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화. 들어야 안다 (3)
“……뭐라고요?”
부선의 얼굴은 충격 그 자체였다.
“셋째가?”
“그렇소.”
“…….”
“그리고 삼공자를 그리 만든 이가 대공자라고 추측하고 있소.”
백서는 투명한 눈으로 부선을 살폈다.
부선의 얼굴은 충격으로 가득했다. 거기에 어떠한 꾸밈도, 거짓도 없었다.
“이공녀가 대공자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리고 그 일이 거의 성공 직전이었다는 것도.”
“…….”
“대공자는 잡았소?”
부선이 고개를 저었다.
“잡지 못했어요.”
“홀로 움직였소?”
“……그렇지 않아요.”
부선은 자신에게 줄을 댄 사람들의 명단을 말해 주었다.
백서가 혀를 찼다.
“그들은 아직 연락이 없소?”
“네.”
“둘 중 하나로군. 이공녀에게 거짓 충성을 맹세했거나, 아니면 지금쯤 다 죽었거나.”
“……!”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는 아닌 것 같소.”
“자, 잠깐만요!”
부선은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엽성은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였어요. 오른팔이 날아가고 왼팔도 탈골되었죠. 각종 타박상, 골절상은 물론 극심한 내상까지 입어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수준이에요.”
“그렇소?”
“그래서 굳이 직접 쫓지 않았던 거예요. 다 잡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백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군.”
“……?!”
“뭐가 되었든, 현재 본부에 없는 인원들을 파악해 본 결과, 임무를 나간 전투 부대와 몇몇 고수를 제외하면 대공자, 그리고 이공녀가 말한 수뇌부들이 전부요.”
“그런…….”
부선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굳이 엽성이 부로 돌아와서 셋째를 죽일 이유가 있나요?! 아니, 그럴 능력이……!”
“있소.”
“네?”
“삼공자는 온몸의 생기와 내공이 빨려서 죽어 버렸소.”
“……!!”
“삼공자가 연성한 괴암무는 천고의 신공이오. 다만 괴암무의 진기 이전에 혈사자기를 연성했지. 묵룡부에서 혈사자기를 연성한 사람은 총 넷뿐이고, 제아무리 대공자가 미쳤더라도 부주님이나 멀쩡한 이공녀를 노릴 수는 없었겠지.”
“자, 잠깐만요!”
부선의 얼굴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지금 그 말씀은…… 엽성이 흡성대법이라도 익혔다는 뜻인가요?!”
백서가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묵룡원에 들러 부주님께 사정을 설명하시오.”
* * *
“미치겠군.”
강량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왜 하필 나랑 만난 직후에 이런 일이…….”
“지금 그런 거 따져 봐야 의미 없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중요한 건 엽성 그놈부터 잡아야 한다는 거지.”
“그나저나, 좀 전에 들었는데도 이해가 안 갑니다. 대체 사흡공이라는 게 뭡니까?”
“다 들었잖아. 이해가 안 갈 게 뭐가 있어.”
“자세한 설명은 다 빠졌잖습니까!”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사흡공은 흡성대법의 일종이지만, 흡성대법과는 결이 달라. 본디 지고의 요상결이었던 무공에 흡성대법의 구결 일부를 결합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
“지고의 요상결…….”
“흡성대법은 진기 상충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된 사마공(邪魔功)이다. 하지만 사흡공은 달라. 사흡공의 원류는 어디까지나 신공(神功)이다. 거기에 흡성대법의 일부를 녹여 내어 만든 것이지.”
“아까 듣기로, 내공이 소모된 상태에서만 펼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서 사흡공이 무서운 것이다. 사흡공의 성취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시전자의 몸 상태가 멀쩡하면 절대 구현할 수 없어. 극단적인 제약을 안고 있는 무공이지.”
“한데요?”
“하지만 단전이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거나 생명의 원천인 진원지기가 일정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비로소 사흡공을 펼칠 수 있다.”
스르릉! 탁!
연호정이 흑백쌍룡부의 날을 점검하고는 도끼집에 넣었다.
“사흡공은 타인의 내공과 생명력을 온전히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마공이야. 마공이지만, 근본을 신공에 두고 있기에 심신의 파탄이 나질 않지.”
“즉, 흡성대법과 같은 부작용은 없다는 것이로군요.”
“사람마다, 성취의 정도에 따라 달라. 부작용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부작용이 터질 확률은 이 할에서 삼 할 정도야.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거지만.”
강량의 눈이 빛났다.
“말하자면 엽성이 형님한테 당하고, 그 뒤 이공녀에게 당한 이후 도망치다가 묵룡부의 비밀 통로로 들어와 전홍을 기습, 놈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도주했다는 겁니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보고 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형님의 직감은 놀라우리만치 뛰어나죠. 하지만 그 직감도 어느 정도의 정보가 있어야 힘을 받는 것 아닙니까? 지금으로서는 엽성이 사흡공을 연마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어요.”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래도 엽성이 범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이유가 뭡니까?”
의복과 병기를 점검한 연호정은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회귀한 이후의 과거가 아닌, 흑암의 이름으로 중원 남부를 어둠으로 뒤덮었던 흑도제왕 시절의 과거를.
“사흡공이 역사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 어디인 줄 아냐?”
“저야 모르지요.”
“서장(西藏)이다.”
“……서장이라면, 새외의 그 서장 말씀이십니까? 포달랍궁이 있는?”
“포달랍궁만이 아니지. 중원의 흑도 사파보다도 더 사이한 소뢰음사(小雷音寺)도 있고, 그나마 원류인 뇌음사의 불도(佛道) 명맥을 잇는 대뢰음사도 있다.”
“으음.”
“신공과 마공의 결합. 세상천지에 사람은 많다. 굳이 중원과 새외를 나누지 않더라도, 그러한 발상 자체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다만, 그러한 조합에 지극히 익숙한 곳이 있긴 하지.”
“서장입니까?”
연호정의 안광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 서장이다. 서장에서 흘러나온 사흡공이 중원에 정착했지. 물론 아는 사람도, 연성한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해. 특히 정파에서 사흡공을 아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을 거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엽성이 서장 출신이라는 겁니까?”
“그게 아니야. 엽성이 어디 출신인지는 나도 몰라. 중요한 건, 사흡공의 안정성을 위해 ‘누군가’가 일부러 중원에 뿌렸다는 사실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빌어먹을, 너무 옛날 일이라 잊고 있었어.’
옛날 일이기도 했고, 사실상 기억에 강하게 남지도 않았다. 당시의 상황이 지나치게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오대신장 시절 묵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곧이네요. 결전의 날이.’
‘그렇군.’
‘모용 맹주도 함께한다고요?’
‘그래.’
‘모용 맹주는 희대의 맹자예요. 하지만 간웅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어째 말이 많군. 평소에도 말 좀 많이 해.’
‘……너무 믿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걱정하지 마. 공공의 적을 상대함에 있어 배신을 꾀할 만큼 작은 그릇이 아니니까.’
‘네.’
‘어서 가서 자. 내일 깨어날 때쯤 나는 없을 거야.’
‘부디 무운을 빌어요.’
‘애들 관리 잘하고.’
‘아, 그리고 변절자 중 사흡공을 연성한 놈들이 제법 있다더군요. 대부분은 사흡공을 펼치기도 전에 죽었지만요.’
‘어리석은 놈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그 부분, 따로 조사해 볼게요.’
‘알아서 하도록 해. 지금 나는 거기까지 신경 쓰기 힘들군.’
‘알아요.’
너무 오래된 대화였다. 그러한 맥락이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정확한 대화 하나하나를 떠올리긴 힘들었다.
“삼교의 본거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 다만, 청해와 서장에 걸쳐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
“포달랍궁이나 소뢰음사도 한 패인지 역시 아직 몰라. 다만…… 삼교의 주도하에 사흡공이 중원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으음.”
강량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또 삼교입니까? 정말 머리 아픈 놈들이네요.”
“최대한 전력을 유지한 채 승전보를 올리려는 놈들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사전에 많은 작업을 해 놨어.”
“사흡공이 삼교에서 나왔다고 치지요. 중요한 건, 사흡공이 마공이기는 하지만 부작용도 거의 없는 무공 아닙니까? 그런 무공을 왜 중원에 풀었답니까? 제 놈들이 쓰지 않고?”
“완벽하지 않으니까.”
“예?”
“부작용이 거의 없을 뿐, 아예 없는 게 아니야.”
“설마, 중원 무림인을 통해 사흡공을 실험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그럴 확률이 높아. 당장 신화교만 봐도 놈들은 화정(火精)이라는 걸 연성하고 있다. 목이 달아나거나 극도의 출혈, 오장육부가 몽땅 녹아내리는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지.”
쿠르르릉.
연호정과 강량이 동굴 벽을 열고 나갔다.
“신화교는 아닐 거다. 신화교는 이미 화정으로 완성되었어. 아마 나머지 두 곳 혹은 두 곳 중 하나가 풀었을 것이다.”
“만약 엽성이 사흡공을 익혔다면…… 엽성만이 전부가 아니겠군요?”
“그래.”
연호정이 이를 갈았다.
그는 과거 변절자의 명단을 떠올렸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흑암제 시절의 그와 비슷한 연배였다.
“후계자…… 후계자들을 노렸나?”
실험을 위해 무림 명문의 후계자들에게 사흡공을 풀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런 단순한 이유로 사흡공처럼 위험한 무공을 적지에 풀었을 리는 없다.
“실험은 실험일 뿐. 삼교가 뿌렸다면, 분명 치명적인 결함을 넣어서 뿌렸을 것이다. 그래야 말이 되지.”
“그나저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갑니까?”
“피 냄새를 쫓아야지.”
묵룡부를 나선 두 사람은 부선이 싸웠던 곳을 훑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이곳에서 도주하다가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면, 다시 이쪽으로 나왔을 확률이 높아.”
* * *
“오랜만이군요, 누님.”
“왔구나.”
“예.”
오랜만에 본 당양선은 놀랍도록 의젓해져 있었다.
당양선이 고개를 숙였다.
“그간 맹에서 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가문의 장자가 되어 누님께 폐를 끼쳤어요. 면목이 없습니다.”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놀랍구나.’
당양선은 자신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그랬던 녀석이 이렇게 깍듯한 모습을 보이다니? 몇 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너 역시 가문의 일이 많았을 텐데, 고생했어.”
“아버지와 누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양선은 가만히 웃어 보였다.
환한 미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거짓이 느껴지는 미소도 아니었다.
다만 무엇인지 모를 열망 같은 것이 느껴지기는 했으나, 그게 딱히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요?”
“회의에 들어가셨어.”
“아, 그렇군요.”
당양선이 고개를 저었다.
“중원이 제법 뒤숭숭하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한 손 거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당상아가 미소를 지었다.
“네 무공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구나. 분명 큰 힘이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당장이라도 임무에 뛰어들고 싶어요.”
당양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임무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아버지와 따로 얘기를 나눠 보자.”
당상아가 몸을 돌렸다.
“자, 거처로 가자. 별로 멀지 않아.”
“예, 그러시지요.”
당상아가 몸을 돌리자마자 당양선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섬뜩한 표정이었다.