여러 분야에서 따졌을 때, 그것은 실로 합당한 평가였다.
그러나 광풍단 역시 용아철기단의 아성을 넘볼 수 있을 만큼 강한 집단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철기단은 평야 전투와 전면전에 조금 더 특화된 전투 부대였고, 광풍단은 시가전(市街戰)과 특작 임무에 특화된 부대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 유들유들한 놈들까지 진을 형성한다면 남쪽은 안심해도 되겠군.”
제법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용아철기단이 묵룡부 최강이라지만, 광풍단 역시 만만치 않다. 서로의 특성도 워낙 다르다 보니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능력만큼은 확실하게 인정한다. 그것이 그들 사이였다.
“그나저나…….”
화원은 호기심을 참기 힘들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지만…… 연 부관이라는 사람은 어땠나요?”
“음?”
“전대 화원이 연 부관을 그렇게나 싫어했다고 들었는데요.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화원은 새로운 십이지신의 일원이었다. 기존의 화원보다 무력도 더 강했고, 훨씬 더 차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양천 휘하, 새로운 화원이 되기 전에는 쌍곤나찰(雙棍羅刹)이라 불리던 고수였다. 흑도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고수로, 성격이 독특하기로 유명했다.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재수 없는 인간이오.”
“그래요?”
“다만 능력 하나는 확실하오. 무림맹이 왜 서른도 안 된 어린놈 어깨에 이리 막중한 책임을 얹어 놓았는지 알겠더군.”
화원의 눈이 빛났다.
묵룡부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황석태가 얼마나 자존심 강하고 까다로운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황석태가 벌써 연호정을 인정했다.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초장부터 철기단과 승부를 본 사람이니.’
연호정이 철기단 일천 병력과의 신고식을 감행했다는 소문은 수뇌부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건이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정말이지 배포가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했다. 천하의 누가 있어 철기단을 단독으로 상대하려 하겠는가? 그건 무력 이전에 용기와 자신감의 문제였다.
‘궁금하군.’
화원이 눈을 빛냈다.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아마 수뇌부 중 절반 이상은 연호정과 사담을 나눠 보고 싶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할 것이고.
“어찌 되었든 나도 움직여야겠소. 화원은 어찌할 것이오?”
묵룡부주의 직속 수하라는 점에서 십이지신의 위치는 지극히 높다.
하지만 실제로 묵룡부의 수뇌부 중에는 십이지신보다 강한 사람이 많았다. 십이지신이라는 위치의 특수성상 모두가 그들을 존중해 줄 뿐이었다.
일례로 황석태의 무공만 해도 지금의 화원, 쌍곤나찰보다 한 수 위였다.
강자존의 결정체인 묵룡부에서도 강함의 척도를 벗어난 이들.
그래서 황석태 역시 화원에게 반존대를 하는 것이다.
“함께 가시죠. 어차피 남쪽 정보를 알려 주려면 제가 교각 역할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좋소. 갑시다.”
파아아앙!
두 사람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비단 철기단과 광풍단만이 아니었다.
묵룡부의 북쪽은 도룡단(屠龍團)과 참호단(斬虎團)이 천라지망을 펼쳤고, 동쪽과 서쪽은 각기 혈응대(血鷹隊)와 비사대(飛蛇隊)가 틀어막았다.
이 정도면 무극지경의 고수가 아니고서야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다. 특히 엽성의 경우 사흡공으로 전홍의 내력과 원정지기를 빨아들였지만,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묵룡부주의 대공자라는 높은 신분의 고수가, 한순간 포박하여 끌고 와야 할 죄수 신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속에서, 연호정과 강량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 * *
“이것 참.”
강량이 입맛을 다셨다.
“상황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연호정이 쓰러진 시신 한 구의 맥을 짚었다.
“생기(生氣)가 사라졌지만, 사흡공으로 빨린 건 아니야. 사인은 독살이다. 맹독으로 인한 심맥 파열이야.”
그가 시신의 목덜미에서 투명한 침 하나를 뽑아 들었다.
내공을 연성한 사람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투명한 침이었다. 마치 당가의 우모침(牛毛針)을 연상케 했다.
“우모침은 아니군.”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숲 곳곳에 시체가 여럿 나뒹굴고 있었다.
한 곳에서 죽은 것이다. 그들 모두가 독침에 당했다.
“굉장한데요? 이들 모두 쟁쟁한 강자들인데, 한둘도 아니고 몽땅 죽다니요.”
“그만큼 예측 못한 상황에서, 예측 못한 공격을 받았다는 뜻이겠지. 물론 이 암기가 강하기도 했겠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연호정이 문득 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저기다.”
연호정이 가리킨 곳은 잎이 무성한 거목의 한 나뭇가지였다. 가을인데도 아직 헐벗지 않은 나무였다.
“암기가 저기서 터진 거다. 나무 표면에 그을음이 있어. 화약을 쓴 거야. 폭발형 암기라는 뜻이다.”
“폭발형 암기…….”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설마 당가의 물건인가요?”
이 시신들의 정체는 엽성에게 선을 댔다가, 다시 부선에게로 충성을 돌린 묵룡부의 몇몇 수뇌부들이었다.
수뇌부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힘은 없는 이들이었다. 무공도 가장 약한 축에 속했고, 달리 연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무공이 절대적으로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묵룡부의 수뇌부치고 약하다는 것이지, 개개인은 웬만한 중소 문파의 주인이 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당가의 물건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 정도 위력의 암기라면 당가 외에 마땅히 생각나는 집단이 없지만…….”
딱 한 군데가 있긴 하다.
바로 남만의 오독궁(五毒宮)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당가와 마찰을 빚다가 처절하게 패배한 이들이었다. 지금은 명맥이나마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적어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건,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진즉 쓰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부선의 말을 들어 보면, 엽성은 그야말로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그러나 엽성은 도주를 위해 마지막 한 수를 남겨 두었다고 했다. 그때 허를 찔려, 도주한 그를 부선도 잡지 못했다.
한데 그런 놈이 암기까지 갖고 있었다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부선에게 썼다면 승부의 추가 완전히 기울었을 텐데?
“둘 중 하나다. 제삼자가 엽성을 도와주고 있든지, 아니면 엽성이 묵룡부 주변에 이러한 함정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았든지.”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후자라고 생각하긴 어렵겠습니다.”
“그래.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역시 방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머리 아프게 하는군.’
무림맹에서 세작을 잡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
사실상 엽성의 의도를 모르는 바에야 정말 방수가 있는 건지, 아니면 묵룡부 전체에 함정을 깔아 둔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는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을 선택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맹의 세작도 그런 식으로 잡았다.
하지만…….
‘뭐가 이렇게 걸리는지 모르겠군.’
엽성이 사흡공을 익혔다고 가정했을 때, 삼교와 연이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접근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엽성에게 접근했다면, 엽성은 무엇을 믿고 ‘그’가 건네준 사흡공을 의심 없이 받았을까.
아니, 무공에 대한 안목은 엽성 역시 뛰어나니 사흡공의 구결을 받는 즉시 그것이 위험한지, 익혀도 되는 무공인지를 판단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엽성이 ‘누군가’에게 사흡공을 받기까지의 과정이다.
‘적어도 백도 정파는 아닐 것이다. 흑도거나, 엽성이 크게 의심하지 않을 만한 지파에 소속된…….’
그때였다.
연호정이 남동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것 봐라.’
남동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량.”
“예, 형님.”
“지금 바로 묵룡부로 가서 이곳의 상황을 전해. 독과 암기에 관한 부분도 전부.”
“알겠습니다.”
“위험할 수 있으니까 주변 경계 잘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훅!
강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귀왕진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귀영신보(鬼影神步)였다.
속도보다 은밀함과 숲에서의 기동성을 살린 움직임이었다. 저 정도면 남에게 들킬 일 없이 묵룡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스릉.
흑룡부를 뽑아 든 연호정이 흔적을 밟았다.
엽성의 족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지혈을 제대로 했는지 핏자국은 없었다.
연호정은 신중하게, 그러나 꽤 빠른 속도로 걸었다.
‘재미있군.’
그는 남동쪽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독기(毒氣)를 느꼈다.
단순한 독기가 아니었다. 음험한 살기와 사기(死氣)마저 섞인, 뭐라 형용하기 힘든 끈적끈적한 기운이었다.
‘놈은 나를 보고 있다.’
사실 그것도 애매했다.
분명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이미 나를 포착했다면 굳이 인기척을 숨길 이유는 없지.’
후우우웅.
연호정은 자연스레 기도를 풀었다.
지이이이잉.
연가신단이 회전을 시작하고, 사신의 신기가 각 부위에서 성스러운 빛을 뿜어냈다.
후욱!
낮게 깔려 나가다가 한순간 사방으로 확 퍼지는 기파가 실로 대단했다.
파사사사사삭!
그 기운이 어찌나 살벌한지 나무에 숨은 새들과 쥐, 뱀 등 각종 동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당황하는가.’
잘 모르겠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잘 읽히지 않았다.
연호정은 오감을 최대한 예민하게 일깨웠다.
그때였다.
쾅!
굉음이 터지기도 전에 연호정의 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파바바바바박!
연호정이 서 있던 자리에 무수히 많은 침이 박혀 들었다.
치이이익!
침에 맞은 잡초와 낙엽이 허연 연기를 피워 내며 녹아들기 시작했다.
지독한 독력이었다. 아까 본 시신들의 몸에 도사리고 있는 독보다도 훨씬 더 독했다.
‘미친.’
연호정은 당황했다.
‘정말로 여기저기 암기를 설치해 뒀다는 말인가?!’
그때였다.
흐려진 시야 너머, 상대가 다시 정확하게 자신을 포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번쩍!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상대가 자신을 볼 때, 자신 역시 상대를 인식한다. 연호정은 상대가 남동쪽,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지까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파아아아앙!
나뭇가지를 밟아 가며 무섭게 돌진하던 연호정이 이내 넓은 공터 입구에 내려섰다.
그리고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